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의 약속
사소한 걱정 하나가 있습니다. 멀리서 보이는 실루엣을 단번에 알아보고 환한 미소로 반겨주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야속하게 근경조차도 잘 보이지 않아 눈을 얇게 뜨고 찡그리는 인상을 먼저 보여줘야만 합니다. 이것이 마음에 걸리는 사소한 걱정거리입니다.
친구를 만나 요즘 부쩍 눈이 나빠졌다고 토로하니 민간요법이라고 할까요. 멀리서 산을 바라보라는 대대손손 전해지는 비약祕藥을 내려줍니다. 눈이 편안해지는 효과가 있다고 하더군요. 산과 하늘을 번갈아 봐야 한다며 세부적인 방법도 일러주고, 밤에는 효과가 없으니 꼭 아침에 가라는 당부도 해줍니다.
친구의 말이 의학적으로 판명된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믿어보기로 합니다.
언제는 산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운동 삼아 산을 탔었던 날이 있었습니다. 높이 올라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기구해 보였던 피사체는 아름다워 보이고 보통의 날들은 특별해 보입니다. 산에 오르면, 지극히 평범해 보였던 내가 사는 동네가 이렇게 이쁜 곳이었나를 문득 실감하게 되는 것처럼요.
시간이 지나고 나면 좋아지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손으로 턱을 괸 채로 그윽하게 지난날을 떠올려보면 하늘이 무너질 정도로 힘겨웠던 날도, 큰 문젯거리로 두려움이 가득했던 날도, 불안과 걱정으로 밤잠을 설쳤던 날도, 묵묵히 그리고 무던히 지나갔던 날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미소를 지으면서 낱낱이 살펴볼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정오의 약속 하나가 있습니다. 약속 시간보다 먼저 나가 카페 2층 창가 자리에 앉아 당신을 기다려볼까요. 당신이 오는 방향에 시선을 두고 있어 볼까요. 당신 몰래 우리의 미래를 그려보고 올까요. 열병으로 이마에 손을 짚는 일, 이제 더는 없을 거라 말해주고 올까요. 이렇게 정오의 햇살 위에 걸터앉아 고즈넉하게 당신을 바라볼까요. 오늘은 눈을 찡그리지 않고 당신에게 웃음을 먼저 보일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책, 계절의 단상 - 정오의 약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