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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루 Dec 09. 2022

@yesweed_420

(1) 관종의 역사 - 1

    대학에 합격한 후 처음 맞이하는 명절모임에서 모 어르신에게 '이제부터는 너도 성인이니 앞으로 잘 선택하고, 잘 살아야 한다' 등의 소리를 들으며 문득 '잘 사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잘 산다는 것에 대한 기준이 무엇인지가 내게는 좀 모호했고, 아주 어릴 때부터 '관종'이라는 스스로에게 부여한 정체성에 거하게 취해있던 나는 일단 평범한 건 다 싫었다. 능력과 형편에 맞게 앞으로의 삶을 끼워맞추는 게 싫었어서 대학도 진짜 뜬금없는 과로 오게되었지만 그것마저 내 나름 잘 선택한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부모님의 억장은 와르르 무너지다 못해 잿빛 가루가 되었지만). 내 나름의 잘 사는 기준을 세우기 위해 여러 에세이나 자기계발서 등을 겉핥기로 읽으면서 느낀 바로는, 결국 '잘 사는 것'은 훗날의 나 자신 혹은 타인이 지금의 나를 되돌아봤을 때야 그 여부를 판단할 수 있지 않나? 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 동안 잘 살아왔는지, 지금 잘 살고 있는지, 앞으로 잘 살다 갈 것인지를 과거의 기록들을 통해 판단해보고자 한다. 인생은 장편의 코메디로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잘 살았다'의 그 기준을 웃겼나, 안 웃겼나로 나누기로 했다. 이 의미가 있는듯하면서도 실은 크게는 없는 기록을 함으로써 내가 노리는 최종목표는 어디까지나 기록물들을 모아 내 장례식에서 깔깔유모아집처럼 조문객들에게 나눠주기 위함이기 때문에 가볍게 읽어주면 좋을 것 같다 (잘 뒤졌다가 아닌 잘 살다 갔구나는 것을 확인받기 위해).




모든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 지명, 회사 및 단체는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 지명, 회사나 단체 등과 관계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적나라하고 직접적인 표현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1) 관종의 역사 - 1

유년기 (1998년 추정)


    내 개인적인 생각이건데, 다자녀 가정의 막내출신인 부모 밑에서 태어난 K-막내는 그 존재만으로 무조건적인 애정과 꽤나 막강한 권력을 동시에 쥘 수 있다. 막내가 막내랑 결혼했는데 그 후에 태어난 애가 집안의 막내일 경우, 케바케겠지만 적어도 당시의 연안 이씨 집안에서는 도내 최강의 귀염둥이가 선천적으로 결여된 싸가지에 대한 면죄부를 쥐고 태어난 것과 같은 이치었다. 그게 1992년, 나의 탄생이었다. 그 뒤로 나와의 상의없이 두 명이 더 태어나 집안의 막내 자리를 빼앗기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92년도부터 97년도까지는 확실한 나의 시대였다.


    유년시절의 나는 싸가지가 많이 부족한 아이였다. 어디서 꾸어올 수도 없었기에 늘 부족한 상태였음에도 한참 어린 동생이란 이유로 친척 언니, 오빠들에게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 지금이야 환경적 요인으로 인해 개과천선하여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지만 그 시절의 나를 되돌아본다면 진짜 왜 저 지랄이지 싶은 부분이 한 두가지가 아니였다. 하여튼 그랬기 때문에 그 때는 내가 갖고싶은 것, 먹고싶은 것 그리고 하고싶은 것은 양껏 누리고 다녔으며 타인이 나의 요청 및 요구를 거절한다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지금 당장 이 바닥에서 배 까고 누워 땡깡을 부려도 좋다는 큐사인이었다. 그런 내게 세상이 결코 내 위주로 돌아가는 건 아니구나를 처음으로 깨닫게 해준 사람은 부모님도, 유치원 선생님도 아닌, 유치원에서 같은 반에 다니던 장미였다.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나는 이상하게 유치원 때의 몇몇 파편적인 기억들이 굉장히 선명하게 남아있다. 등원할 때마다 아빠가 머리를 묶어주시고는 했는데 너무 꽉 묶어서 얼굴가죽이 위로 땡겨져, 묘하게 인상이 날카롭게 변했던 때나 (너무 쫙 땡긴 나머지 두피가 빨개져 종종 담임 선생님이 머리를 다시 묶어주시고는 하셨음) 엄마가 데리러 오셔서 사이 좋게 하원하고 있는데 비둘기가 냅다 내 머리 위로 똥 싸서 빨간 대야에 머리를 세 네 번 감았던 때 등. 유치원을 다니던 당시는 거의 기억계의 디스크 모음집인데 (시간은 존나 오래 걸리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생각해낸다는 의미로써의), 그 중에서도 가장 자극적인 기억은 단연코 장미에게 두드려 맞았던 기억일 것이다.


