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고기국밥 : 명동 따로집
검붉은 그릇과 빨간 소고기국은 배색이 잘 맞았다. 언뜻 보아도 먹음직스러웠다. 푹 이어 부스러질 것 같은 무우가 몇 개, 얇은 콩나물이 약간, 뭉텅하게 썰린 선지와 소고기, 빨간 기름이 살짝 떠 있는 국물. 국 한 그릇이 워낙 든든해서 깍두기와 부추무침 만으로도 이미 훌륭한 한 상이었다.
어머니는 밥을 국에 붓고는 숟가락으로 석석 눌러 마셨다. 잘 말아진 국밥을 한 술 뜨시고는 그 위에 부추김치를 얹으셨다. 액젓내음이 물씬 풍기는 향은 국밥과 꽤 잘 어울렸을 거다.
나는 밥을 말지 않았다. 국에서 건더기들을 골라 반찬처럼 먹으며, 맨밥을 한 젓가락씩 입에 넣었다. 그렇게 절반쯤 먹었을 때, 비로소 국밥을 말았다. 밥물이 국물과 섞이며 당초의 빛깔을 잃었다.
밥을 만나기 이전의 국물과 국밥의 국물은 다른 맛이다. 다른 요리다. 둘 모두를 놓칠 수 없기에, 절반씩 나눠 먹었다. 습관이다.
국밥 먹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에이, 뭐가 똑같아요. 아버지는 잘생겼는데 나는..."
반농반진. 우리 아버지는 잘생기셨다. 키도 크시다.
"여기, 아빠랑 데이트하던 곳이야."
체급 차이도 있었다. 외가는 꽤나 유복한 집이었다. 이름을 대면 알만한 거부와 인연이 닿는 사이였다. 반면에 친가는 그렇지 않았다. 할아버지께서 서울로 상경하신 후, 많은 허드레 직업을 거치다가 간신히 자리를 잡은 게 재래시장에서의 생선 장사 일이었다. 부자집 딸과 생선장수의 아들. 자연스러운 조합은 아니었다.
심지어 두 분은 법률로써 가로막혀 있었다. 당시에는 동성동본 혼인 금지법이 있었다. 성과 본이 같으면 어쨌든 먼 친척 관계일 터이니 결혼을 하지 말라는 법이다. 얄궂게도 부모님은 성과 본이 같았다.
이러한 고비들은 두 분에게는 낮은 허들이었나보다. 그만큼 서로에 대한 사랑이 두터웠었나보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사랑하셨고, 아버지는 역시 어머니를 그러셨었나보다. 나이 차이도, 체급 차이도 두 분의 마음 앞에선 별 힘을 못 쓰는 장애물이었다. 그러니까 친가는 나이 많은 며느리를 감사히 받았고, 외가는 배경 없는 사위를 기꺼이 맞았을 거다. 부모 눈에는 자식 마음이 보이는 법이니까. 내 자식이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훤히 보이는 법이니까.
동성동본 문제도 우습게 해결됐다. 아버지가 서류를 떼다가 우연히 발견하신 사실인데, 아버지, 그러니까 친가쪽 성씨가 실제와 다르게 행정망에 올라가 있었다고 한다. 원래 본가는 전주인데, 행정상으로는 공주였다. 법적으로 두 분의 결혼은 아무 문제가 없게 된 것이다. 이유는 모른다. 과거 수기로 작성되어 있던 인적정보를 전산화하는 과정에서, 흘림체로 적혀있던 한자를 담당 공무원이 잘못 읽은 것이 아닌가 짐작만 할 뿐이다. 흘려쓰면, 전(全)과 공(公)은 놀랍도록 비슷해지니까.
단순히 운이 좋았며 웃어넘길 일은 아니다. 놀라운 운명이다. 둘은 서로를 만날 운명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오래 전부터 두 분을 엮어놓고 있던 보이지 않는 끈이, 잠시 동사무소 직원의 눈을 흐리게 한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아버지는 비혼주의자셨다. 그러나 어머니를 만나 생각이 바뀌셨단다.
아버지는 아이를 낳지 않으려고 하셨다. 그러나 어머니와 살며 생각이 바뀌셨단다.
이 사람과 평생 하고 싶으셨단다. 이 사람의 아이를 낳고 싶으셨단다.
나는 고비 여럿과 생각의 변화 여럿을 지나 낳은 두 분의 아들이다.
친가에서는 아빠를 꼭 닮았다고 한다. 외가에서는 엄마를 꼭 닮았다고 한다.
어머니. 당신을 반 닮고, 당신의 반쪽을 반 닮은 아들. 이제 그 아들과, 당신의 반쪽과 데이트 했던 곳에서 시간을 함께 한다. 그리고 그 아들은, 당신의 반쪽과 꼭 닮은 모습으로 밥을 먹는다. 반은 맨밥으로, 나머지 반은 국밥으로.
그래서 어머니는 가만히 지켜보셨던 게다. 아들이 국밥을 먹는 모습을. 어머니는 어떤 마음이셨을까. 아들에게서 이십여 년 전 연인의 모습을 보셨을까. 아니면 그것을 넘어선 무언가를 보셨을까.
둔한 아들은, 그 곳이 부모님의 데이트 장소였다는 말을 들은 다음에야 어머니 얼굴에 슬쩍 깔린 미소를 눈치챌 수 있었다.
소고기국밥을 팔던 명동따로집은 더 이상 그 자리에 없다. 가게를 옮긴 건지, 아예 문을 닫은 건지. 아는 바 없다. 그렇지만 그 곳에서의 두 분 데이트까지 의미 없이 사라진 건 아니다. 데이트로 잘 쌓인 두 분의 애정이 몇 가지 장애물을 넘어 두 분을 결혼에 이르게 했고, 사랑의 흔적인 두 아들딸이, 벌써 두 분이 결혼하시던 나이를 넘은 어른이 되었으니까.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