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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장밥 Dec 23. 2020

여기, 아빠랑 데이트하던 곳이야

소고기국밥 : 명동 따로집

어머니와의 마실이었다. 행선지는 명동이었다.


요우커로 불리는 중국 보부상들에게 점령 당하기 전까지, 명동은 나름 운치있는 곳이었다. 취천루 같은 노포와 캔모아 같은 트랜디한 카페가 어울려 있었고, 천원에 네 개짜리 길거리 붕어빵집과 한 사람에 몇 만원씩 하는 씨푸드뷔페가 마주보고 있었다. 첨탑처럼 한껏 솟구친 명동성당은 그 자체로 명동의 랜드마크였다. 성탄절이면 명동을 찾은 연인들로 거리가 빼곡했다.


어머니와의 명동 나들이도 아마 그 즈음이었을 거다. 성탄절. 골목마다 굽이치는 캐럴소리, 내뿜는 날숨에 김이 서리는 안경, 그리고 추운 공기 속에서 유독 따뜻했던 어머니의 손.


그 동네에서 가장 좋아했던 음식은 칼국수였다. 지금은 명동교자라는 이름으로 장사를 하는 모양이지만, 그 시절에는 명동칼국수라는 이름이었다. 고춧내가 나는 김치와, 살짝 불어 젓가락에 밀가루때가 끼는 도톰한 칼국수면을 한 젓가락에 집어먹는 그 맛이 좋았다. 우리 가족이 명동에 가면, 거진 칼국수였다.


그 날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가 반 발 앞서 걸으셨으나, 길은 어린 내 눈에도 익숙했다. 관성. 칼국수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관성처럼 이어지던 길은 관성대로 그치지 않았다. 다섯 발 쯤 더. 평소보다 다섯 발 쯤 더 가서야 어머니의 걸음은 멈추었다. 명동칼국수 바로 옆 허름한 가게. 소고기국밥집이었다.


몇 번이고 칼국수집을 찾았으나, 바로 옆에 이런 가게가 있는 줄은 몰랐다. 그만큼 자그마한 가게였다. 내부도 그랬다. 비좁았다. 건장한 성인 남성이라면 어깨를 접고 들어가야 할 법한 문을 열고 들어서면, 왼쪽에는 부엌 겸 카운터가 있었다. 요즘 말로 하자면 오픈 키친. 주인 아주머니의 요리 과정을 구경할 수 있는 구조였다. 분명 간판은 소고기국밥인데, 널쩍다란 철판 위에서 여러 전들이 부쳐지고 있었다.


전 냄새를 헤치다가 시선을 고치면, 다섯 쯤 되는 테이블이 다. 그리 산뜻하지는 않은 디자인. 덜 펼쳐진 공깃돌처럼 테이블들이 옹기종기 흩뿌려져 있었다. 이들을 지나쳐 1층 끝에 다다르면 비밀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통로 같이 생긴 계단이 하나 있다. 폭은 좁고 높이는 높은 옛날식 계단이었다. 2층이라기엔 낮은, 1.5층 정도 되는 공간에 다시 테이블이 몇 개 더 있었다. 한 푼이라도 더 벌려던 국밥집 아주머니의 노력이었을 거다.


한 그릇에 5천 원, 둘이서 만 원. 어머니는 두 그릇을 부탁하셨다. 음식은 주문이 끝나기 무섭게 나왔다. 슬로우푸드라는 국밥은 패스트푸드라는 햄버거보다도 빨랐다. 흙으로 만든 듯한 묵직한 토기에 뻘건 국이 담겨나오고, 멋모르고 잡았다간 손을 데여버리는 얇은 스댕 밥공기에 흰 쌀밥이 따로 나온다. 국과 밥이 함께 서빙되면 국밥이고, 밥과 국이 따로 나오면 따로국밥이란다. 참 직관적이면서도 해학스러운 작명이다.


검붉은 그릇과 빨간 소고기국은 배색이 잘 맞았다. 언뜻 보아도 먹음직스러웠다. 푹 이어 부스러질 것 같은 무우가 몇 개, 얇은 콩나물이 약간, 뭉텅하게 썰린 선지와 소고기, 빨간 기름이 살짝 떠 있는 국물. 국 한 그릇이 워낙 든든해서 깍두기와 부추무침 만으로도 이미 훌륭한 한 상이었다.


어머니는 밥을 국에 붓고는 숟가락으로 석석 눌러 마셨다. 잘 말아진 국밥을 한 술 뜨시고는 그 위에 부추김치를 얹으셨다. 액젓내음이 물씬 풍기는 향은 국밥과 꽤 잘 어울렸을 거다.


나는 밥을 말지 않았다. 국에서 건더기들을 골라 반찬처럼 먹으며, 맨밥을 한 젓가락씩 입에 넣었다. 그렇게 절반쯤 먹었을 때, 비로소 국밥을 말았다. 밥물이 국물과 섞이며 당초의 빛깔을 잃었다.


밥을 만나기 이전의 국물과 국밥의 국물은 다른 맛이다. 다른 요리다. 둘 모두를 놓칠 수 없기에, 절반씩 나눠 먹었다. 습관이다.


"참 아빠랑 똑같아."

국밥 먹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에이, 뭐가 똑같아요. 아버지는 잘생겼는데 나는..."

반농반진. 우리 아버지는 잘생기셨다. 키도 크시다.


"아빠도 국밥 이렇게 드시는 거 알지? 어휴, 걷는 것도 어찌나 그렇게 둘이 똑같은지. 부자가 걸을 때 뒤에서 보면 구분이 안 가더라."

