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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장밥 Oct 07. 2020

맛도 없는 백반집이 붐볐었던 건

백반 : 명륜동 밀가

5년. 공무원이 될 때까지 걸린 시간이다.



반 십 년을 꽉 채워 쉼 없이 달리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힘을 다 해 열심히 뛰던 때도 있었다. 한창 열심인 시절, 잠자리에 누워 하루를 닫으며 스스로에게 물어보곤 했었다. 떳떳할 만큼 열심인 하루였냐고. 그러면 대답했다. 응, 당당하다고. 시간이 아까운 시간이었다.


신림동 고시촌에 들어가지는 못다. 고시촌 생활이라는 게 은근히 돈을 많이 잡아먹기 때문이다. 식비, 학원비, 교재비, 고시원비, 독서실비, 또 무슨 무슨 비. 감당할 수 없었다. 대신에 시험을 치르고 학교 고시반에 들어갔다. 고시반에서는 도서관 자리도 하나 내주고, 동영상 강의와 교재도 약간 지원해주었기 때문이다. 이게 참 큰 힘이 되었다. 다행히 집도 학교에서 멀지 않았다. 1시간이면 왕복이 가능한 거리였다. 그렇게 고시생활을 시작했다.



사람은 참 쉽게 조급해진다. 공부를 시작하니, 앞으로 공부할 양이 잔뜩 보였다.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랬더니 길거리에 버리는 등하교 시간이 떠올랐다. 그 1시간이 그렇게 아까웠다. 분명 무의미한 자투리 시간이 그보다 더 많을 텐데, 눈 앞에 보이는 건 버스 안에서의 1시간이었다.


그래서 학교 후문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한 달에 23만원짜리 작은 방이었다. 성인 남성이 크게 한 걸음 걸으면 그만인 크기. 팔굽혀펴기를 할 수 있는 공간조차 없었다. 그래도 좋았다. 이제 길에서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아도 된다며 흡족해했다.


사람은 참 쉽게 욕심을 낸다. 막상 가까운 곳으로 옮기니, 이제 머리를 감는 시간도 아끼고 싶었다. 남자가 머리를 감고 말리는 데 뭐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끽해야 10분일 거다. 그 시간도 아깝다며 시간욕심을 부린 거다.


그래서 머리를 밀었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의지 표현도 아니었고, 스스로 놀러나가지 못 하게 하려는 자기구속도 아니었다. 단지 시간이 아까웠다는 이유였다. 어쨌든 효과는 좋았다. 비누로 세수를 하다가, 양손을 머리 위까지 올려 쓱쓱 문지르면 그만이었으니까.



태어나서 이렇게 열심히 한 적은 없었다. 처음으로 하는 노력이었다.


하지만 자랑할 수 없었다. 곱절은 더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고시반에 수두룩했기 때문이다. 목베개남이라고 불렸던 사람도 그 중 하나다. 그 사람은 밤이 깊으면 목에 목베개를 끼고 공부를 했다. 앉은 채로 잠을 자기 위함이었다. 엉덩이를 앞으로 한껏 빼고 등을 등받이에 기대면 자연스레 목베개가 뒷목을 받치게 된다. 그 상태로 잠을 청하는 거다. 자세가 불편하니 오래지 않아 잠에서 깨면, 다시 그대로 공부를 시작한다. 집에 가지 않고, 그대로 꼬박 밤 새워 공부를 하는 것이다.


모두가 열심이었다. 노력을 측정할 수 있다면, 모두가 각자의 신기록을 경신 중이었을 거다.



이런 사람들끼리 모이는 곳이 있었다. 밀가. 학교 후문 근처 백반집이었다. 메뉴판에는 한 끼에 7천원이라고 적혀있었지만, 우리는 월식이라는 독특한 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일종의 선불 정액제였다. 한달에 17만원을 내면, 하루 세 끼를 해결할 수 있었다. 따로 식권을 주지도 않고, 출입 명부를 작성하지도 않는다. 열려있는 문으로 쓱 들어가서 먹으면 그만이다. 도서관과 가깝고, 가격도 저렴하다. 백반집이기 때문에 여러 반찬을 먹을 수 있고, 학식처럼 줄 서서 계산하고 배식받느라 시간을 투자하지 않아도 된다.


맛은 없었다. 치명적인 단점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곳에 갈 수밖에 없었다. 밥 때. 모두가 자연스레 밀가로 모였다.


일주일 중 두 끼는 특식이었다. 수요일 저녁에는 반계탕, 금요일 저녁에는 제육쌈밥이 나왔다. 그러나 말 특식이었지 맛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반계탕은 여느 삼계탕처럼 푹 고아 감칠맛 돋는 요리가 아니었다. 허여멀건하게 닭 끓인 물에 불과했다. 국물은 뿌옇지조차 않았다. 제육쌈밥의 제육은 볶음이 아니었다. 값싼 부위를 조금 겋게 끓이삶은 게 전부였다. 원래부터 국물요리였던 것처럼 물이 흥건했고, 숟가락으로 물을 뜨면 고기 부스러기가 가득했다. 그래서 우리는 제육볶음이 아니라 제육부스러기라고 불렀다. 그런데도 다른 날들 보다는 나았는지, 밥도 한 그릇씩 더 먹곤 했다.


