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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장밥 Nov 24. 2024

저는 학폭 가해자이고, 흰다리새우를 먹습니다.

48. 흰다리새우

넉넉히 어둠이 밀려오는 하늘 아래. 애 엄마는 등 굽은 아들놈의 팔을 드민다.


초등학교 4학년. 아직 덜 자란 팔은 어른 손가락 셋 정도 되는 두께.


그리 굵지 않은 팔뚝 한 가운데에는 연필로 찍힌 까만 자국이 하나 선명하다.


"애 팔이 이렇게 된 걸 보고도, 어떻게 가만히 있겠어요."


파르르. 화를 참고 욱여담은 말. 고성이 오가지는 않았다.


"죄송합니다. 드릴 말씀이 없어요."


더 작은 소리로 고개 숙여 사과하는 아줌마.


분 한 번 찍어바르지 않은 민낯으로 연신 머리를 꾸벅인다.


이 아줌마,

우리 엄마다.


연필심 자국,

내가 그랬다.


나는

학폭 가해자였다.



20년은 더 됐고 30년은 덜 된 얘기니까, 오래되긴 했다.


당시 매스컴에서 '무슨 무슨 따'라는 말을 잔뜩 찍어내던 때였다. 왕 따돌린다고 해서 왕따, 전교생이 따돌린다고 해서 전따, 반에서만 따돌린다고 해서 반따, 은근히 따돌린다고 해서 은따.


일본말 이지메를 순화한다는 취지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단어들이 생겨나면서 덩달아 따돌림 현상도 함께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초등학생이었던 내 눈에는 그래 보였다.


우리 반에도 두 명의 따가 생겨났다. 전따 하나, 왕따 하나. 옳고 그름보다는 좋고 싫음이 더 분명하던 어린 때라 대부분의 우리는 그들과 엮이기 싫어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나는 강제로 그들과 엮이게 되었다.


나는 그들,

그 둘 모두의 짝꿍이었다.



가로 긴 2인용 나무 책상. 책상은 하나지만 의자는 둘. 누군가는 그들과 함께 앉는다.


지금도 대개 그러겠지만, 학급을 굴리는 규칙은 담임선생님의 몫이다. 하다 못해 앉는 자리도 그렇다. 어느 반은 키 순으로 앞에서부터 채워넣고, 어느 반은 원하는 자리를 물어 반영해준다.


우리 반은 하향식, 지독히도 비민주적이었다. 선생님이 자리 배치도를 짜오면, 그대로 자리가 되었다. 그대로 그렇게 앉았다.


이게 전부다.

첫 번째, 전따의 짝꿍이 된 배경이다.



선생님은 나를 불러 따로 타이르셨다. 너는 속이 깊고 배려심이 많으니까, 옆에서 잘 챙겨주라고.


너무 싫었지만, 울지는 않았다. 기대가 있으면, 실망시키기 싫었다.


나름대로는 얼추 노력했던 것 같다. 수업시간에도 쉬는시간에도, 친절하려고 애썼던 것 같다. 가끔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는데, 잘하고 있다는 듯 찡긋거리는 눈짓을 보내주셨다.


허나 친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했다. 안 좋은 쪽으로, 나를 보는 눈빛이 점차 달라지는 듯 했다. 나를 점점 멀리하는 듯 했다.


전따의 짝꿍이라서 그랬을까, 전따를 자꾸 챙겨서 그랬을까.


물론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을 수 있다. 어쩌면 약간의 이유조차 아니었을 수 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전따와 어울린 탓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따돌려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작아졌다.


비어있는 은따의 자리. 나로써 채워져가는 흐름인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전따의 짝꿍을 버틸 수 있었던 건, 기한이 정해져있다는 이유였다.


우리 반은 한 학기에 자리를 세 번쯤 바꿨다. 그러니까 한 번 정해진 자리는 한 달 남짓한 시간이 지나면 바꼈다.


어차피 조금만 지나면 바뀔 자리. 시간은 금방 흐를 수 있다 생각했다. 아이들과의 관계도 다시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시간은 빨리 흘렀다.


한 달이 지나고, 자리 배치표가 다시 나왔다.


이제 나는 전따의 짝꿍이 아니다.


