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간장밥 Nov 11. 2020

여든 넘은 할머니와의 퓨전 한정식

한정식 : 광화문 설가온

"예가 세종문화회관 가는 버스 맞지요?"


노인은 기사에게 몇 번이나 길을 확인한다.


"맞지요? 잉?"


"아, 얼른 출발해야 되니까 빨리 타세요 할머니"

결국 짜증이 나버린 기사의 언성 높은 대답을 듣고 나서야 노인은 버스에 올라탄다. 



손자는 이미 서른이 넘었다. 그러나 서른 해가 지나가도록 할머니에게 밥을 먹으러 가자는 소리를 해본 적이 없었다.



"이거 타고 있으면 세종문화회관 가지요? 잉?"


노인은 버스 안 젊은 승객에게 길을 또 확인한다.


무엇이 노인을 그렇게 불안케 했을까. 무엇 때문에 노인은 이 무서운 버스에 홀로 올라타야 했을까.



손자가 할머니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되려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 중에 하나였다. 그러나 손자는 천성이 무딘 탓에, 살아온 날 보다 남은 날이 더 적은 늙은 할머니에게조차 살갑지 못했다. 연인 앞에서는 갖은 아양을 떨어대는 사람이었지만, 할머니 앞에서는 웃는 낯을 내보이는 것마저 어색해했다.


손자는 할머니에게 짜장면 한 그릇 대접한 적이 없었다. 할머니와 둘이 밥을 먹으며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상상만으로도 괜히 낯이 간지러웠다. 때가 되면 돈이나 드렸다. 이거면 손자 노릇은 하는 거라고 스스로 위안했다. 먼저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는 일도 없었다.


무뚝뚝한 손자를 작게나마 변화시킨 건 할머니의 숨소리였다. 언젠가부터 손자 귀에 들리는 할머니의 숨소리는 탁하기 이를 데 없었다. 씨익- 씨익- 여든 하고도 다섯 해를 다 써서 낡아버린, 갈라진 입술 사이로 맥없이 새어 나오는 날숨. 어쩌면 정말 머지않았겠구나. 할머니의 숨은 손자를 불안케 하기에 충분했다.



"어? 할머니! 저 기억 안 나세요?"

노인의 질문을 받은 젊은 승객이 의외의 대답을 한다.


"누구여? 내가 나이가 먹어서 기억을 못 혀~"


"저예요 할머니! 김PD요! 예전에 촬영장에서 할머니 뵀었잖아요!"


"으잉? 김PD? 하이고야, 예서 다 보네."

이미 쇠한 해마의 저 편에서, 노인은 기억 한  끄집어낸다. 간신히 기억이 난 모양이다.



손자가 근무하는 회사 앞에는 광화문 광장이 펼쳐져 있었다. 왼쪽으로는 경복궁이 내려다보였고, 오른쪽으로는 세종문화회관이 웅장했다.


세종문화회관 지하에는 아띠라는 이름의 식당가가 영업 중이었다. 회사와 워낙 가까웠던 데다가 나름 구색을 잘 갖추고 있는 음식점들이 있었기 때문에, 종종 업무 회식으로 방문하는 곳이었다.


그날도 그랬다. 업무 차, 오찬 간담회를 하러 식당가로 내려갔다. 목적지는 서울 3대 탕수육이라는 현수막을 크게 붙인 중식당이었다. 그러나 손자의 눈은 중식당 맞은편을 향해 있었다. 설가온. 한정식집이었다.


름은 벌써 몇 번 들어본 집이었다. 식당가를 다니며 몇 번 스쳐 지나가기도 했을 거다. 그렇지만 유독 그 날 따라 그 집에 눈이 갔던 건, 순전히 할머니 때문이었다. 할머니의 숨소리가 귀에 맴돌았기 때문이다. 한옥처럼 꾸며놓은 나무 대문을 보며, 한복 입은 직원들의 응대 소리를 들으며, 할머니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래, 이런 건 바로 해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 또 흐지부지 엎어지고 만다.


화장실 핑계를 대고 잠시 자리를 벗어나서 할머니께 전화를 건다.


딸깍.

할머니, 밥이나 드실래요?


짐짓 무심하게 말한다.



"손주 놈이 할무니한테 밥을 사준댜~ 그래서 거 가는 길이여 내가~"

오랜만에 마주친 사람의 안부를 묻지도 않고, 노인은 다짜고짜 자랑부터 한다.


