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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장밥 Feb 17. 2021

오래된 돼지국밥집 있는 도시

돼지국밥 : 종로3가 유진식당

서울. 전국민 오천만 중 천만이 모여 사는 도시. 땅덩이에 몰려있는 인구 밀집도로는 가히 세계적인 수준이다. 덕분에 값도 참 비싸다. 땅값도 그렇고 집값도 그렇지만 밥값도 그렇다. 소위 핫플이라는 곳을 가면 더욱 그렇다. 별로 공들인 것 같지도 않은 파스타도 2만원을 훌쩍 넘는다. 냉동 닭튀김도 플레이팅만 하면 치킨 가라아게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3만원씩 간다.


이런 서울 한복판에 있는 곳. 종로. 종로는 서울과 역사를 같이하는 동네다. 서울이 경성일 때, 한성일 때, 그 이전에 한양일 때. 그 때에도 종로는 지금처럼 있었다.


서울 한가운데 종로가 있듯, 종로 한 가운데에는 탑골공원이 있다. 종로가 오래된 동네이듯, 탑골공원에는 오래된 이들이 모인다. 이 곳에서 육십이면 청춘이다.


이미 생의 정점을 지난 늙은이들. 공원에 모이는 그들 대부분은 생명력 뿐 아니라 경제력 역시 희미하다. 나라에 몸을 바쳤기 때문인지, 자식에게 젊음을 바쳤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모두가 각자의 사정이 있을 터다. 확실한 건, 지금 당장 주머니에 돈이 없다는 것.


어쩌면 탑골공원을 위시한 종로3가의 음식점들은 그들에 대한 존경일지도 모른다. 세계적으로도 밀도 높은 서울의 한복판에서, 종로3가만큼은 놀랄만큼 값이 저렴하다. 2천원짜리 국밥, 3천원짜리 냉면, 5천원짜리 문어숙회. 머리카락에조차 주름이 새겨진듯한 늙은이들이 값 싼 노포를 가득 채운다.



탑골공원을 오른쪽에 두고 얼마쯤 걸어들어가면, 작은 삼거리 어귀에 검은 때가 낀 초록 차양이 쳐진 식당이 하나 보인다. 건물외벽에 기대어진 입간판에는 손글씨로 차림표가 적혀있고, 비바람에 변색된 현수막에는 간신히 읽을 수 있는 수준으로 가게 이름이 적혀있다. 유진식당이라고.


우리네 오랜 노포 음식점에는 주방이 따로 없다. 손님이 출입구 옆에서 주인장이 노상 음식을 준비할 뿐이다. 요새말로 설명하자면, 완벽한 오픈키친이다. 가게를 드나드는 모든 이들이 훤히 볼 수 있는 주방이니까. 유진식당 역시 그렇다. 평양냉면, 돼지국밥, 녹두지짐. 음식이 만들어지는 모습을 누구나 엿볼 수 있다.


서양 연극이 무대와 객석을 분리하듯, 서양 식당은 주방과 홀을 나눈다. 식재료는 본연의 모습으로부터 탈피한 채, 잘 차려진 접시 위에 올라가서야 비로소 손님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니까 세련됐다. 반면 우리의 공간은 하나다. 마치 마당놀이에서 관객과 배우가 한 공간에 있는 것과 같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완성되기 전의 식재료를 보게 된다. 화장하기 전 민낯을 보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세련됨은 좀 떨어진다.


이성과의 첫만남, 예컨대 소개팅을 할 때 오래된 국밥집에 가지는 않는다. 덜 세련된 탓일 거다. 하지만 오랜 연인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노포. 투박함 속에서 느낄 수 있는 묵직한 매력.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친숙함과 익숙함. 어느 순간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된, 오랜 연인과 닮았다. 그래서일거다. 속 깊은 사이일 수록 유서 깊은 음식점을 찾는 것이.


그 날도 그랬다. 오랜 연인과 유진식당을 찾은 날이었다.



이 곳을 처음 찾았던 건 평양냉면 때문이었다. 이미지와 달리 평양냉면은 꽤나 값 나가는 음식인데, 종로3가 일대가 그렇듯이 이 곳은 평양냉면이 저렴하기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돼지국밥에 맛을 들렸다. 아무때나 와서 국밥 한 그릇 말아먹을 수 있는 곳. 부담 없는 곳. 소박한 곳. 그게 유진식당이었다.


대단한 곳은 아니지만 일상이 담긴 곳. 사랑하는 이와 일상을 공유하고 싶었다.


식당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좁은 내부. 마주보는 사람이 내뿜는 숨이 내 귀에 닿을만큼 가까운 거리.


아주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 비어 있던 옆 테이블이 손님으로 채워졌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커플 한 쌍이 앉았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오랜 연인이었다. 그러나 둘이 함께 보낸 세월은 우리와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노부부. 머리가 하얗게 샌 노부부였다.



참 이상한 날이었다. 습관이 아닌 일들을 습관처럼 한 날이었다.


돼지국밥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시간. 앉은 채로 다리를 떨었다. 본래 다리 떠는 습관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떨었다.