    나의 social behavior(사회적 행동)은 장미에게 두드려 맞기 전과 두드려 맞은 후로 나뉠 수 있다.


    당시 내가 다니던 유치원에는 요한이란 이름의 남자아이가 있었다. 하얀 피부에 큰 눈동자, 길쭉한 팔다리를 가졌던 요한이는 땡깡쟁이들과는 달리 얌전하고 양보를 잘하는 성격이어서 더 그런지 별명이 진짜 왕자님이었다. 동년배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조숙함과 젠틀함에 무수한 이들이 그에게 장래의 결혼 약속과 오후의 소꿉놀이를 종용하였고 그 중에는 물론 나도 있었다. 특히 오후의 소꿉놀이 시간만 되면 원내는 그를 선점하기 위한 아수라장이 되었는데, 종국에는 그 누구도 그와 소꿉놀이를 해본 적이 없다. 장미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장미. 원내의 모든 아이들 중에서 키가 가장 크고 풍채도 상당했던 아이. 외적으로 느껴지는 기운만큼 물질적 힘도 정비례했던 아이. 원내 최강의 장미. 지금도 그 때를 돌이켜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용기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 아니다. 장미가 원하면 장미가 미인을 얻는다. 장미는 감정표현이 많지 않은 아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강자의 여유인가 싶기도 한데, 고집은 있으나 딱히 떼를 쓰는 모습을 보인 적도 없으며 선생님의 말씀도 곧잘 듣던 조용한 아이였다.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자기 주장을 강하게 펼칠 때가 있었는데, 바로 요한이와 관련되었을 때였다.


    "요한이는 나랑 놀 거야."


    구구절절한 뒷받침도 필요없다. 장미가 원하면, 장미가 갖는다. 그게 원내의 암묵적인 규칙같은 것이었다.


    "싫어. 나도 요한이랑 같이 놀 거야."


    날씨가 좋은 탓이었을까. 아니면 집안에서 오냐오냐 해주니까 밖에서도 오냐오냐 해줄 것이라 생각한 뭣 모르는 애새끼였기 때문이었을까. 그 날만큼은 꼭 요한이랑 놀고 싶어, 나름 강한 힘으로 요한이를 내 쪽으로 끌어당기며 오기를 부렸었다. 아무 잘못없이 그저 잘생기게 태어난 죄 때문에 요한이는 가운데서 능지처참의 자세로 나와 장미에게 붙들려있었을 뿐이었다. 몇 번의 밀고 당김을 주고받고나서 참을성 없는 내가 먼저 그 손을 놓으라며 장미를 밀쳤고, 장미 역시 참지 않았다.