"우와, 할머니 좋으시겠어요. 식사하러 세종문화회관 가시는 거예요?"

할머니의 자랑에도 김PD는 상냥하다. 아무렇게나 묶은 포니테일이 왠지 따뜻다.



네, 이따 저녁에요.


아니요, 할머니 모시러 못 가요. 저 일해야 돼요.

7시까지 세종문화회관 앞으로 오세요.


아니, 집 앞에서 470번 타면 바로 가잖아요.

네네. 이따 봬요.


기껏 할머니 저녁 대접해드리겠다는 놈이 무슨 전화를 이따위로 할까. 잠깐 택시 타고 가서 모셔오면 될 것을, 그게 뭐 대단히 번거로운 일이라고 다 늙은 노인네 혼자 버스를 타게 할까.



"혹시 할머니 가시는 곳이 설가온이에요?"


"오메, 어떻게 알았대그랴."


"거기 원래 맛있기로 소문난 곳이에요~ 손자분이 신경 많이 쓰셨나 본데요?"

사람 좋은 김PD는 할머니가 맘껏 자랑할 판을 깔아준다.



노인을 버스로 밀어넣은 건 결국 잘난 손자다. 버스가 엉뚱한 방향으로 가지나 않을까. 노인을 두렵게 한 건 손자다.



"그려~ 우리 손자가 글씨 공무원이여, 공무원. 아는 또 얼마나 착한지 몰러. 할머니 저녁 사준다고 시상에 전화를 해싸가지구서 그냥"


"할머니~ 여기서 내리셔야 해요. 저랑 같이 내리셔요."

미처 노인의 자랑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버스는 목적지에 다다른다.


"손자분이 마중 나와있대요?"



멀리 익숙한 실루엣이 보인다. 남들보다 두 뼘은 더 땅에 가까운 작은 키. 그렇지만 땅에 발을 붙잡히지 않겠다는 듯 다부지게 옮기는 걸음걸이. 할머니다.


그런데 옆에는 누굴까. 사기꾼인가. 힘없는 노인의 지갑을 터는 잡범인가. 낯선 여자가 할머니의 팔을 붙잡고 함께 걷고 있다.



"손자분이세요? 어휴, 할머니가 자랑을 어찌나 하시던지요."


"여여 김PD여. 응, 할머니랑 촬영장에서 만났었어~"


"할머니~ 손자분이랑 저녁 맛있게 드세요. 건강하시고요. 또 봬요!"



오해는 그대로 풀렸다.


하나밖에 없는 손자라는 놈은 그 약간의 귀찮음을 못 이겨 할머니를 혼자 버스에 올라타게 했는데, 저 사람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일 뿐인데도 할머니를 위해 자신의 시간을 기꺼이 투자했다.


총총거리며 사라지는 뒷모습에, 얼굴이 괜히 달아올랐다.



"어머 할머니~ 손자분이랑 둘이 오셨어요?"

중년의 여직원들은 은은한 빛깔의 한복을 입고 노인에게 부드럽게 말을 건넨다. 그들의 얼굴에는 살아온 시간만큼 깊이 패인 서글서글한 미소가 박혀있다.


손님을 응대하기 위한 자본주의 미소인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심 어린 미소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확실한 건, 노인의 자랑이 또 신났다는 거다.


"으응~ 우리 손자가 월매나 착허냐면~"



서빙이 시작된다. 곱게 빻은 죽이 먼저 나온다. 옥수수 같기도 하고 잣 같기도 한 고소한 맛이 은근하다.


그런데 그 뒤로 이어지는 음식들이 의아하다. 토마토와 두부를 켜켜이 쌓고 새콤한 드레싱을 뿌린 샐러드, 머스터드 소스를 더한 가지 튀김, 겉면만 살짝 익힌 뒤 소금으로 조미된 김을 얹은 참치 타다키까지. 당연히 전형적인 정통 한정식집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트렌디하게 변주한 한정식 코스를 내놓는 집이었다. 좀 과하게 말하면, 퓨전 한정식 집이었다.


낭패다. 이런 음식들을 할머니가 드셔 보셨을까. 입에는 맞으실까. 손자는 음식을 입에 욱여넣으며 할머니 쪽을 슬쩍 본다.



"야야, 이거 좀 먹어봐라. 맛있다."