어머니는 고슴도치가 아니셨나보다. 우리 아들도 잘생겼다는 뻔한 대답 대신, 황급히 얘깃거리를 돌리셨다.


그러다가 덧붙이신 한 마디에, 나는 짙게 놀랐다.

"여기, 아빠랑 데이트하던 곳이야."


서로에게 첫 사랑이셨다는 어머니와 아버지. 두 분은 낯 부끄러운지 당신들의 연애 얘기를 자식들에게 상세히 털어놓지는 않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동생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 두 분이 이어지기까지 여러 고비가 있었었다는 것을.


그 시절 그 시대에 연상연하 커플이셨다, 두 분은. 그것도 네 살이나. 결혼을 하시던 때, 어머니의 나이는 이미 스물여덟. 당시로서는 결코 어린 나이가 아니었다. 많은 나이였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어머니를 며느리로 반갑게 맞이해주셨을지언정, 신기해하는 주변의 시선은 분명 부담이었을 거다.


체급 차이도 있었다. 외가는 꽤나 유복한 집이었다. 이름을 대면 알만한 거부와 인연이 닿는 사이였다. 반면에 친가는 그렇지 않았다. 할아버지께서 서울로 상경하신 후, 많은 허드레 직업을 거치다가 간신히 자리를 잡은 게 재래시장에서의 생선 장사 일이었다. 부자집 딸과 생선장수의 아들. 자연스러운 조합은 아니었다.


심지어 두 분은 법률로써 가로막혀 있었다. 당시에는 동성동본 혼인 금지법이 있었다. 성과 본이 같으면 어쨌든 먼 친척 관계일 터이니 결혼을 하지 말라는 법이다. 얄궂게도 부모님은 성과 본이 같았다.


이러한 고비들은 두 분에게는 낮은 허들이었나보다. 그만큼 서로에 대한 사랑이 두터웠었나보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사랑하셨고, 아버지는 역시 어머니를 그러셨었나보다. 나이 차이도, 체급 차이도 두 분의 마음 앞에선 별 힘을 못 쓰는 장애물이었다. 그러니까 친가는 나이 많은 며느리를 감사히 받았고, 외가는 배경 없는 사위를 기꺼이 맞았을 거다. 부모 눈에는 자식 마음이 보이는 법이니까. 내 자식이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훤히 보이는 법이니까.


동성동본 문제도 우습게 해결됐다. 아버지가 서류를 떼다가 우연히 발견하신 사실인데, 아버지, 그러니까 친가쪽 성씨가 실제와 다르게 행정망에 올라가 있었다고 한다. 원래 본가는 전주인데, 행정상으로는 공주였다. 법적으로 두 분의 결혼은 아무 문제가 없게 된 것이다. 이유는 모른다. 과거 수기로 작성되어 있던 인적정보를 전산화하는 과정에서, 흘림체로 적혀있던 한자를 담당 공무원이 잘못 읽은 것이 아닌가 짐작만 할 뿐이다. 흘려쓰면, 전(全)과 공(公)은 놀랍도록 비슷해지니까.


단순히 운이 좋았며 웃어넘길 일은 아니다. 놀라운 운명이다. 둘은 서로를 만날 운명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오래 전부터 두 분을 엮어놓고 있던 보이지 않는 끈이, 잠시 동사무소 직원의 눈을 흐리게 한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아버지는 비혼주의자셨다. 그러나 어머니를 만나 생각이 바뀌셨단다.

아버지는 아이를 낳지 않으려고 하셨다. 그러나 어머니와 살며 생각이 바뀌셨단다.


이 사람과 평생 하고 싶으셨단다. 이 사람의 아이를 낳고 싶으셨단다.


나는 고비 여럿과 생각의 변화 여럿을 지나 낳은 두 분의 아들이다.


친가에서는 아빠를 꼭 닮았다고 한다. 외가에서는 엄마를 꼭 닮았다고 한다.


어머니. 당신을 반 닮고, 당신의 반쪽을 반 닮은 아들. 이제 그 아들과, 당신의 반쪽과 데이트 했던 곳에서 시간을 함께 한다. 그리고 그 아들은, 당신의 반쪽과 꼭 닮은 모습으로 밥을 먹는다. 반은 맨밥으로, 나머지 반은 국밥으로.


그래서 어머니는 가만히 지켜보셨던 게다. 아들이 국밥을 먹는 모습을. 어머니는 어떤 마음이셨을까. 아들에게서 이십여 년 전 연인의 모습을 보셨을까. 아니면 그것을 넘어선 무언가를 보셨을까.


둔한 아들은, 그 곳이 부모님의 데이트 장소였다는 말을 들은 다음에야 어머니 얼굴에 슬쩍 깔린 미소를 눈치챌 수 있었다.


소고기국밥을 팔던 명동따로집은 더 이상 그 자리에 없다. 가게를 옮긴 건지, 아예 문을 닫은 건지. 아는 바 없다. 그렇지만 그 곳에서의 두 분 데이트까지 의미 없이 사라진 건 아니다. 데이트로 잘 쌓인 두 분의 애정이 몇 가지 장애물을 넘어 두 분을 결혼에 이르게 했고, 사랑의 흔적인 두 아들딸이, 벌써 두 분이 결혼하시던 나이를 넘은 어른이 되었으니까.


먼 미래, 내 새끼와 함께 외식을 할 적에, 그 때의 아내와 연애를 하던 맛집에 가보고 싶다. 그곳에서는 내 새끼와의 시간을 보낼 거고, 미혼 시절의 아내와 보냈던 시간이 떠오를 거다. 그리고 어머니가 추억될 거다. 소고기국밥을 먹던 아들을 빤히 쳐다보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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