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꺼풀 뒤에 다른 감정
버킷 리스트라고 부를 만한 것은 못 되지만, 이 원고를 써나가는 일은 아주 오래 해야 할 일 목록의 상위를 지키고 있었다. 다만 첫 단어를 지면 위에 떨구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지면 위를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로 어지럽히고 싶지 않았고, 어떤 식으로 얼개를 짜면 좋을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 아직 쓸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방증이었을 것이다. 22살 때였나, 아버지와 싸운 후 극렬한 구토감에 변기통을 끌어안다가 시뻘게진 얼굴을 씻어내기 위해 샤워기를 집었을 때도, 한국 집을 떠나 남편이 있는 프랑스로 가기 위해 비행기에 올랐을 때도 언젠가는 써야 할 글이라고 생각했다. 첫 동기는 복수였는데, 동기가 복수일 때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아무것도 쓸 수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동기는 뭔가. 의무감이다. 아주 오래, 이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뿐이다. 이 글을 계기로 다른 학대 생존자들이 수치를 벗어냈으면 좋겠다고, 작은 사람들의 일상이 더 나아졌으면 좋겠다는 포부야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기대 효과다. 동력은 되지 못한다. 어린 내가 30살의 나에게 던져준 이 숙제를 잘 해내고 싶다는 의무감이 손가락을 움직인다. 작업은 순항 중이지만 괴롭다. 생각보다 괴롭다. 지금 괴로움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마저도 원고를 쓰는 내게 클로드가 '괜찮냐'라고 몇 번이나 물어온 덕분에-이 글의 존재는 그에게 비밀로 하고 있다. 완성하기 전까지는 그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다- 깨달았다. 학대에서 생존했다는 것 자체는 좋은 일이다. 다만 나는 그 모든 말과 수치심이, 괜찮다 느낀 적이 없다. 단 한순간도.
나는 오랜 시간 학대 피해로 인한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누가 내게 '학대가 미친 가장 큰 영향이 무엇이냐'라고 물었다면 나는 '풀 길 없는 분노'라고 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분노의 이면에 있던 감정이 보이기 시작했다. 수치였다. 나는 그저 부당한 피해 때문에 화가 났던 것이 아니었다. 피해를 넘어 지난 인생 자체가 너무 부끄러웠던 거다. 부끄러워서 화가 났던 거다. 내가 당했다는 것도, 가해자가 부모님이라는 것도, 나머지 가족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간다는 것도, 이 중에서 무엇도 나는 괜찮지가 않아서 부끄러웠다는 걸 왜 몰랐을까.
아무튼, 곤란할 때면 생각보다 앞서 웃고 마는 이 버릇에는 그런 탄생비화가 있었다. 그래서 클로드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지 말아 달라'라고 여러 차례 말했을 때도 조심이야 했지만 쉽게 고쳐질 거라는 기대가 품어지지 않았다. 거의 평생 이러고 산 셈이니 말이다. 그런데 프랑스 생활 이후 내가 가진 버릇 중 가장 먼저 고쳐진 것은 이 웃는 버릇이었다. 아직도 이유는 잘 모른다. 파리 사람 대부분이 회색 하늘보다 더 회색인 얼굴을 하고 걸어 다녀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회사에서 닮고 싶은 사람들 중 나처럼 무의식적으로 웃는 사람이 없어서였던 것 같기도 하다. 반사적으로라도 웃어줘선 안 될 길거리 성희롱은.... 이 버릇을 고치는데 확실히 도움이 되었다. 학대 경험에서 물리적으로 멀어질 수 있어서였을까? 이 동네의 어느 누구도 나를 모른다는 사실이 아주 포근했다. 집 밖을 나서면 내가 어디 상가 무슨 식당 몇째 딸인지까지 아는 이전의 생활과는 완전히 달랐고, 내가 웃지 않는다 해서 기분 나쁜 말을 들을 일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내 마음도 자연스레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저 내가 프랑스에 왔고, 또 조금 변했다 해서 수치와 분노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32년의 삶에서 나는 몇 분이나 사람이었을까. 아버지에게 나는 몇 분이나 존중받았을까.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과거의 일은 바꿀 수 없지만, 과거를 보는 지금의 눈을 바꾸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지 생각했다. 화는 내더라도 수치스러워하지는 말아야 했다. 화가 들어선 터에 깔린 수치부터 어찌해야 그 위의 분노도 무너져 내릴 테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거짓 웃음을 어떻게든 해야 했다. 대화의 공백에 불안해하지 말고, 내 행동에 자신을 가져야 했다. 나는 멋진 사람이라고 스스로가 믿을 수 있어야 했다. 며칠 세수를 하지 않더라도, 가진 것 중 가장 추레한 옷을 입어도, 알맹이의 윤기만으로 나는 충분히 멋지다고.
클로드가 곁에서 든든한 지지대가 되어 주었다. 클로드는 겉모습에 관해 평가하는 말을 일절 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내가 한 행동에 즉각적인 반향이 따라왔다. 나는 그렇게 양철 구두를 신고 양철 상자 안을 걸으며 돌아오는 반향에 귀 기울였다. 그 반향이 내가 다음으로 디딜 곳을 결정했었다. 그랬던 것이 프랑스에 오면서는 완전히 리셋되었다. 프랑스도 사람 사는 곳인지라 당연히, 겉모습에 신경을 쓰고 가끔은 상대가 입은 옷으로 사람을 판단한다. 나 같은 아시아계 여성 근로자에게는 더욱, 순간의 인상에 일의 성패가 좌우되지 않도록 일할 때 겉모습에 신경을 쓰도록 만드는 곳이기도 하다-이는 회사의 업종에 따라 차이가 있다-. 그러나 재킷을 벗고 가방을 내려놓으면 그저 클로드의 가족인 천람으로 돌아오는 나의 집에서, 클로드는 단 한 번도 나의 겉모습이 걸어야 할 방향을 제시하지 않았다. 나는 (율이를 제외하면)혈육에게도 이런 차원의 긍정을 받아본 적이 없었기에, 이는 기분 좋은 낯설음이었다. 입고 싶은 옷을 입고 싶은 순간에 입고, 원하는 표정을 지을 때는 나의 판단만을 신경 쓴다. 이 간단함 덕분이었을 것이다, 내가 그토록 빨리 가짜 웃음을 그만둘 수 있었던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