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C경륜장 발매원으로 일했다.
경륜경주가 있는 사흘간 출근해서 고객에게 경주권을 발매하는 일이었다. 건전한 그린스포츠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나라에서 홍보하는 경륜은 이미 스포츠를 넘어 도박으로 변질되어있었다. 경륜경주가 열리는 금요일이면 한 탕을 노리는 베팅꾼들이 전국에서 모여들었다. 1인당 발매 상한액이 5만원으로 정해져있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빚을 내어 경륜장을 찾는 사람도 많았다. 고액 베팅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목숨을 끊는 사건도 일어났다.
당시 비정규직이던 발매원들은 최저임금 위반과 유급휴일 미부여, 고용불안 등을 개선해줄 것을 공단 측에 요구했다. 공단 측에서는 비정규직의 노조가입을 불허했다. 우리는 따로 비정규직 노조를 만들었고 공단 측은 이를 묵살했다. 마침내 파업이라는 집단행동에 들어갔다. 나는 홍보 쪽을 맡았고 인터넷 카페를 만들어 조합원들과 소통했다. 그날그날 일정과 진행상황을 게시판에 올렸고, 보도자료와 입장문을 작성하기도 했다.
노조가 처음 결성되던 그날은 정말이지 열기가 엄청났다. 당장이라도 세상을 뒤집을 것처럼 하나 된 모습이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며 결기를 보였다. 이윽고 공단 측에서 회유와 협박을 가해왔다. 발매원 중 공무원 가정이 더러 있었는데 가족을 통해 협박했다. 경찰공무원 남편이 파업현장에 찾아와서 아내 손목을 잡아끌고 가기도 했다.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불러다가 집안망신이라며 호통을 쳤다. 그러면서 하나둘 흔들렸다.
눈만 뜨면 수십 명씩 탈퇴서를 쓰고 투표소로 돌아갔다. 앞장서서 투쟁한 임원들이 고소고발에 휘말려 점점 힘든 상황이었다. 나를 비롯한 십여 명은 퇴사를 각오하고 끝까지 버텼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가 카페 게시판에 노래를 올렸다. 신형원의 ‘개똥벌레’였다.
아무리 우겨 봐도 어쩔 수 없네. 여기 개똥무덤이 내 집인걸
가슴을 내밀어도 친구가 없네. 노래하던 새들도 멀리 날아가네
어쩜 노랫말이 내 심정 그대로였다.
가지마라, 가지마라 가지 말아라
나를 위해 한번만 노래를 해주렴
이 대목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투쟁 전에는 언니동생하며 친자매들처럼 다정하게 지냈었다. 진상고객들에게 온갖 욕을 먹을 때면 따뜻하게 위로해주는 동료가 있어 견딜 수 있었다. 이 모든 관계가 노조투쟁을 하면서 어긋나버렸다. 먼저 탈퇴한 동료를 원망했고 마지막까지 남은 동료를 독종이라고 손가락질했다. 결국엔 나도 탈퇴서를 쓰고 투표소로 돌아갔지만 냉랭한 투표소 분위기가 싫어서 일을 그만두었다.
우리들 짧은 투쟁은 그렇게 실패로 끝났지만 이후 비정규직노조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확산하는데 어느 정도 기여를 했다고 믿는다. 간혹 바람결에 동료들 소식이 들려왔다. 노조위원장이던 친구는 보험설계사로 성공했고, 발매원 단합대회 때 개다리춤을 추었던 예쁘장한 Y는 오랜 불임을 극복하고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카페게시판에 개똥벌레를 올려서 나를 울게 한 누군가는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을까.
개똥벌레를 들을 때마다 지독히 외로웠던 그날 밤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