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브런치라는 공간이 아니라 내 마음에 있었다.
정확히는 9개월 만에 쓰는 '브런치 글'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브런치 작가로 선정이 되고 나서도 여전히 브런치가 낯설었던 나는 언제쯤 이곳에 익숙해질 수 있을까 기약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꾸준히 글을 쓰다 보면 어느새 스며들겠지, 하는 기대가 무색하게도 나는 브런치에 익숙해지지 못했다. 어쩐 일에서인지 이곳은 늘 조금씩 낯설었다. 왜였을까.
9개월이 지난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 이유는 바로 나에게 있었다. 브런치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그간 나는 나의 '포지션' 즉, 나의 위치를 제대로 설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직장인인지, 엄마인지 그도 아니면 백수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정체성이 모호했다.
정체성이 모호한데 글이 쓰일 리가 없었다. 그 와중에도 일기는 꾸준히 썼다만, 어느 정도의 주제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브런치 글을 쓰기에는 많이 힘이 들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눈앞이 캄캄한 상태에서 손으로 이리저리 더듬어 가며 써 봤자 낙서 쪼가리 밖에 더 나오겠나 싶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낙서 쪼가리 일지라도 되도록 많이 쓰고 지워봤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방황의 흔적이라도 남았을 텐데 싶지만 말이다.
나는 끊임없이 나 스스로를 검열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정으로 어떤 모습이 되고 싶은지를 탐구하는 것 자체를 피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우선은 자신이 없었다.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그 길을 향해 달려 나가는 나를 상상할 수 없었고, 혹시 노력했는데 원하는 걸 이루지 못할까 봐 두려워서 생활의 온갖 지엽적인 요소들과 과거, 미래, 현재의 고민거리들로 눈길을 돌리곤 했다. 옆지기는 나의 그런 모습을 늘 답답해했다.
어느 날 옆지기가 여느 때와는 다르게 차분하게 내뱉은(하도 열성적으로 매번 설득하려고 하다 보니 같은 내용을 끊임없이 말하는 사이에 자기 나름의 깨달음이 있었나 보다) 말이 뜻밖에도 내게 새로운 지향점이 되어 주었다. 그는 말했다.
"열심히 살아서 성과를 낼 필요가 있을까. 그냥 지금 하고 있는 영어 공부 하고, 쓰고 싶은 글을 쓰고 엄마가 될 준비 하고(내가 하고 싶다고 말했다) 매일 일상을 차곡차곡 잘 살아 나가면 그걸로 되는 거 아닐까. 그거 자체가 그냥 충분히 잘 사는 것인 거 같다. 뭘 특별한 걸 하고 특별한 결과를 내는 게 잘 사는 게 아니라 그냥 해야 할 일을 차곡차곡하는 그게 잘 사는 거인 것 같다. 그냥 그렇게 살면 될 것 같다."
그리고 이런 말도 했다.
"내가 봤을 때 자기는(실제로는 '자기'란 말을 쓰지 않지만 불특정 다수가 보는 이 공간에 나의 닭살 돋는 애칭을 공개해서 여러 사람 비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으니 '자기'라고 하겠다.) 돈을 버는데 관심이 없는 사람이야. 돈 버는 데 관심이 있는 내가 보기에는 신기할 정도로 관심이 없어. 자기의 관심은 늘 세상을 어떻게 하면 더 나아지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세상에 보탬이 될 수 있을까 여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그런데 그런 사람이 억지로 돈을 벌려고 하면 그게 과연 효과가 있을까. 효과도 없을뿐더러 본인 삶의 지향에도 맞지가 않아. 돈에 관심 없는 사람이 돈을 벌려고 애쓰는 것만큼이나 비효율적인 일도 없는 것 같아."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다만 쇠망치 같은 게 아니라 좀 더 가볍고 탄성 있는, 플라스틱 용수철 망치 같은 걸로.