노인의 입은 바쁘다. 맛있다는 소리를 연신 내뱉으며, 동시에 음식을 씹어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할머니~ 이렇게 손자분이랑 오시니까 너무 보기 좋네요~"

"하이고, 요새 이런 아가 없제. 기지배들도 눈이 있다면 다 야한테 달려들 것이여."


손자 자랑도 빼놓을 수 없다. 노인의 입은 바쁘다.



다행이었다. 할머니는 정말로 맛있게 드시는 모양이었다. 장성한 손자와 동일한 양을 해치우셨으니, 진심으로 입에 맞으신 게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시상에, 그렇게 맛있는 디가 또 읍더라니께~"


그 날 이후, 노인은 상대를 가리지 않고 자랑을 해댔다. 그 맛있는 곳을 손자가 사줬다는 말과 함께. 둘이 가서 먹었다는 말과 함께.


"저번에 할머니 모시고 간 밥집이 어디니?"

결국 노인의 딸은 조카에게 전화를 걸어 음식점을 물어보기에 이른다.



부끄러웠다.

참 부끄러웠다.


남몰래 한 선행이 알려진 부끄러움이 아니다. 괜한 주목으로 인한 부끄러움도 아니다. 밥 한 번 사드린 것이 자랑거리가 되게 만든,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이건 착한 게 아니다. 선행이 아니다. 가족끼리 밖에서 밥 한 번 먹은 게 어떻게 선행이 될 수 있겠는가. 그게 어떻게 자랑거리가 될 수 있겠는가. 심지어 늙은이 혼자 버스를 태웠는데.


할머니와의 외식이 일상이었다면, 할머니는 결코 그렇게 자랑하시지 않았을 거다. 이 나이 먹도록 할머니에게 받은 게 얼마인데. 그런 할머니께 밥 한 번 산 게 뭐 그렇게 당당하고 떳떳한 일일까.


많은 곳들을 모셔갔었다면, 할머니에게 왜 설가온만 뜻깊었겠는가. 할머니에게 그곳이 의미 있는 곳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동안 할머니를 제대로 못 챙겨드렸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건 자랑할 일이 아니었어야 한다. 그저 늘상 있는 일에 지나지 않았어야 한다. 그런데 이걸 특별한 이벤트로 만들어버렸다. 자랑할 일로 만들어버렸다. 30년 넘게 꾹 다문 손자 놈의 입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할머니가 자랑을 하실 때마다, 스스로가 너무 부끄러웠다. 할머니의 자랑이 쌓여갈수록, 마음속 죄스러움도 차곡히 더해져간다.


부끄럽다.

죄스럽다.



"난 그때가 참 맛있었어야~"


사실 노인의 말은 미덥지 못하다. 설가온의 음식은 노인의 입에 딱 맞지 않았을 수 있다. 한 세기 가까운 세월 동안 진한 한식을 먹으며 살아온지라, 요즘 젊은 사람들 입에 맞춘 퓨전 한식을 싫어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노인의 말은 미덥다. 손꼽게 맛있는 저녁 자리였을 수는 있다. 맛이란 건 오로지 미각돌기로만 느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맛은 아우름이다. 음식을 먹는 분위기, 그 날의 기분, 불어오는 바람의 온도, 함께 자리 한 사람까지. 이 모든 게 어우러져서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맛이다.


노인에게 있는 하나뿐인 손자. 그 손자가 어른이 되어 처음으로 대접한 한정식이다. 노인에게 어찌 맛없는 자리일 수 있었을까.


일제시대 때부터 써오던 노인의 장기는 이미 그 기능이 닳을 대로 닳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날은 맛있다는 소리를 끊임없이 내며, 자타공인 대식가인 손자와 같은 양의 음식을 먹었다.


노인은 밤이고 다음날이고 속이 불편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노인에게 본인의 속은 사소했을 것이다. 손자와 함께한 저녁 자리에서는 생각조차 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음식이 앞에 놓여있든, 그 날은 노인에게 최고의 상이었을 테니까.



그러나 한정식은 할머니께 드리는 마지막 대접이 아니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고

더 나은 밥상에서 같은 맛을 함께 즐길 것이다.


그리하여

언젠가 할머니에 대한 죄스러움이 옅어질 때

비로소 할머니의 손자자랑을 웃으면서 듣겠다.


우리가 함께 살아있음에

다시 저리도록 감사하다.

이전 06화 오빠의 첫 라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