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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르른도로시 Jun 22. 2023

다시 찾아온 손님, 우울



어디선가 우울해지기 쉬운 기질이 있다고 들었다. 가족력이 있으면 더 걸리기 쉽다고도 한다. 


 우울증 유경험자이기 때문에 2주 차가 지나자 감이 왔다. '아, 또 왔구나.'

우선 뭘 해도 별로 재미가 없다. 한 번 자리에서 일어나려면 젖 먹던 힘까지 짜내야 한다. 몸에 납덩어리라도 대롱대롱 매단 듯 팔다리가 무겁다. 사람들 앞에서 웃고 장단 맞추는 게 힘들다. 기분의 평균치가 낮아져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즐거움'이라는 목적지까지 도달하려면 비탈진 언덕을 자전거로 오를 때처럼 허벅지가 터지도록 페달을 밟아야 한다. 현실 생활에 가장 악영향을 미치는 부분은 '무기력'과 ' '인지 능력의 저하'이다. 


 무슨 일을 하던 의욕 없는 상태는 일하기에 좋지 않겠지만, 나처럼 어린아이들을 다루는 일을 하는 사람에겐 특히 쥐약이다. 아이들 수업을 짤 때도 영 흥이 나지 않고, 심지어는 수업을 할 때조차 예전처럼 열정이 솟지 않는다. 아동미술은 특히나 선생의 역량이 중요한데 큰일이 아닐 수 없다. 평소라면 쉽게 떠올랐을 기발한 아이디어들도 어디로 사라졌는지 흔적도 없다. 아이들과 함께 호흡하고 발맞춰야 하는데 머리가 딱딱하게 굳어서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주기는 커녕 뒷꽁무니 쫓아가기에도 벅차다. 


 마음 같아선 다 때려치우고 하루종일 누워서 잠이나 자고 싶다. 아무것도 쉬이 느끼지 못하는 일상을 버티는 일이 점점 더 버거워져 간다.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닌지라 나아지려고 애쓰는 과정을 또 거쳐야 한다고 생각하면 지겹기까지 하다. 대체 언제까지 이런 감정의 진폭을 겪으며 살아야 할까?


 생각해 보면 지금껏 우울의 파도가 덮쳤을 때도 진득하게(?) 굴 속에 처박혀 본 적이 없었다. 코로나 락다운 때 잠깐을 빼면 감정과 상관없이 늘 바깥 활동을 해야 했다. 도무지 웃고 싶은 기분이 아닌데도 웃음을 끌어내야 했고 없는 의욕을 꾸며내기 위해 깨지기 쉬운 유리가면을 썼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 거라고, 너만 힘든 게 아니라고 스스로를 야단치면서도 언젠가 한 번은 눈치 안 보고 마음껏 틀어박혀보고 싶다, 하며 은둔자가 되는 꿈을 꿨다. 우울할수록 밖에 나가야 한다는 말은 누구나 쉽게 하지만 바깥에서 괜찮은 척 연기하느라 고갈되어가는 정신 에너지를 다시 채울 방법은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우울에 빠지면 신체 감각도 달라진다. 목구멍에 언제나 커다란 공 같은 게 가득 차 있어서 침을 삼킬 때마다 이물감이 든다. 목에서부터 시작해서 눈 바로 밑까지 물을 잔뜩 부어 채워 놓은 것처럼 언제나 눈물이 가득차 있다. 실제로 흘리진 않지만. 


 우울해지기 쉬운 기질이란 어쩌면 평생 안고 가야 할 까다로운 질병인지도 모르겠다. 제1형 당뇨라던지 하는 것에 비하면 별 것 아니지만 남이 칼에 베인 것보다 내 손가락 거스러미 조금 일어난 것이 더 아픈 게 사람이다. 이 엿 같은 우울 때문에 그간 겪어야 했던 인생의 부침을 생각하면 억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원시 시대에는 나처럼 예민하고 위험을 잘 감지하는 사람이 제 몫을 할 때가 있었다고 한다. 남들이 단잠에 빠져 있을 때 평소와 다른 부스럭 소리 하나에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유사시에 부족원을 깨울 사람이 필요했겠지. 맹수나 적을 감지하고 위험을 알려 부족원의 목숨을 구하고 나면 상황은 말끔하게 해결되었을 것이다. 머리 복잡할 이유라곤 전혀 없었을 것이다. 


 하나 현대 사회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적'이나 '위험'이란 것의 형체가 분명하지 않을뿐더러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위험을 잘 감지하는 사람은 시시각각 스트레스란 스트레스는 고스란히 받으면서도 그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어 매 순간 끊임없이 좌절을 겪는다. 예민한 사람이 현대사회를 살면서 특히 더 우울해지기 쉬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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