    순식간이었다. 내 입 안에 모래알의 까끌거림이 느껴지기 시작한 게. 유치원 놀이터의 모래밭 한가운데서 나는 마치 레슬링 시합의 한 장면같이 장미 밑에 깔려버렸고 굴욕적인 자세로 제대로 된 가드 자세도 취하지 못하고 있을 때 장미는 고 앙팡진 주먹으로 위에서부터 나를 팡팡 내리쳤다. 그녀의 정수리에 단디 묶여있던 왕자두 머리방울이 얼마나 흔들리던지. 머리털 나고 몇 번 보지 못했을 폭력적인 장면에 다른 아이들은 선생님을 찾으며 울기 시작했고, 내 기억으로는 요한이는 미끄럼틀 옆에서 그냥 서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원생들의 곡성에 우리반 담임 선생님이었던 고구미(별명)쌤이 뛰어오셨고, 그녀의 중재 하에 싸움은 완벽한 나의 패배로 끝나버렸다. 빈틈이 보였어야 반격을 하던말던 했을텐데, 최고의 수비는 공격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압도적인 힘의 차이 앞에서는 도내 최강 귀염둥이 막내의 힘이고 뭐고 다 무용지물이었던 것이다. 자초지종을 들은 고구미쌤은 나와 장미가 화해하지 않으면 간식인 꿀떡을 주지 않겠다 하셨고, 인생 처음으로 두드려맞은 충격으로 인해 나는 결국 장미에게 꼬리를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결코 꿀떡 때문은 아니었다) 장미는 상당한 물주먹이었기 때문에 아프지는 않았다. 다만 인생 처음으로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을 체득하고나서의 납득하는 과정이 어린 나에게는 쉽지 않았던 것이었다. 물론 용납하고 싶지 않아 울면서 갖은 떼를 다 써보았지만, 자연스럽게 장미의 뒤로 가서 섰던 요한이를 보고 그 허탈함에 눈물도 금방 그치게 되었다.


    그 뒤로도 수업 시간을 이용해 요한이의 옆자리에 후다닥 앉던가 밥 먹을 때 먼저 자리를 맡아놓는 등 나름의 성과없는 노력을 이어나가보았지만, 장미는 더 이상의 물리적 제압없이 눈빛만으로 나를 압박하였고, 한 번 두드려맞은 기억으로 인해 지독한 PTSD가 와버린 난 더 이상 저항다운 저항은 해보지도 못하고 꼬리를 말고 교실 뒷켠으로 자리를 이동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늘 내가 어디에 가서도 짱이라고 생각했는데, 힘 있는 자 밑에서는 만민이 평등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버렸다. 물론 그렇다고 없던 싸가지가 모락모락 피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덜 까불게 된 것은 확실했다. 싸움의 패배자는 그 뒤로 이렇다 할 나댐없이 교실 한 뒷켠에서 쓸쓸히 요한이의 뒤통수만 바라보다 유치원 졸업식을 맞이하게 되었다. 졸업식 때 쯤이 되어서야 힘 있는 자는 배풀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장미가 깨달았던 것인지 혹은 잠깐의 기우였던 것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으나, 모두가 작별인사를 하는 날, 장미는 특별히 원내의 여자아이들에게 요한이와 포옹하며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그 때문에 우리는 줄지어 요한이와 포옹하기를 기다리는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 옆 나라 지하 아이돌의 악수회같은 모양새였지만 그 놈의 짝사랑이 뭔지 다들 절절하게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며 요한이와의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사실 그 때 쯤의 나는 요한이에 대한 관심도 시들시들해졌을 때라 요한이와는 간단한 포옹만 했고, 마지막이라는 서글픈 어감 때문에 장미와도 포옹을 하게 되었다. 아마 장미도 같은 마음이었는지 우리는 짧지만 꽤나 마음을 담은 포옹을 나누었다.

    

    그 뒤로는 나대지 않았는지 묻는다면, 아니라고는 대답하기 어렵다. 다만 장미를 만나기 전까지는 집안에서뿐만 아니라 바깥 사회에서도 내 위주로 돌아간다 생각했지만, 장미를 만난 후에는 적어도 밖에서는 나만이 주인공이 아니란 것을 조금 알게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때까지만 해도 당시의 나는 전혀 몰랐다. 세상의 짱이라 믿었던 내 자신이 초등학생이 되면서 도내 최강의 소심쟁이, 겁쟁이가 될 줄은.






(도내 최강 귀염둥이 시절. 서 있는 자세만 봐도 성격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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