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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가 고장 난 우울증 환자의 뜬금없는 에피파니

-지난 2n 년간의 삽질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by 푸르른도로시 Jan 06. 2025



뇌가 고장 난 우울증 환자의 뜬금없는 에피파니(Epiphany)

 


  귀마개로 틀어 막은 양쪽 귀 사이로 우리 집 개 짖는 소리가 은은히 들린다. 약간의 두통에 눈을 떠 시계를 본다. 새벽 한 시. 어제 먹은 제주 흑돼지 스테이크의 두툼한 살점에서 베어 나온 구수한 기름이 위 속에서 느끼하다며 아우성 치는 것만 같다. 머릿속과 위장을 찌꺼기 하나 남기지 않고 깨끗이 세척하고 싶다. 당장이라도 실행 버튼을 눌러 리셋(reset) 하고 싶다. 어릴 적부터 늘 바라왔던 소망. 이 삶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서 지금의 삶을 남김없이 갈아 치우고 싶다는 욕망. 해일이 닥치기 전에 발 빠르게 도망치고 싶은 자의 조급함.



 ‘나의 뇌는 단단히 고장이 난 것 같다.’라고 늘 생각해 왔다. 나는 늘 내 생각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가 없었다. 이리 튀고 저리 튀는 생각들은 언제나 나를 구렁텅이에 몰아넣었다. 부정 편향의 사고가 끊임없이 반복될 때면, 고장 난 뇌로 인해 평생 고통 받을 이 삶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대체 내가 무엇을 그리 잘못했기에 이런 형벌을 받아야만 하는가. 과거의 감정들에 둘러싸여 출구도 없는 밤을 지새우기를 반복한 지가 몇 해일까. 가장 먼 기록을 뒤져보자면 어언 22년도 더 되었다. 살인, 방화, 비방 등의 대죄를 저지른 적 없이 그저 평범하게 살았을 뿐인데 왜 22년도 넘게 우울증의 지옥에 빠져 살아야 하는 걸까. 




    “사실 나는 우울증을 겪고 있어.”라고 말을 했을 때 “네가? 그럴 리가 없어.”하며 단호히 대답했던 한 남자가 떠오른다. 현대 의학의 호들갑을 믿지 않는 그는 확신에 차서 너는 괜찮다, 병원에 갈 필요도 약을 먹을 필요도 없다고 했다. 겉으로 보면 나는 정말 우울 같은 것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이다. 사람들 앞에서 문장을 말하다 버벅대는 일도, 땅바닥만 쳐다보며 걷는 일도 없다. 그런데 말이지, 당신이 나에 대해 대체 뭘 알아? 뇌가 고장 난 것에 대해 무얼 안다고 그렇게 확신하지? 라는 말이 목구멍 밖까지 밀려온다. 












  두통 때문에 잠에서 깼을 때, 밤새 뇌에서 무슨 작업을 한 것인지 문득 ‘과거에 겪은 모든 시련은 내 영혼의 성숙을 위한 퀘스트였다. 나를 괴롭히던 기억들, 상처들 모두 성숙을 위한 수업료였다.’하는 문장이 머릿속에 떠 올랐다. 





                                           ‘수업료, 수업료. 삶의 모든 고통은 수업료다.’ 





뇌가 저절로 되뇌었기 때문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뇌의 흐름을 가만히 따라갔다. 더 이상 잠을 잘 수가 없어 거실로 나왔다. 22년 간의 개고생이 영혼의 성숙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니 X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했다. 이놈의 오랜 우울증 때문에 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커리어도 죄다 망쳐버린 데다 돈까지 못 벌고 있지만 그럼에도 어떻게 먹고는 살고 있으니 마냥 운수를 죽 쒀서 개나 주진 않은 거다. (운수가 정말 시궁창이었다면 어제 생일 기념으로 제주 흑돼지 스테이크를 썰지도 못했겠지. 사실 진짜 운수가 시궁창인 녀석은 어제 나에게 먹힌 그 불쌍하고 기름진 흑돼지일 테다.)





  

  내 뇌의 부정 편향 일색의 사고 흐름은 부모(주로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유전적 기질과 양육 상황에서 부모님의(주로 아버지의) 잘못과 스트레스가 많았던 환경의 영향이 크다. 내 아버지는 기질적으로 과민한 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하마터면 굶어 죽을 뻔한 반고아나 다름없는 청소년기를 보낸 탓인지 어린 내 앞에서 본인의 힘듦을 끊임없이 하소연하곤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 세상은 불지옥 소굴이며, 믿을 만한 인간은 하나도 없으니 환상적인 생각 따위 하지도 말고 그저 일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맞았다. 어렸던 나는 인생이 정말로 그 따위인지 실제로 겪지 못했으므로 자연히 아버지의 말에 납득하지 못하였고, 그가 그토록 하지 말라던 ‘환상적인 생각’을 하며 돈 안 되는 장래 희망을 꿈꾸다가 ‘가족을 생각하지 않는 이기적인 X’로 낙인찍혀 시시때때로 괴롭힘을 당해야 했다. 




 십 대 시절 나는 진심으로 그를 증오했다. 그가 내게 늘 말 했듯이(‘왜 저런 게 나한테서 태어났을까. 지지리 운도 없지.’) ‘왜 저런 게 내 아버지일까.’ 하는 생각을 밥 먹듯 했던 십 대 시절이었다.

독립을 하여 떨어져 산 덕택일까. 나는 이제 그를 이해한다. 그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이해한다. 그로서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뇌도 고장이 나 있었으니까. 아버지의 고장 난 뇌를 물려받은 나는 필연적으로 그를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 또한 (실제로는 위험하지 않은데도) 늘 생존의 위협을 감지하는 스트레스에 찌든 뇌로 인해 불안과 공포의 지옥 속에 빠져 있는 것이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 애쓰며 아무리 발버둥을 쳐봤자 잠시 잠깐 좋아질 뿐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다람쥐 쳇바퀴 같은 사고 흐름의 반복이 그의 뇌 속에서도 계속되고 있었을 것이다.



고장 난 뇌가 그에게는 어떤 깨달음을 주었을까. 우리의 병세에 대해 서로 공유하지 않아 알 길은 없지만 그의 뇌리에도 무언가 쓸만한 것이 스쳐 지나간 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의 병세도 어림잡아 40년은 족히 되었을 터인데 아무런 성과도 없다면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난데없이 자다가 문득 맞은 에피파니(Epiphany : 갑작스럽고 현저한 깨달음 혹은 자각을 뜻함)는 죽어가던 숙주를 되살리려는 내 몸 속의 면역 시스템이 작동한 탓이었을까. 나아졌다 싶으면 되돌아오고, 또 되돌아오는 우울증의 늪에 지쳐 울던 어제의 내게 새 희망을 품으라며 고장 난 뇌가 슬그머니 손을 내민다. 이러고는 금세 또 고장이 나서 부정 편향적 사고의 늪으로 다시 날 빠뜨리겠지? 하며 의심하지만, 내민 손을 잡지 않을 수는 없다. 내 삶은 더 이상 나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건강히 살아있어야 내 뱃속의 아이도, 남편도, 강아지도, 부모님도, 이토록 보잘 것 없는 나의 생일을 챙겨 주었던 2n명의 사람도 모두 모두 멀쩡한 정신으로 뇌가 고장 나지 않은 채 건강히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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