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년 전 공주 이야기 세 번째, '메이블라썸 공주'(1)
1.
옛날 옛적 한 왕국에 자식을 모두 잃고 어린 딸 하나만 둔 왕과 왕비가 있었다. 왕비는 딸을 돌봐줄 실력 있는 보모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 못했다. 왕은 각 거리마다 트럼펫 연주자를 보내 왕비가 보모를 고를 수 있도록 솜씨 좋은 보모들은 즉시 입궁할 것을 명했다.
약속한 날이 되자 궁 안이 전 세계에서 온 보모들로 넘쳤다. 그들은 서로 왕실 보모가 되고 싶어 안달이었다. 궁전 가까운 곳의 그늘진 숲에 앉아 있던 왕비는, 그들 중 반이라도 보려면 한 명씩 자기 앞에 불려 나와야 한다고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그에 따라, 보모들은 왕과 왕비 앞에서 예를 갖춘 뒤 왕비가 보기 편하도록 한 줄로 나란히 섰다. 그들 대부분은 살집이 있고 얼굴이 고왔다. 하지만 그 중 하나는 시커멓고 못 생긴데다 알아듣지 못할 말을 지껄여댔다.
왕비는 어떻게 저런 여자가 왕실 보모가 되고자 여기까지 왔는지 의아해했다. 그녀는 여자에게 썩 물러가라고 명했으나 순순히 말을 들을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무어라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물러나더니 속이 빈 나무 안에 숨어 모든 상황을 지켜봤다. 왕비는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이 두 뺨이 장밋빛으로 물든 예쁜 보모를 골랐다. 하지만 결정을 내리기가 무섭게 보모는 풀숲에 숨어있던 뱀에게 발을 물려 쓰러져 죽고 말았다.
갑작스런 사고에 왕비는 몹시 언짢았다. 곧 다른 보모를 골랐으나 그녀가 한발자국 나서기가 무섭게 지나가던 독수리가 커다란 거북이 하나를 떨어뜨려 그녀의 머리는 계란 껍질처럼 산산 조각으로 부서지고 말았다. 무시무시한 광경에 왕비는 겁에 질렸다. 그럼에도 곧이어 세 번째 보모를 골랐다. 이번 보모는 화를 피하려고 재빨리 움직이다 나뭇가지에 부딪혀 가시에 찔리는 바람에 시력을 잃었다. 왕비는 큰 충격을 받아 울음을 터뜨렸다. 부정을 탄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오늘은 더 이상 보모를 고르지 않기로 했다.
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막 일어섰을 때, 왕비는 등 뒤에서 소름끼치는 웃음소리를 들었다. 뒤로 돌아보니 자신이 일언지하에 거절했던 못생긴 여자가 좀 전의 참사를 두고 매우 즐거워하며, 특히 왕비를 들먹이며 조롱하는 게 아닌가. 왕비는 몹시 화가 나서 저 여자를 체포해야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필시 마녀일 그 여자가 지팡이를 두어 번 휘두르더니 날개달린 용이 이끄는 전차를 소환했다. 전차는 빙그르르 돌더니 무시무시한 굉음과 함께 허공을 가르며 사라졌다. 왕이 그 모습을 보고는 탄식했다.
‘아! 우리는 이제 끝장이구나. 저 요정은 카라보스다. 어릴 적 재미로 저 요정이 먹을 죽에 유황을 넣은 적이 있었지. 그때 이후로 내게 원한을 품고 있어.’
그 말을 듣더니 왕비가 울기 시작했다.
‘진작에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그랬다면 친해지려고 최선을 다했을 거예요. 이제 다 끝장이에요.’
왕비가 큰 충격을 받자 왕은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그는 카라보스가 어린 공주에게 내릴 불운을 막기 위해서 무엇을 최우선으로 해야 할지 회의를 열어 논하자고 제안했다. 그리하여 왕실의 고문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소환 되었다. 보안을 위해 창문을 비롯해 궁 안의 문이란 문은 모조리 걸어 잠갔고, 한 마디 말이라도 새어나갈까 열쇠 구멍까지 죄다 틀어막았다. 거기에 더해 천 리 밖에 사는 요정들까지 모조리 공주의 세례식에 초대 되었다. 국왕 부처는 이번 세례식을 극비에 부쳤다. 카라보스가 제 얼굴을 들이미는 걸 막기 위함이었다.
왕비와 그 시녀들은 초대된 요정들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각각의 요정들에게는 푸른 벨벳 망토, 살구 색 새틴으로 만든 질 좋은 패티코트, 굽 높은 구두 한 켤레 그리고 뾰족한 바늘 몇 개와 황금색 가위 한 쌍이 제공될 예정이었다.
약속한 날 참석 가능한 요정은 왕비가 아는 모든 요정 중 오직 다섯 뿐이었다. 그들은 즉시 어린 공주에게 바칠 선물을 준비했다. 첫 번째 요정은 빼어난 아름다움을, 두 번째 요정은 무엇이든 들은 즉시 이해하는 명석함을, 세 번째 요정은 꾀꼬리 같은 목소리를, 네 번째 요정은 착수한 모든 일에 성공하는 능력을 공주에게 부여했다. 다섯 번째 요정이 막 입을 열고 말을 하려는 순간, 굴뚝에서 한바탕 덜커덩 거리는 굉음이 들리더니 그을음 범벅이 된 카라보스가 굴러 떨어졌다.
‘공주는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게 살아갈 것이다!’ 카라보스가 악담을 퍼부었다.