선생님은 정말로 다른 친구를 전따 옆자리에 앉혔다.


해방이었다. 그토록 바라던.


아,

그러나 해방이 아니었다.


우리 반의 또 다른 따.


나는 그의 짝꿍이 되었다.



울었다. 학교에서도, 집으로 돌아가서도. 어린 눈물은 서러웠다.


나중에 엄마를 통해 전해들은 이야기인데, 선생님은 내가 어른스러워서 그 친구하고도 잘 지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셨단다. 글쎄, 어른이 된 지금 생각건대, 그 말이 곧이 곧대로 들리지는 않는다.


어쨌든 수레바퀴는 굴러간다. 울든 말든, 나는 2연 따 짝꿍이 되었다.


처음과 달라진 게 있다면, 내 태도였다. 비우호적이고, 공격적이 되었다. 몸에 그 사람이 닿는 게 너무 싫었다.


한 달을 견뎠는데, 한 달을 더 견뎌야 한다는 절망감 때문에도 그랬을 거고, 점점 은따의 자리를 내가 맡아가고 있다는 위기감 때문에도 그랬을 거다.


안으로도 밖으로도, 위태로웠다.



가령, 금을 그었다.


기다란 책상 한 가운데 선을 긋고, 절대 넘어오지 말라고 윽박질렀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풍경이었지만, 적대감이 남달랐다.


하지만 어디 애가 애 말을 잘 듣던가. 서로에 대한 적대감의 크기도 달랐을 터. 짝꿍은 시시때때로 국경을 넘었다.


한 번, 두 번.

그게 세 번, 네 번, 일상.


가뜩이나 위태롭던 내 위에 스트레스가 얹어져 쌓였다.


그렇게 쌓이던 게 와르르.


아무도 예기치 못 하게,

어느 날

일이 터져버린 거다.



정말 어느 날.


그 날도 누런 팔은 서슴없이 내 영역을 침범했다. 그리고 그 날따라, 내 눈이 돌았다.


더 이상 참지 못 했다. 웽웽 거리는 파리를 과녁 삼은 이구아나처럼, 나는 쥐고 있던 연필로 그것을 공격했다.


힘껏 휙.


첫 번째 공격은 빗나가 팔을 긁었다.


"악.. 아악"


절반의 공격을 받은 왕따는 소리를 내며 몸을 움추렸지만, 이미 내 시야에는 저 놈의 팔만 보이는 상태였다. 저건 응징해야 하는 목표였다.


그래서 팔을 겨누고

다시 위에서 아래로.

휙.


"악!!!!!"


명중.


수업은 중단됐고, 교실은 아수라장이 됐다.



바로 그 날 저녁. 넷이 만났다. 나, 우리 엄마. 왕따, 왕따 엄마.


해가 진 하늘에는 어둑한 가로등 조명만이 고여있었다. 밤눈이 어두워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저들의 얼굴을 잘 못 볼 수 있어서. 그리고 우리 엄마의 표정을 잘 못 볼 수 있어서.


그들은 서운함과 섭섭함을 표했고, 우리 엄마는 사과하고, 또 사과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언덕길은 어느 때보다 가팔랐고, 엄마의 갈라진 입에서는 숨소리 외에는 그 어떤 말씀도 나오지 않았다.



함께 사과를 하고 돌아와 차려진 늦은 밥상. 아빠는 별다른 말씀을 않으셨지만, 얼굴에는 조금의 웃음도 없으셨다. 공기가 무거웠다.


엄마는 엄히 꾸짖으셨다. 당신의 아들이 그런 일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하셨다. 그 어떤 이유도 변명이 되지 않는다 하셨다. 정당화될 수 없다 하셨다.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말라 하셨다.


하지만 새우.


입으로는 자식을 혼냈으되, 손으로는 새우를 까셨다. 대하라며. 지금이 철이라며. 혼나는 건 혼나는 거고, 이건 또 먹으라며, 껍질을 깐 새우살을 건네주셨다.


예정대로, 그 날 저녁에 대하 소금구이가 차려졌던 까닭이다.


소금기가 어려, 군데 군데 쓰리도록 짰지만, 찐득하게 눌러붙은 새웃물에서는 녹진한 향이 났다.