순간 내가 다니는 성당이 떠올랐다. 그곳에서 봤던 수녀님들, 사제들.... 작년에 엄마와 함께 갔던 절도 떠올랐다. 템플 스테이에서 봤던 유난히도 피부가 곱고 몸가짐이 우아하던 비구니 스님들. 우리 엄마가 "저렇게 젊고 예쁜데 왜 절에 들어왔을까? 무슨 사연이 있나." 할 정도로 아리따운 모습이었던 그녀들. 나는 그들이 왜 속세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등지고 성당으로 절로 들어갔는지 알 것 같았다. 그들은 속세에서 말하는 가치에 별 관심이 없었던 거다. 그들 삶의 지향점이 돈, 명예, 지위 같은 것에 있지 않았던 거다. 그러니 그들은 굳이 '이렇게 좋은 청춘을 두고 왜 떠나려고 하느냐.' 하는 따위의 말에 발을 묶여 있을 이유가 없었던 거다. 그들이 자신의 젊음을 바치고 싶은 삶의 지향점은 속세에서 옳다고 하는 가치들로 향하고 있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그것은 또한 하나의 삶의 지향점일 뿐이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나는 부모님(특히 아버지)으로부터 '이기적이다', '철이 없다' 등의 말을 들으며 자라왔다. 돈 버는 데 별 관심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대한민국 장녀로 자란 내게 부모님의 말은 비수처럼 꽂혔다. 사랑받는 장녀이고 싶었고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던 나는 어떻게 해서든 돈을 버는 데 관심을 기울이고 싶었지만 늘 실패했다. 내 눈앞에 펼쳐진 미래가 강물에 비친 햇빛처럼 수도 없이 반짝이며 빛났지만 일정한 기준 없이 불어대는 바람에 일렁이며 끝끝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가슴속에는 늘 죄책감이 가득했으며, 마음속 깊은 곳 어딘가에서 '너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넌 불량품이야.' 하는 소리가 끝없이 메아리쳤다.
알고 보니, 어이없게도 그 소리는 헛 것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곡성'에 나오는 사탄 같은 거였다. 그 사탄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는 내가 무엇을 믿느냐에 달려 있는 거였다. 자, 선택하세요. 당신은 당신이 3n년간 세뇌되어 온 '세상의 진리'를 믿겠습니까, 혹은 가족의 사랑을 받기 위해 그토록 외면하려 애썼던 '내 마음의 진리'를 믿겠습니까. 모든 것은 당신의 선택입니다.
만약 어머니 아버지 중 한 집이라도 종교를 믿는 집안이 있었더라면, 그래서 그 종교의 전통에 익숙한 상태였더라면 어쩌면 나는 비구니나 수녀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20대까지만 해도 단체 생활에 진저리를 치던 상태였으니 30대가 되어서 속세와 인연을 끊었을지도 모르지. 혹은 부모님이 자식을 내버려 두고 키우는 분들이었다면 진즉에 프린세스 메이커에 나오는 방랑 예술가나 음유시인 같은 게 되어 있었을지도.
나는 언제나 글을 쓰고 싶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 따위의 생각을 늘 마음속에 품고 있었으나 결과를 내지 못하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에 크게 사로잡혀 있었다. 두려움에 두 손 두 발을 다 묶여 옴짝달싹도 못하고 있었던 거다. 그러니 마음 놓고 돈을 벌 수도, 원하는 대로 작업을 할 수도 없는 어정쩡하고 한심한 상태로 세월을 흘러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내게 옆지기는 '그냥 매일을 차곡차곡 살아 나가는 게 좋은 거 아닌가.'라는 말을 해 주었다. 옆지기의 이런 말은 어느 날 갑자기 툭 하고 나온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사귀었던 지난 8년 동안, 한 집에서 한 이불 덮고 잔(은 사실 옆지기의 귀마개 마저 뚫고 들어오는 코 고는 소리 때문에 따로 잔 적이 훨씬 많았지만) 지난 2년간 그는 때만 되면 '세월만 보내지 말고 방향을 정해서 열심히 했으면 좋겠다.'라든가 '자기도 돈을 좀 벌기 위해 노력을 하면 어떨까. 이걸 해보면 어떨까 저걸 해보면 어떨까.' 하는 제안을 열성적으로 늘어놓곤 했다. 그러던 그가 왜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돈에 관심 없는 사람이 돈 벌려고 애쓰는 건 효율적이지 못한 것 같다.'라는 말을 하게 되었을까. 여러 가지 짚이는 점은 있지만 이 글에서는 그 점은 논외로 두겠다. 어찌 됐든 그의 느닷없는 에피파니(epiphany)는 내게도 큰 울림을 주었다. 거기에 은연중에 가지고 있었던 부담감-한 사람 몫의 부인이 되는 것-마저 덜게 되어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고, 부담을 가지지 않게 된 덕분에 오히려 글이 손에서 뿜어져 나오게 되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무엇에 관해 쓸지, 어떤 글을 쓸지에 관해서는 전혀 짚이는 바가 없다. '고등학교 자퇴 15년 후의 삶'이라던가 '전 직장에서 만난 최강의 나르시시스트에 대하여'따위의 큰 주제를 정해서 글을 써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무언가 하나의 길을 정해놓고 앞만 보며 따라가는 것은 ADHD인 내 성향상 맞지 않는 것 같다. 일상생활에서와 같이 글을 쓸 때도 나는 ADHD 식으로 여기도 찔러보고 저기도 찔러보며 들어가야 하는 것 같다.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구미가 당기는 대로. 하지만 꾸준히 성실하게 되도록이면 매일 같이. 마구 저지르면서 망쳐도 보고 쪽팔려서 밤에 이불도 걷어차보고. 9개월 만에 온 브런치에서 부담 없이 하루하루 즐기고 싶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