밥은 질었지만 공기가 커서 양이 적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이상했던 건, 배가 안 찼다는 거다. 먹고 뒤돌아서면 배고팠다. 아니, 뒤돌기도 전에 배부터 고팠고, 먹으면서도 고팠다. 나이가 어렸던 탓도 아니다. 유독 밀가만 그랬으니까. 다른 음식점들은 밥을 먹고나면 배가 더부룩할 정도로 불렀는데, 이 집은 오히려 소화가 더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지만, 밀가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예외 없이 공감하는 내용이었다.



주인 아주머니는 아저씨에게 이제 식당 그만하자는 말씀을 자주하셨다. 돈도 안 되고 힘만 든다고 하셨다. 사실 그곳은 전문 식당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가정집에 가까웠다. 이른 아침에 아침밥을 먹으러 가면 십 년은 넘게 썼을 법한 자주색 이불이 널부러져 있곤 했다. 살던 한옥집에서 대문만 열고 장사를 한 느낌이었다.


친절한 집은 아니었다. 간판부터 빛나는 요즘 체인점들처럼 방긋거리며 손님을 맞이하는 직원은 없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집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계속 베풀었지 싶다.


식당을 개업했을 때와 달리, 해가 갈수록 어르신들의 몸은 늙었을 것이고, 기력은 쇠했을 것이다. 힘에 부쳐서 자꾸 식당을 접고 싶다고 하셨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마 그만두지 못 하신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머슴아 기지배들이 눈에 밟혀서였는지도 모른다. 어르신 내외에게 우리는 얼마나 어려보였겠는가. 몇 년동안 계속 추레한 차림으로 책 한 권을 끼고 밥을 먹으러 오는 아이들이 얼마나 안쓰럽고, 얼마나 기특해보였겠는가. 어쩌면 밥이 유달리 질었던 것도, 반찬이 유난히 맹탕이었던 것도 우리를 위한 배려였을 거다. 사실 음식 맛이야 조미료만 넣으면 얼마든지 좋아진다. 그런데 그렇게 만든 음식은 결코 건강하지만은 않았을 거다. 게다가 먹는 양이 늘어나서 소화는 안 되었을 거고, 공부에 집중은 더 못 했을 거다. 진 밥과 싱거운 반찬 덕에 공부하는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고시반에서는 매년 합격생들이 나온다. 그들 사이에는 나름의 공통된 추억이 있다. 고시촌이 아닌 학교 고시반에서 공부한 사람들만의 기억이다. 그 중 하나가 밀가다. 그 집 이야기는 단골 안주거리다. 모두 웃으면서 얘기한다. 그 곳은 밥이 이상하다고. 밥을 먹으면서도 소화가 된다고. 들어갈 때보다 더 배고파져서 나오는 집이라고.


그러면서 덧붙여 말한다. 그렇지만 그 곳을 갈 수밖에 없었다고.


또한 말한다. 그 곳은 더 이상 가기 싫다고. 지긋지긋했던 고시생 시절이 생각난다고. 맛도 없다고.


같은 추억과 같은 힘듦을 겪었던 사람들이다.



오늘은 공무원 시험 감독을 하러 가는 날이다. 공교롭게도 감독을 나가는 시험 장소도 모교다. 한 때 고시반 책상에 앉아서 시험을 보던 사람이, 어느새 시험 감독을 하러 간다. 같은 공간인데 다른 시간이라는 이유로 나라는 사람의 역할이 바뀐 것이다. 묘하면서도 새로운 기분이다.


뽕이 든 것은 아니다. 직장인부심을 부리는 것도 아니다. 그리워하던 5년 간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층층이 겹쳐보이며 연한 미소가 지어질 뿐이다.


이제는 직장인이 되어서, 정말 많은 게 게 바뀌었다. 공직에 나아가면 이러이러한 정책을 펼치겠다고 다짐하던 다부진 마음은 벌써 사라졌다. 힘든 일은 하기 싫고, 야근은 더 싫다. 칼퇴하고 술 한 잔 할 때면 그렇게 좋다. 하고 싶은 취미도 한 아름이다.


초심을 찾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 때의 다짐대로 사는 삶은 너무 힘들 것 같다. 그렇지만 초심을 다지던 그 시절이 그립기는 하다. 그랬던 스스로의 모습이 그립기는 하다. 그럴 때면 꼭 밀가가 생각난다.


시험 감독을 마치고 나면, 마침 딱 밥시간이다. 금요일은 아니지만 한번 또 가봐야겠다. 월식이 아니니까 7천원을 내고. 그 때의 나를 되새기면서.


어르신들은 그 때처럼 그 자리에 있을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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