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삶에 주어진 짐에 따라 다른 무게를 짊어지고 산다. 어떤 이는 가벼운 백팩 정도의 무게가 짊어지는가 하면 어떤 이는 몸집보다 큰 돌덩이를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사람도 있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선택되어지는 것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의 연속이라 생각된다. 나의 의지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극히 드물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어느새 어른이 되어 버린 게 아닌가 생각한다.
삶에서 선택할 수 없는 것이 딱 두 가지 있다. 하나는 탄생이요. 다른 하는 죽음이다. 태어남과 죽음은 인간이 선택할 수 없는 부분이다. 태어남을 선택한 적도 없고, 죽음을 피할 능력도 없다. 우리는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으로 향하는 여정을 살뿐이다. 죽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난 그것을 선택이라 말하지 않으려 한다. 그것은 선택이 아니다. 그 누구도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은 없다. 그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 뿐이다.
삶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다고 한다. 희로애락이 있는 것처럼 맑은 날과 흐린 날의 반복이요, 삶의 흐름이라고 한다. 누구든 어떤 시절에는 먹구름이 끼어 빛 한 점들지 않는 순간이 있을 것이요. 또 어떤 순간에는 구름 한 점 없이 티 없이 맑은 날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수많은 다른 날들을 어떻게 살아갈 것이며, 어떤 자세로 임하는지에 따라 삶은 제각각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
먹구름이 낀 하늘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볼지 그리고 화창한 하늘을 어떤 자세로 대할지는 모두 개인의 선택일 따름이다. 하지만 그 선택마저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과 환경이라면 우린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나에게 있어서 흐린 먹구름이 끼였던 때는 서른 초반이었다. 막막함에 앞이 보이지 않고 답답함에 속이 막힌 기분이었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을 줄 알았던 삶에 추락할 곳이 더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깊은 심연으로 빠져들게 된다. 나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 앞에서는 무기력함에 점철될 수밖에 없다.
태어나 보니 부모가 살인자이거나 태어나 보니 부모가 빚쟁이에게 쫓기는 신세라면 과연 그런 상황에서 어떤 이가 올바른 삶을 선택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삶의 출발은 선택되어진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을 테지만 누구도 그것을 의식하며 살진 않는다. 마치 당연한 것인 양 받아들이며 살뿐이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지안의 삶은 그렇게 선택되어지는 삶이었다. 빚에 쫓기는 부모는 자신을 내 버린 채 잠적해 버렸고, 그런 그녀에게 남은 것은 부모가 남긴 빚더미뿐이었다. 빚쟁이에게 쫓기고 악덕 사채업자에게 매일 구타를 당하는 일상은 삶을 더 이어나갈 수 없게 만든다. 가학적인 삶은 나이를 불문하고 통째로 덮쳐버린다.
"누구든 그 상황이 되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라도 그럴 것이고, 너라도 그럴 것이다."
가족이 눈앞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구타를 맞고 있다면 그 어떤 누가 가만히 두고 볼 수 있을까? 나였더라도 그랬을 것이다. 지안은 작은 두 손에 칼을 들고 할머니를 두들겨 패는 사채업자를 찔러 죽여버렸다. 그녀가 든 칼에는 피가 흥건히 묻어있다.
사람을 죽인 살인자라는 타이틀은 아무리 법정에서 무죄로 판정 나더라도 벗어날 수 없는 족쇄와 같았다. 그런 그녀에게 이번엔 죽은 사채업자 아들이 들러붙기 시작한다. 지안은 성인이 되었지만 어른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한 채로 커 버렸다. 어린 시절 그녀를 제대로 돌봐준 사람이 있기는커녕 오히려 세상은 그녀를 사지로 몰아넣기에 이르렀다.
"상처 입은 아이들은 너무 일찍 커 버려. 그 상처를 알기가 두렵다."
'나의 아저씨'를 본 건 추운 겨울 홀로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였다. 처음엔 20대 여자와 40대 남자의 사랑이야기 혹은 키다리 아저씨 같은 느낌의 드라마인 줄 알았다. 하지만 드라마를 보고 난 후 이것은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도 키다리 아저씨 이야기도 아닌 완전히 다른 종류의 드라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사실 어떤 장르인지 설명하기가 어렵다. 이런 종류의 드라마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당시 난 연속된 실패와 좌절 앞에서 무엇에도 희망을 걸기 어려운 그런 시기에 놓여 있었다. 누구도 만나기 어려웠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시기였다. 그저 방에서 혼자 쭈그려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난 혼자 방 안에 쭈그려 앉아 드라마를 보면서 극 중 이지안(아이유)과 박동훈(이선균) 두 사람이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한 사람을 알면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다고 말한 박동훈은 아마 이지안을 처음 봤을 때부터 그녀가 자신과 닮았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무심하게 벌레를 툭하고 죽이는 모습부터 어두운 표정까지 그 사람의 삶이 어떤지 그녀를 통해 자신을 투영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어려서부터 어른들에게 제대로 된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자란 이지안은 성인이 되었지만 내면엔 상처로 가득하여 늘 가시가 돋친 상태였다. 모든 사람이 경계의 대상이었고, 누구도 믿지 못하며 자기 방어를 하기에만 급급한 벼랑 끝에 몰린 상태였다. 스스로 삶을 이끌고 가는 게 아닌 삶에게 끌려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생각보다 세상엔 그녀와 같은 사람이 많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박동훈(이선균)은 대기업의 부장 자리에 있지만 핵심부서에서 좌천된 상태였다. 대학 후배가 대표로 있는 회사에서 부장으로 근무한다는 것은 꽤나 자존심 상하는 일일테다. 그것도 자신이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상무이사로 진급을 앞둔 상태에서 여러 가지 일에 휘말리게 되는 박동훈은 그 중심에 이지안이 끼어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게 된다. 이지안은 그가 극도로 싫어하는 대표의 끄나풀이었다. 그녀는 늘 그를 감시해 왔고, 어떻게 하면 그를 진급에서 누락시켜 회사에서 마저 잘려 나가게끔 만드는 역할을 자처해 왔다.