그 때는 그게 대하가 아니라 흰다리새우였다는 걸 몰랐지만, 그냥 으레 대충 대하라며 사고 판다는 걸 몰랐지만,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분에 넘치게 대접받은 흰다리새우는

그 어떤 저녁보다 황홀했다.



1.
날이 추워진다. 새우철이다. 이 시기의 새우는 감칠맛이 아주 좋다.

새우는 어떻게 먹어도 맛있다. 쪄도 좋고, 구워도 좋다. 찌개에 넣어 먹어도 좋고, 신선한 놈은 회로 먹어도 좋다.

2.
주말 부부를 하다가, 최근에 집을 합쳤다. 그래서 새우를 주문했다. 둘이서 새우만으로 배 한 번 불러보자며 한 가득 시켰다.

흰다리새우. 한 때 대하로 오해받던, 또는 대하로 속여 팔던 그 놈이다.

3.
월요일 저녁. 퇴근해서 집에 돌아오니 코끝에 비릿한 내음이 스친다.

엇, 아내, 나 없는 새, 새우 했어요?

신발을 벗기도 전에 아내에게 물어본다.

남편 왔어요? 그게 아니라, 남편이 새우회 먹고 싶다고 해서, 내가 새우 손질해놨어요.

요리라곤 평생 해본적 없는 아내. 짐작컨대 생물 새우를 맨손으로 만져본 것도 처음일 거다. 그런데 저 산더미 같은 새우를 죄다 까놨다. 머리도 다 손질 됐다. 내장도 다 빼놨네. 아니, 아내, 이걸 언제 다 했어요. 또 한참 걸렸겠네, 내 아내.

히히, 솔직히 좀 오래 걸리긴 했어요. 내가 요리를 잘 못하잖아요. 한 1시간? 더 걸렸나?

하, 진짜 아내, 왜 그래요. 내가 해줘야 하는데. 일단 저기 좀 앉아 있어봐요. 내가 얼른 씻고 해줄게요.

4.
올리브유를 둘러 달군 팬에, 껍질도 머리도 속도 없이 살만 남겨진 새우를 얹는다. 간은 딱 소금으로만. 타다끼 하듯, 후다닥 겉만 익혀 접시에 담아 낸다.

정말 맛있다. 구워진 곳에서는 찐득한 새우향이 그득하고, 익지 않은 살에서는 새우회 특유의 찰기 있는 식감이 그대로다. 아내, 진짜 너무 맛있어요. 고마워요.

5.
아니, 아내. 근데 나 속상해요. 나는 아내가 이렇게 대접해줄 사람이 아니에요.

아내, 난 정말 많이 못났고 못 된 사람이에요. 다음부터 이렇게 고생하지 마요. 이러면 나 이제 새우 못 시키잖아요.

6.
무슨 소리에요 남편. 남편이 얼마나 대단하고 좋은 사람인데요. 남편 정말 잘났어요. 진짜 진짜 좋은 사람이에요. 나야말로 미안하고 속상하단 말이에요. 남편이 아내 잘못 만나서 힘들게 일하고 오자마자 집에서 쉬지도 못하고 요리하잖아요.

7.
그 날, 우리의 입은 바빴다. 한 편으로는 새우를 씹어대느라,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는 서로를 향한 애정과 미안함을 말하느라.

8.
분에 넘치게 대접 받은 흰다리새우는
그 어떤 저녁보다 황홀했다.


나는 학폭 가해자이고, 흰다리새우를 먹었다.

또한 나는 학폭 피해자이고, 김밥과 흰다리새우를 먹는다.


누구나 그럴지 모른다. 모두는 선인이지만, 또한 악인이다. 세상은 평면적이지 않고, 우리는 입체적이기 때문이다.


모든 대하가 맛있지 않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흰다리새우가 맛없는 것도 아니다. 뭐라 부르든 어찌 보면 별 의미 없는 일. 내 입에 맛있으면, 그게 대하다.


우리 모두는 대하이고, 또한 흰다리새우다.

평범한 새우고, 평범한 사람이다.



나는 학폭 가해자다.

그리고 흰다리새우를 먹는다.


복에 겹도록 대접 받은 흰다리새우는

그 무엇보다 황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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