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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장밥 Nov 04. 2020

오빠의 첫 라면

한강물라면

오빠, 기억나?


옛날 우리 동네에 큰 문방구 하나 있었잖아. 시장 들어가는 옆 골목에. 그 문방구 앞에 있는 커다란 미니카 트랙에서 동네 남자애들이 모여 놀았고.


한번은 나도 거기서 미니카를 갖고 놀고 있었는데, 키 큰 덩치 한 명이 나를 막 윽박질렀어. 여자애가 무슨 미니카를 갖고 노냐고. 놀이터 가서 소꿉놀이나 하라고.


너무 무서워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마침 오빠가 딱 나타난 거야. 그리고 그 덩치에게서 나를 딱 구해줬지. 내 동생한테 무슨 볼일있냐고 큰 소리로 덩치를 쫓아내던 오빠 모습이 자꾸 생각나. 그 때는 오빠가 얼마나 오빠다워 보이던지.



그 이야기를 대체 몇 번이나 듣는지 모르겠네. 오빠가 오빠답던 때가 그렇게 없었던 거니.


뭐, 그 때는 그랬지. 당연했어. 부모님은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계속 나한테 보호자 얘기를 하셨으니까. 본인들보다 내가 더 네 옆에 오래 있어줄 수 있다며, 언제나 동생의 보호자라는 걸 잊지말라고 강조하셨거든. 우리가 다섯 살 차이니까, 나는 만으로 다섯 살때부터 보호자 소리를 듣고 자란 셈이지.


그래서 우리가 같이 학교 다니던 때도, 같이 손 잡고 등교하고 그랬잖아. 우리 걸음으로 15분쯤 걸렸던가?



맞아. 학교 가는 길 뿐만 그랬던 게 아니라, 어렸을 때는 오빠한테 많이 의지했지. 학교에서 무슨 일이 생겨도 오빠를 찾았고, 학교 끝나고도 제일 많이 같이 놀던 사람이 오빠였지.


오빠가 밥 챙겨주던 기억도 나네.



집에 어른이 안 계실 때는 그랬지. 가끔씩이었겠지만 말야. 밥을 챙기는 것도 보호자의 몫이었으니까.


어렸을 때, 우리 어머니가 보부상처럼 물건 팔러 다니신 거 기억나? 큰 보따리에 옷이랑 양말이랑 우산이랑 이런 것들을 싸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셨었는데 말야. 할머니가 장사하셨던 시장에 가서 상인분들에게 팔기도 하고, 우리 친구들 부모님들 찾아다니면서 팔기도 하고.


평소에는 저녁 시간에 맞춰서 어머니가 돌아오셨어. 우리들 밥을 챙겨주셨어야 했으니까. 그런데 가끔은 그렇지 못할 때가 있었지. 늦게까지 팔러 돌아다니신 날들이었을 거야. 운수 좋은 날처럼 물건이 잘 팔려서 그랬는지, 아니면 워낙 못 팔아서 더 열심히 팔려고 그러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맞아, 가끔 엄마가 해가 다 지고 어둑한 밤에 들어오시기도 했지.


그 때 내 성격에 배고프다고 엄청 칭얼댔을 거 같은데?

오빠 그 때 요리할 줄은 알았나?



요리는 무슨. 라면도 못 끓였지.


사실 너한테 끓여줬던 라면이 태어나서 내가 처음 끓였던 라면이야. 무슨 라면이었는지는 기억 안 나는데, 완성된 모습은 확실히 기억난다.


그 날도 어머니가 늦으시던 날이었네. 이미 해는 졌고, 너는 배고프다고 울고. 그래서 라면을 끓이기로 마음 먹었지. 평소에 어머니가 라면 끓이시는 게 생각이 났거든. 그렇게 어려워보이지도 않았고. 그래서 부엌에 딱 들어섰지.


와, 그런데 생각했던 거랑 아예 다르더라고. 처음 끓이니까 뭐 아무것도 모르겠는거야. 라면 봉지 뒤에 물을 뭐 얼마큼 넣으라고 써있기는 한데, 그게 얼마나인지 어떻게 알겠어. 계량할 수 있는 것도 없었고. 그래서 일단은 냄비에 물을 대강 넣었어. 그런데 학교에서 배운 게 갑자기 떠오르는 거야. 물은 공기 중으로 자꾸 증발한다는 거 말야. 그래서 물을 잔뜩 더 부었지. 물이 다 날아가버리면 라면이 너무 짜질 거라는 생각에.