그러자 왕비와 요정들 모두가 카라보스에게 자비를 베풀도록 간청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데다 당신에게는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은 가엾은 공주가 아니냐고 사정을 했다.
그러나 못생긴 늙은 요정은 돼지처럼 꿀꿀대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아직 축복을 내리지 않은 마지막 요정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약속했다. ‘스무 살만 무사히 넘기신다면 공주님은 오래도록 행복한 삶을 누리실 겁니다.’ 그녀가 말을 마치자 카라보스는 예의 그 기분 나쁜 목소리로 낄낄대며 비웃더니 굴뚝으로 기어올라 사라졌다. 세례식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은 깊이 낙담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왕비가 그러했다. 하지만 애써 마음을 다잡고 요정들을 환대하며 그들이 좋아하는 아름다운 리본과 특별히 준비된 선물들을 하사했다.
자리가 파할 무렵, 다섯 명 중 가장 나이든 요정이 한 가지 의견을 제시했다. 공주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는 시종 외의 다른 사람은 절대 볼 수 없도록 어떤 곳에 가둬 두자는 이야기였다. 왕은 즉시 공주를 지킬 요량으로 탑을 지였다. 그 탑에는 창문이 없는 탓에 양초로 불을 밝혔으며, 출입구라고는 오로지 지하 통로에서 20피트쯤 걸어가면 나오는 철문 하나뿐이었다. 이 문을 둘러싸고 사방으로 문지기가 배치되었음은 더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국왕 부처는 공주를 메이블라썸(오월에 핀 꽃)이라 불렀다. 봄바람처럼 생기발랄한데다 키가 크고 자태가 고왔으며 하는 말마다 호감이 갔기 때문이다. 탑을 방문할 때마다 몰라보게 자라는 공주를 보며 왕과 왕비는 기쁨에 겨웠다. 그러나 공주는 탑에 싫증을 내며 부모님께 자기를 데리고 나가 달라고 사정을 했고, 그럴 때마다 안 된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공주의 보모는 늘 공주 곁에 머물며 바깥세상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두 번째 요정의 축복을 받은 덕인지 단 한 번도 실제 세상을 본 적이 없는데도 그 내용을 정확히 이해했다. 왕과 왕비는 자주 이런 얘기를 하곤 했다.
‘어쨌거나 우리는 카라보스보다 현명해. 우리 메이블라썸은 무사히 스무 살을 넘기고 행복하게 잘 살 거야.’ 왕비는 카라보스 보다 한 수 앞섰다는 생각에 지칠때까지 웃어재끼곤 했다.
4일 후면 꽉 찬 스무 살이 되는 공주를 시집보낼 때가 다가오자 왕과 왕비는 딸의 초상화를 제작해 주변 모든 왕국에 보냈다. 온 나라 안이 공주가 곧 자유의 몸이 될 거란 기대에 들떴다. 이 소식은 멀린 왕에게도 전해졌다. 그는 메이블라썸을 며느리로 맞으려고 대사를 보냈다. 자기네 공주님이 이토록 좋은 가문과 연을 맺게 되었다는 이야기에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역자의 감상>
옛날 공주 이야기를 있는 대로 찾아 읽으면서 느낀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잠자는 숲 속의 공주'의 변주가 정말 많구나 하는 거였지요. 마녀의 저주에 걸린 공주 이야기가 워낙 많아서 다 쳐내고 나니 남는 이야기가 별로 없을 정도였습니다. 성인이 되어 부모님 품에서 왕자 손에 넘겨질 때까지 '저주' 안에 갇혀 있어야 했던 공주들이 왜 그토록 많아야 했을지 생각해보게 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메이블라썸 공주'이야기 역시 전형적인 공주 이야기로, 다른 이야기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하며 읽었습니다. 큰 틀에서는 이 이야기 역시 매우 전형적입니다. 어린 공주가 마녀의 저주에 걸리고, 부모는 딸을 지키기 위해 자식을 가둬 기르죠. 성정이 비뚤어질 법한 상황임에도 착한 소녀답게 공주는 참하게 잘 자라납니다. 종국에는 젊고 멋진 왕자와 결혼하는 해피 엔딩을 맞게 되고요.
그렇다면 메이블라썸 공주만의 개성은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요. 저는 메이블라썸의 성격 특성을 '외유내강'으로 정의했습니다. 탑에서 자라 세상 물정이라곤 눈꼽 만치도 모르던 공주는 태어나 처음으로 보는 멋진 남자에게 푹 빠져 가출을 감행하고 맙니다. 여기서 그쳤다면 공주는 그저 그런 유약한 소녀였을지도 모르지요. 뜻밖에도 공주는 자신이 처한 상황 안에서 불평하지 않고 자신이 선택한 사랑을 지키고자 노력합니다. 그 사랑이 비정한 현실 앞에서 아무리 자신에게 모질게 굴지라도 끝까지 자신의 연인을 믿고, 지키려고 애를 씁니다. 심지어는 그를 지키기 위해 싸우기까지 하죠.
그럴 가치조차 없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온갖 고난을 헤쳐가는 공주가 답답하면서도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자신의 선택을 끝까지 책임지고자 하는 그녀의 태도 때문일 것입니다. 생전 처음 겪어 보는 굶주림과 온갖 환난에도 굴하지 않고 상황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공주의 모습은 독자로 하여금 현실을 살아가는 자신의 태도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과거의 선택을 후회하며 현재를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내 곁의 사람들에게 충분한 믿음과 사랑을 주고 있는지, 그러한 것들을요.
이 이야기는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