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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람 Nov 14. 2019

옳은 것을 알아보는 방법 - ①

엄마가 도망가지 못한 날

 왜 나는 어머니를 용서하면서 아버지는 끝까지 밀어내는가. 이유라면 많다. 우리 집 같은 경우 아버지가 높은 비율로 폭언과 폭력의 가해자였다는 점, 그리고 내 어머니는 상황이 여의치 않아도, 가진 것 이상의 기력을 내어서라도 자식들의 피드백에 답하려 한 사람이었다는 점, 또 어머니는 사과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것. 어머니는 아버지처럼 자식들의 의사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았다는 점, 마지막으로 어머니는 우리 남매가 그녀의 애정을 의심하게 만들지 않았다는 점. 찾아보면 이유야 더 있겠지만 이것만으로 충분하다. 꼴랑 '엄마와 보낸 시간이 더 많아서' 따위의 이유가 아니다. 인간성의 결이 달라서다. 설령 어머니가 새벽에 울며 짐을 쌌던 그날 밤 그대로 나와 율이를 버렸다 해도 나는 엄마를 이해했을 것이다. 누군가가 흐느끼는 소리에 이미 잠에서 깼지만 여전히 잠든 척을 하고 있었다. 몇 살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유치원에 다닐 즈음이었을 거다. 수화기에 소곤대는 엄마의 말투로 보아하니 수화기 너머에 있는 건 외삼촌인 듯했다. 엄마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해서 가방을 쌌다. 율이도 깨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우리는 여기에 관해 이야기해본 적이 없으니까. 이 집에서 우리 남매는 눈치가 빨라야 했다. 눈치가 빨라야 세 번 맞을 것도 한 번 맞았고, 또 눈치가 빨라야 10분 혼날 것도 5분만 혼났다. 게다가 나는 식당에서 주워들은풍월 때문에 이미 '여간 으뭉스럽지가 아닌 어린것'이 되어 있었다. 물론 나는 그 으뭉스러움을 잘 숨겨야 어린이로서 더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결국 내가 이미 눈치챘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엄마를 잡을 수 있는 순간은 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엄마가 눈물에 축축해진 얼굴로 내 머리에 키스할 땐 간지러워서 자는 척하기가 힘들었다. 젊은 엄마는 그날 밤 어디로 갈 작정이었을까. 엄마의 무릎이 율이의 요를 건드리는 소리가 났다. 옷자락이 부스럭거렸다. 나는 잡을 용기가 없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공부를 잘하는 유치원생은 아니지만 세상에서 세 번째로 눈치가 빠른 유치원생 정도는 되었다. 이 집에서 엄마는 시들어간다. 아빠는 엄마를 울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여기서 엄마를 잡아 다시 지옥에 빠트리지 않는 게 이 생에서 자식으로 만난 도리 아니겠는가. 세상에서 세 번째로 눈치가 빠른 유치원생은 자식의 도리 운운할 줄은 알았지만 있던 엄마가 없어진 삶이 어떤 것인지 상상하기엔 들은 풍월이 모자랐다. 게다가 세상에서 세 번째로 눈치가 빠른 유치원생은 눈꺼풀이 부쩍 무거워진 것을 느끼고 있었다. 뭐가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겠지만 내일 아침 눈을 뜨면 내 세상은 45도 정도 바뀌어 있을 것이다. 잠들기 전에 그런 각오를 했다.

 


 다음 웹툰에서 연재되는 작품 중 <조숙의 맛-작가 이우물>이라는 작품이 있다. 매주 연재되는 회차들을 읽다 보면 주인공인 조숙이가 애답지 않게 너무 어려운 말을 안다느니, 무슨 애가 저렇게 눈치가 빠르냐느니, 아무리 픽션이지만 숙이의 사고 능력에 비해 연령대를 너무 낮게 설정했다느니 하는 댓글들이 보인다. 나는 그들의 무지가 무척 부러웠다. 소위 '평범하지' 않은 가정에서, 작은 사람들이 얼마나 영악하고 또 기민해져야 살아남을 수 있는지 그들은 알지 못한다는 의미였으니까.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다는 건 그것만으로 건강한 몸, 또렷한 정신에 버금가는 인생의 특권이라는 걸 말이다. 아무튼 살기 위해 일찌감치 영악해져야 했던 어린것으로서, 엄마의 부재가 머지않은 미래에 또 다른 여성의 등장으로 이어질 것을 예측하는 일은 하등 어려울 것이 없었다. 애초에 아버지가 상대를 가리지 않고 오지랖을 부리는 것이 당시 부부 싸움의 주원인이었으니까. 이걸 다 어떻게 기억하냐고? 다른 건 다 안 믿어도 이 말만은 믿어달라. 기억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다.


 눈을 떴을 때 율이는 아직도 이불속을 헤엄치고 있었다. 초록색 격자무늬 커튼 사이로 햇살이 밀고 들어왔다. 엄마는 잘 도망쳤을까? 지금까지 본 영화나 책 같은 걸 생각하면 지금이 울어야 할 타이밍인 것 같았지만 별로 실감이 안 났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던 날처럼 말이다. 지금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건 별로 걱정해야 할 일 같지 않았다. 힘든 일이라면 분명히 앞으로 많이 생길 것이다. 당장 오늘 밤 아버지가 또 술에 취해 난리를 칠 수도 있는 거였고 말이다. 때가 꼬질꼬질한 방문 고리를 움켜쥐고 문을 열었을 때, 엄마가 도망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기름 냄새가 났다. 아버지는 술을 먹고 누군가와 10만 원 내기를 하지 않는 한 아침부터 일어나 우리에게 계란을 구워줄 사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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