그렇게 물이 넘실대는 냄비를 가스레인지에 올리고 불을 올렸어. 이제 스프와 면을 넣어야겠는데, 이걸 언제 넣어야 하는지를 또 모르겠는거야. 물이 끓기 전에 같이 넣고 끓여야하는 건지. 아니면 물이 다 끓고 나서 넣으면 되는 건지. 고민하다가 결국 딱 중간을 택했어. 물이 적당히 뜨거워졌을 때 넣은 거야. 어쨌든 중간쯤 하면 비슷하게는 되겠지 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아.


생각해봐. 애초에 적정량을 훨씬 넘는 물이 담겨있었고, 심지어 끓기도 전에 면이 들어갔어. 그러면 라면 국물이 얼마나 많겠어. 어린 내 눈에도 평소에 밥상 위에서 봤던 그 라면과는 너무나도 달랐어. 국물이 너무나도 출렁댔거든. 그래서 택한 게 바로 국물 졸이기였어. 국물이 적당량이 될 때까지 계속 끓이기로 한 거야. 한참을, 정말 한참을 더 끓였지.


그렇지만 나온 건 결국 한강라면이었어. 처음에 얼마나 물을 많이 넣은 건지, 아무리 끓여도 물이 도통 줄어들지가 않더라고. 면발도 가관이었어. 한참을 끓여댔으니까 퍼질대로 퍼져버린거지. 라면의 꼬불꼬불한 본래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든 지경이었으니까.


결국 허기진 꼬맹이 둘이 먹었는데, 별로 먹지도 못했어. 그렇게 맛 없는 걸 어떻게 먹었겠어.


이제와서 돌이켜보면 참 귀엽고 우스운 일이지만, 그 때는 참 많이 당황했었지.



듣기만 해도 맛이 없네. 그렇게 맛 없는 걸 나한테 먹이려고 했단 말야?


오빠 요리 실력은 그 뒤로 일취월장한 거구나. 햄도 구워주고 계란도 해주고. 그거면 됐지 뭐.


오빠 요즘도 집에서 혼자서 뭐 잘 해먹잖아. 그거 알고 보면 다 내 덕분이이었네. 나 없었어봐. 아직 라면도 못 끓이는 사람일지도 몰라.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네. 참 고맙다.



가끔 그런 생각도 들어. 어쩌면 우리집이 보통보다 어려웠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런 기억들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오빠랑 내가 올망졸망한 추억들을 야금야금 쌓아나갈 수 있었던 건, 우리가 오랫동안 붙어 자랐기 때문이잖아. 우리 집에 돈이 많았어봐. 남들처럼 이 학원 저 학원 다니며 우리는 잠잘 때나 얼굴을 보는 사이였을지도 몰라.


게다가 엄마 아빠가 우리 어렸을 때부터 계속 강조한 말 있잖아. 우리는 서로에게 유일한 가족이라는 말. 그 말도 우리집이 우리집이었기 때문에 지켜진 말일 수도 있어. 이슬람 왕가에서 태어났다면 서로에게 칼을 겨눴을지도 몰라. 재벌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서로 사업을 독차지하겠다고 알력다툼을 벌였을지도 모르고.



말도 안 되는 만약이긴 하지만,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네.


와, 옛날 얘기하니까 좋다. 그 때 생각도 나고.


그러고 보니, 골목치킨집도 갑자기 생각난다. 아버지가 술 드시면 매번 사오시던 그 치킨집 있잖아.



거기 맛있었지. 먹은지 벌써 몇 년은 된 거 같다. 갑자기 그 집 치킨이 또 먹고 싶네.



오, 그러면 우리 오랜만에 둘이 치킨이나 먹으러 갈까?



싫어. 내가 왜 오빠랑 치킨을 먹어. 나 약속 있어.



으응, 그래. 뭐, 원래 치킨은 혼치킨이 제맛이지! 저녁 맛있게 먹어! 오빠 상처 안 받았다!



미리 약속 잡으면 뭐 언젠가 먹어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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