국밥이 나오기 전, 테이블에 두 쌍의 수저를 차렸다. 수저. 숟가락과 젓가락.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숟가락을 뒤집어 놓았다는 것. 오목한 부분이 식탁을 보고, 볼록한 부분이 천장을 보게 말이다.


수저의 위치도 어색했다. 식탁의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 보통 올려놓는 곳의 반대편에 두었다. 숟가락을 거꾸로 둔 것도, 수저를 왼쪽에 둔 것도, 이전엔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짓이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하늘의 뜻이었나 싶다. 이게 사람의 인연이었나 싶다. 습관이 아닌 일들을 습관처럼 한 덕에, 우리는 옆 테이블의 노부부와 말꼬를 트게 되었다.


다리 떨지 마라. 복 나간다.

숟가락 뒤집어 놓지 마라. 돈 나간다.

수저 왼쪽에 놓지 마라. 귀신 온다.


젊은이들의 행동이 못 마땅했던, 어르신의 지적으로 말이다.



지적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심지어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미신 같은 이야기들을 하는데, 누가 웃으면서 들을 수 있을까. 누가 그런 잔소리를 듣고 진심으로 반성을 할까.


하지만 그 날은 끝까지 이상했다. 분명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들었는데, 이야기가 이어졌다. 돼지국밥을 먹으며, 대화가 이어졌다.


연세가 어떻게 되시냐.

두 분은 어떻게 만나셨냐.


노부부의 추억을 듣고, 그 때의 생활을 들었다. 지금과는 다른 풍경들을 전해들었다. 노부부가 이야기한 것은 특별한 스토리가 아닌 그들의 일상이었지만, 그 시대를 겪어보지 못한 우리에게는 자못 흥미로운 얘기였다.


더욱 신기했던 건, 우리의 관계였다. 우연히 같은 식당을 찾은 손님이기 전에, 알고보니 모교 교수님이셨다. 전공대학의 초대 교수님이셨다. 인연이 이렇게 되나. 이야기의 소재는 학교로 이어졌다.


우리는 서로 다른 때에 태어나 서로 다른 삶을 살았지만, 같은 음식점에서 같은 때에 만났다. 게다가 생각지도 않았던 공통분모가 있음을 발견했다.


우리의 만남은 그 식당에서 끝났다. 그러나 서로에 대한 이해는 깊어졌다. 잔소리를 주고 받던 처음과는 다른 관계가 되었다. 잔소리 들을 짓을 하는 어린 놈이 아니었고, 쓸 데 없이 오지랖부리는 노인네가 아니었다. 우리는 우리가 되었다.



이게 노포다.


갈등이 있다는 것은 이해가 적다는 것이다. 서로에 대한 이해가 없으니, 자신의 시야로밖에 못 보는 것이다. 각자의 시야에서 보면, 상대방을 이해할 수 없을 거다.


속상한 것은, 우리 사회의 많은 곳들에서 이해가 적다는 것이다. 그래서 싸운다는 것이다. 네 편 내 편 가르고, 상대방을 배척하기 바쁘다. 세대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틀림이 아닌 다름을 존중하자고 떠들어대지만, 말 뿐이다.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것처럼만 보일 뿐이다. 갈등은 당연히 계속된다.


그래서 중요한 게 노포다.

노포는 소통이기 때문이다.


노포는 하나의 공간이다. 어우러지고 아우르는 공간이다. 젊은이와 늙은이, 신세대와 구세대가 함께 모인다. 시대를 뛰어넘는 맛이 있기 때문이다.


클럽에는 젊은이들만 모인다. 노인정에는 늙은이들만 모인다. 함께 모일 수 있는 곳은 결국 음식점이다. 노포다.


노포라는 공통된 공간에서 공통된 시간을 머무르는 사람들. 그들 사이에서는 당연히 교류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요즘 사람들이야 각자 밥만 먹고 일어날 테지만, 옛날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교류는 반드시 일어난다. 옛날 사람들은 옛날 사람처럼 행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동네 어르신들이 동네 꼬맹이를 야단쳤듯이. 그렇게 온 마을이 한 아이를 함께 키웠듯이. 구세대는 신세대에게 말을 건낼 거다. 그렇게 둘은 이야기를 시작할 거다.


이야기를 함께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서로가 함께 하는 추억이 생길 것이고, 생각지 못했던 접점을 서로 찾을 것이다. 그렇게 이해가 많아지고 공감이 생기게 되면, 자연스레 갈등은 줄어들게 될 것이다.


노포가 있는 도시.

오래된 돼지국밥집이 있는 도시.

세대 갈등이 없는 도시다.



그래서 지금의 서울이 아쉽다. 재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자본주의라는 체제 아래, 낡고 오래된 음식점들이 사라지고 있다. 싹 다 밀려버리고 있다.


노포가 지켜지지 않는 모습이 세대 갈등을 방관하는 것 같이 보인다면 너무 비약한 걸까. 오히려 싸움을 더 조장하는 것 같아 씁쓸함이 느껴진다면 너무 지나친 걸까.


모두가 싸우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비록

오늘도 헐리어 문 닫은 노포에

헛걸음을 하고 돌아서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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