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니 새끼들'이어야 했나
세상에서 세 번째로 눈치가 빠른 유치원생은 기억력도 좋았다. 엄마는 우리가 어릴 적부터 한 번씩 '너희만 아니었으면'같은 말을 했었다. 작은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지 모를 말이었다. 좋은 말 같아 보이지는 않았는데 그런 말을 하는 와중에도 엄마 눈에는 사랑이 비쳤다.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우리 때문인가 봐. 율이랑 내가 있어서 엄마가 지옥에서 도망을 못 쳤나 봐. 이땐 조금 무서웠다. 물론 엄마가 우리와 있는 생활을 원했지만.
"일어났어? 세수하고 율이 깨워서 밥 먹자."
엄마는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말했지만 유치원생은 아직 우는 게 일이었다. 울음의 프로를 울음으로 속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부은 얼굴에 울은 후의 목소리. 그럼 어젯밤의 일은 꿈이 아니었다는 거다. 그래도 물어볼 수는 없었다. 엄마는 내가 눈치 없는 질문을 할 때마다 야단을 쳤으니까, '엄마, 울었어?', '엄마, 왜 도망 안 갔어?'같은 질문들은 아침부터 세게 엉덩이를 얻어맞을 공산이 있었다. 이럴 때는 입 다물고 있는 게 제일이다. 유치원은 나 같은 작은 사람들이 사회의 규칙을 배워나가는 공간이었다. 유치원에서는 안 가르쳐 줬지만 묻지 않는 게 규칙일 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그날로부터 23년이 지난 지금까지 엄마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자식 된 도리라기보다는 살아남은 사람들끼리의 의리다.
아버지는 내 동생인 율이가 남자인 주제에 몸이 약하고 대가 세지 못하다며 자주 꾸짖었다. 아무래도 엄마는 율이가 아버지에게 맞느니 본인이 악역을 맡는 게 낫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굳이 따지면 전 역도 선수한테 맞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그렇다고, 누구에게든 타작을 당한 율이가 감사해야 하는 건 아니다. 그래서 율이의 생각은 다를 수 있지만 나는 4년 늦게 태어난 율이보다 더 많은 것을 보았기 때문에, 아버지가 우리를 내버린 모습을 율이보다 더 많이 기억할 수밖에 없다. 아버지의 애정에는 늘 조건이 달려 있었다. 아버지는 식당 손님들이 데려온 아이들을 헐뜯으며 우리 남매는 (그 아이들 같은) 문제 행동을 하지 않아 참 예쁘다고 했다. 아버지가 칭찬이라고 하는 말에는 늘 하면 안 될 행동에 대한 단초가 붙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나나 율이가 못생기지 않아야만, 뚱뚱하지 않아야만, 공부를 잘해야만, 소리를 지르지 않아야만, 머리를 아버지가 좋아하는 모양으로 잘라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제는 나와 율이가 강아지 새끼들처럼 예쁘다며 용돈을 쥐어주던 아버지가 오늘은 술을 마시고 들어와 '니 새끼들 데리고 나가' 라며 엄마를 윽박지르는 생활이었다. '니 새끼들'이라. 왜 아빠는 이럴 때면 엄마와 나, 율이를 남의 가족처럼 대할까-혹시 헷갈릴까 봐 덧붙이지만 두 분의 결혼은 둘 모두에게 초혼이었고, 나와 율이는 아버지의 친자가 맞다-. 아빠는 키가 크고 힘도 세서 멋져!라고 생각했던 5살의 나는 아빠가 마음에 들어할 행동을 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 생각하는 초등학생이 되었고, 또 중학생이 된 후에는 이 가정이 언제든 깨질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갖고 살았다. 아버지의 '니 새끼 데리고 나가' 공격에 실제로 셋이 짐을 싼 것도 두 번은 된다. 어젯밤에는 나가라던 사람이 오늘 아침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한다. 이런 날이면 아버지는 으레 용돈을 쥐어줬다. 점점 경멸과 애정의 경계가 흐려졌다. 대학생이 된 후에는 자식도 부모를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고, 30살이 된 후에는 아버지에게 일절 알리지 않고 결혼했다.
이런 생활 속에서 나의 애정 판별기가 약간 고장 난 것도 같다. 나는 주로 내게 차갑게 대하는 사람에게 빠졌으니까. 내게 별 특별한 구석이 없다는 듯 대하는 사람들 말이다. 친구 관계는 이성 관계보다 더 시행착오를 겪을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나를 막 대하는 사람들과만 친구 하는 몹쓸 버릇은 대학에 가기 전에 고칠 수 있었지만 이성 관계는 여전히 같은 문제에 노출되어 있었다. 상냥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모르지는 않았다. 그런 사람들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나를 막 대하는 놈과 소중하게 대하는 놈 사이에서 선택해야 할 순간이 오면 내가 꽉 거머쥐는 건 나를 막 대하는 놈의 손이었다.
잘해주는 사람 앞에서는 어색했다. 얘가 번지수를 잘못 찾아온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그 사람에게 끌리지 않아서였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도 호감을 느꼈다. 그저 내가 흔들림 없는 애정을 받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에, 당시에는 몰랐지만 나는 내심 자신에게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나의 크기에 맞는 사랑을 선택했다. 그때 만나던 사람들과의 관계는 팽팽한 줄 위를 걷는 것 같았다. 누군가와 사귀기로 하면 나는 기간을 정했다. 물론 합의된 것은 아니었다, 이것들은 내 머릿속에만 있었다. 한 달이든 세 달이든. 이 기간은 웬만하면 상대가 무례한 짓을 해도 참았다. 내가 이런 과정으로 알아보고 싶었던 건 이 사람이 '고마운 것을 고맙다고 표현하는 사람인지'였다. 하지만 내가 멋대로 정한 '기간'동안 '고마운 것을 고맙다고 표현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은 한번 했던 '실수'를 계속했고, 습관적으로 미안하다는 말은 해도 고맙다는 말은 잘 하지 않았다. 내 멋대로 정한 기간이 끝나고,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으면 나는 헤어지자는 말만 남기고 그대로 떠났다.
나도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몰랐다. 처음부터 꽝을 집어놓고 당첨 제비가 나오지 않는다며 속상해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꽝과 꽝의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