어떻게 보면 박동훈은 이지안을 싫어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오히려 고마워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여 잘 표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감정을 철저히 숨기고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 있다. 속에 있는 이야기를 잘 꺼내지 않고 홀로 묵묵히 묵혀두는 사람이 바로 박동훈이었다. 그런 그가 이력서에 달랑 달리기 하나만 쓰인 것을 보고 내력이 강해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이지안을 뽑게 되었다. 어쩌면 스스로가 내력이 강해지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밥 좀 사 주죠"
박동훈의 꼬투리를 잡고 협박 비슷하게 다가온 이지안은 매일 박동훈에게 접근하여 그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자 한다. 이윽고 핸드폰에는 도청 프로그램까지 심어 그의 사생활을 일거수일투족 감시하기에 이른다.
처음에는 그를 끌어내리려 시작했던 일이 그 사람을 점점 알아 갈수록 그에게 호감을 느끼게 된다. 여기서 정말 대단한 것은 그런 이지안을 대하는 박동훈의 태도이다. 무릇 다른 남성들은 오히려 먼저 20대 여직원에게 다가가 문란한 상황을 만들곤 한다. 하지만 박동훈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중도를 지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응당 어린 시절부터 가족이라는 작은 울타리에서 보호받으며 성인이 될 때까지 자라게 된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 당연함 마저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이지안이 그랬다. 박동훈은 이지안에게 삶의 울타리가 되어 주었다. 진짜 어른으로 그녀에게 줄 수 있는 도움의 손길과 호의를 베풀어 주었다.
한 두 번 호의를 베푸는 것은 어쩌면 오만이고, 오지랖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네 번 이상 잘해주는 것은 그것은 정말이지 진심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된다. 아마도 박동훈은 진심으로 그녀의 울타리가 되어주고자 했던 것이다. 아마도 그녀를 보고 자신이 보였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어떤 불쌍한 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가 나보고 불쌍하데."
"아저씨가 정말 행복했으면 했어요."
두 사람은 서로를 거울처럼 여겼다. 박동훈은 와이프가 자신이 극도로 싫어하는 대표와 바람이 난 것을 알아챘을 때 삶이 무너졌다고 한다. 삶이 무너져 내릴 때 그를 지탱해 줬던 대상은 다름 아닌 이지안이었다. 이지안은 지금껏 한 번도 살아 본 적 없었던 삶을 박동훈으로 인해 살게 되었다. 둘은 먹구름이 낀 어두운 하늘에 한 줄기 빛이 되어 주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수많은 상처를 입고 늘 사람을 경계하는 지안에게 동훈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며 위로를 건넨다. 그리고 지안은 존재의 가치를 잃고 삶이 너무 진 동훈에게 말한다.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정말."
박해영 작가님의 드라마를 보면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한 가지는 지하철이 자주 등장하는 것이다. '나의 아저씨'에서도 박동훈은 운전을 잘하지 않는다. 대신 대중교통인 지하철을 많이 이용한다. 그래서 지하철 씬이 꽤 많은 편이다.
'나의 해방일지'에서도 지하철은 자주 등장한다. 극 중 주인공인 삼 남매 모두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하는 모습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더는 비정규직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해방일지에서도 미정은 대기업에서 근무하지만 정규직이 아닌 계약직으로 근무한다. 정규직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장면과 정규직과의 차이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 등장하곤 한다. 나의 아저씨에서도 지안은 대기업 파견직으로 등장한다. 극 중에서 정규직과 파견직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과 대사들이 등장하곤 한다.
이렇듯 박해영 작가님은 우리들의 일상과 드라마가 서로 접점을 가질 수 있게끔 만들고 있었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래서 드라마이지만 마치 진짜 실제로 내 옆에 누군가 겪고 있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불러 올 정도니까.
지안도 미정도 우리 옆에 있는 누군가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우리가 행동하는 것과 말하는 것들을 다시금 돌아보게 만든다.
나의 아저씨가 우리에게 건네는 메시지는 바로 '위로'라고 생각한다. 박동훈과 이지안이 서로 위로를 주고받는 존재가 된 것처럼 우리도 서로에게 위로를 건넬 수 있는 존재이고자 한다면 삶은 조금이나마 따뜻해지지 않을까?
진짜 어른이란 무엇인지 깨닫게 해 주는 동훈을 보며 나를 다시금 되돌아보게 되었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무늬만 어른이 아닌 외력도 내력도 모두 단단한 어른이고자 한다.
배우 이선균을 처음으로 알게 된 '나의 아저씨'였지만, 이제는 그를 볼 수 없음에 안타까움과 속상함이 드는 요즘이다. 드라마를 다시금 보는데 이선균 옆에 이지안과 같은 사람 한 명만 있었으면 아마도 그는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다 아무것도 아니야. 쪽판린 거, 인생 망가졌다고 사람들이 수군대는 거 다 아무것도 아냐. 행복하게 살 수 있어. 나 안 망가져. 행복할 거야."
덕분에 어렵고 힘든 시간 잘 견딜 수 있었습니다.
부디 그곳에서는 평안함에 이르시길 바랍니다.
덕분에 행복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