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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표 Aug 04. 2024

나름의 여름

그 순간에만 존재하는 코모레비(木漏れ日)

코모레비는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일렁이는 햇살을 뜻하는 일본어다. 코모레비는 바로 그 순간에만 존재한다.

- 영화 ‘퍼펙트 데이즈’ 中


나는 어렸을 때부터 여름이 너무너무 싫었다.

“당신은 여름을 좋아하나요?” 누가 묻기도 전에

“저는 여름이 너무 싫어요, 당신은 어떤가요?”

나와 똑같이 여름을 싫어하길 바라는 진심을 저 밑에 깔고, 먼저 물어보곤 했다. 제일 더운 지역에서 나고 자라 그 뜨거운 온도와 높은 습도는 내가 여름을 싫어하는 이유로 충분했다. 시원한 여름의 맛도, 화려한 여름의 꽃도 내 마음을 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여름방학’, ‘여름휴가’와 같은 이 계절에만 따라붙는 달콤한 시간들은 그저 내가 이 계절을 버티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물놀이도 뜨거운 태양 아래에선 즐거움을 잃기 마련이다. 그렇게 내가 여름을 좋아할 모종의 이유라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


나와 달리 여름을 좋아하는 사람을 여럿 만났다.

내가 여름을 싫어하는 이유처럼 그들이 여름을 좋아하는 이유도 단순했다. 그들은 뜨거운 온도를 시원한 파도로 이겨내고 습도만큼이나 높은 여름의 채도를 즐길 줄 알았다.

높기만 한 여름의 정도 속에서 나는 낮은 그늘로 숨기 바빴는데… 그렇게 매년 여름, 제일 싫어하는 이 계절이 얼른 지나가기만을 바라고 또 바랐다.

얼른 지나가기만을 바란 마음과는 달리 이 계절에 남은 많은 기억들은 지나가지 못하고 선명하게 남았다. 여름엔 계절의 채도만큼 기억의 명도도 높아져서 많이 웃고 울었다.

가장 진했던 사랑의 처음과 끝도 여름이었다. 한 여름밤의 꿈처럼 지나간 설렘도 여럿이었다.  흘린 땀만큼 흘린 눈물도 많았다. 업무를 외따로 하게 된 외로움, 외따로 이 조직에 남게 된 쓸쓸함 모두 뜨거운 여름에 지나갔다. 결국 좋은 기억은 여름을 버틸 힘이, 나쁜 기억은 여름과 함께 버릴 짐이 되었다.


여름이 싫은 건 여전하다.

하지만 평범한 일상 속에서 여름의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들을 소중히 생각하려 노력한다. 돌이켜보니 인상 깊게 남은 영화들, 행복이 선명한 필름사진들 모두 여름의 순간에만 존재했다. 이제 그늘로 숨지 않고 뜨거운 햇살 아래 당당하게 서있다. 일 년의 한중간에 서서 멋지게 보낸 상반기를 되돌아보고 더 멋지게 보낼 하반기를 다짐해 본다.


물에 비치는 윤슬을 좋아한다. 이제는 고개를 들어 더 높은 곳의 빛을 바라본다. 높은 곳에서 일렁이는 코모레비는 이 뜨거운 햇살 속에서 더욱 빛나는 법이다.


“당신은 여름을 좋아하나요?”

“저는 여름을 너무 싫어하지만, 나름 여름을 아름답게 바라보고 늠름하게 보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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