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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현 Jul 06. 2020

웹소설. 피투성이 소나타

19화

 시현은 자각몽을 꾸고 있었다. 촛불 한 개만 켜져있는 방. 환하게 밝혀주고 있다기 보단 어둠의 공포를 증폭시키는 미약한 불빛이었다. 검게 물든 커다란 방에서 촛불을 마주하고 있는 소년. 시현의 열 여섯 살 시절이었다. 소속된 조직이 중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인지 당시의 시현은 창파오를 즐겨 입었고 실전형 중국 무술을 특기로 하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가련하게 제 몸을 불태우던 초는 점차 녹아 미약하게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촛불이 완전히 꺼지기 직전, 최후의 몸부림과 같은 불꽃이 한번 일렁인다. 그 순간 시현은 기마 자세를 잡으며 발경 타법으로 촛불 앞까지 장권을 내질렀다. 바람 소리와 더불어 순식간에 어둠의 손아귀에 붙잡힌 방 안.

'훌륭하다.'


빛이 사라진 자리에 소리가 들려온다. 할아버지의 목소리. 오랜만에 듣는다. 이어 장면은 바뀌어 가을 바람이 부는 공원아 나타났다. 처음 나무에 대고 정권 지르기를 한 날이었다. 비록 완력은 약했지만 자세가 완벽하여 제법 야무진 타격음이 울렸다. 네 살의 시현은 옆에 서 있는 할아버지를 자랑섞인 표정으로 올려다 보았다. '우리 귀여운 손자. 넌 정말로 강해질 거야.' 할아버지는 시현에게 목마를 태워주며 아름다운 단풍이 떨어져 내리는 숲을 한 바퀴 빙 돌았다. 어린 시현은 할아버지의 하얀 수염과 머리카락을 만지며 순수하게 웃었다. 꿈은 추억을 재현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어둠과 숲의 이미지가 허상이었다 말하듯 이제 칼날같이 긴장된 공기가 펼쳐진다. 예복을 입은 채 단정히 서 있는 시현. 아버지와 어머니를 등지고 선 가운데. 휘하의 중간 보스들과 조직원들이 절대적 충성을 맹세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제부터 네가 당주다.' 


'미안하다.'


'당주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당주님.'


'당주님.'


'당주님.'


시현의 심리를 파악한 듯, 어느새 꿈은 처음의 어두운 방으로 회귀했다. 계속해서 들려오는 조직원들의 맹세. 소리로 채워지던 방 안에 하나하나 새 촛불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빛은 점점 밝아져 방에 서렸던 어둠은 갈 곳을 잃었다. 시현의 휘하에 있던 수많은 조직원들이 무릎을 꿇고 시현을 에워싸고 있었다. 꺼뜨린 초는 초라하게 녹은 자국과 검게 된 심지 뿐이었다. 다음 순간, 시현 자신의 모습이 꺼뜨린 초를 대신하고 있었다. 힘없이 쓰러진 채 눈물을 흘리고 있는 '나 자신'. 평생에 걸쳐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나약한 모습을 보인 건 드물었다. 팔다리를 움츠린 채 흐느끼던 시현은 머리를 움켜쥐며 지면에 얼굴을 박았다. 이미지가 어지럽게 엉클어지고, 혼돈이 공포의 영역으로 기어가는 가운데 꿈은 끝났다.


"허억..하아..하아.."


거친 숨소리가 흘러 나온다. 지난 수년 동안 잠에서 깨어난 시현을 맞이하는 건 고요한 침묵 뿐이었다. 이마에 흥건히 땀이 배어 나와 있다. 흉몽이로군. 시현은 쪽방을 나와 냉장고에서 찬 물을 한잔 꺼내 마셨다. 시간은 새벽 두시. 아직 일을 시작하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체력을 비축하는 것도 일의 연장이야.' 밖에 나가 한 바퀴 달릴까 하다가 다시 눕는 시현. 잠은 달아나 있었지만 눈을 감고 마음을 안정시킨다. 하룻밤 흉몽에 몇 시간이고 괴로워 할 만큼 무른 성격은 아니었으니까.


아침에 자주 들르는 운전수 지수 아저씨에게 야채 식빵을 팔고 따뜻한 카페 라테를 건냈을 때. 지수 아저씨는 걱정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설기가 달리기를 시작했어."


지수 아저씨는 아내를 잃고 딸과 단 둘이 살고 있었다. 설기는 지금 초등학교 6학년. 이전에 공부는 안하고 매일 티브이만 본다며 아저씨의 애를 태우는 외동딸이었다.


"지난 번 아는 언니가 달리기 시합에서 일등한 걸 보고 학교에서 하는 육상 훈련을 받고 있어. 엄한 바람만 들어서 시간낭비나 하지 않을까 걱정이야."


"아직 어린 걸요. 운동을 하면 체력은 키울 수 있을 테니 너무 걱정 마세요."


"그럴까..? 그러면 좋겠네. 커피 고마워. 오늘 하루도 수고 해."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는 두 사람. 설기에 대한 이야기는 잠깐의 화제로 끝나지 않았다. 그 이후로 시현은 새벽 여섯 시에 새벽 빵을 만드는 시간, 창밖으로 달리기 연습을 하며 지나가는 설기를 볼 수 있었다. 자세는 보잘 것 없었지만 나름 진지한 눈빛. 다음 날도, 그 다음 날에도 설기는 운동복 차림으로 열심히 달음박질 쳤다. 재능이 있는지 점차 움직임의 정석을 구현하는 것이 보인다. 수업이 없는 토요일 아침에도 연습하는 걸 본 시현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하나 타서 설기를 불러 세웠다.


"아침 공복 운동 전에 아메리카노 한잔 마시는 건 괜찮아."


"감사합니다."


설기는 시현의 부름에 선선히 왔지만 계속 제자리 뛰기를 하며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인체의 운동 원리를 정확히 알고 있는 시현은 학교에서 받는 훈련에선 누락되기 쉬운 몇몇 유의점을 가르쳐 주었다. 폴짝거리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설기. 몇 주일 안되어 설기는 시현이 가르쳐 준 대로 하자 훨씬 다리가 덜 아프고 호흡도 길어짐을 느꼈다.


"빵 아저씨도 운동하셨어요? 아저씨가 하라는 대로 하니까 기록이 훨씬 단축됐어요. 아저씨 어깨는 넓지만 체격이 왜소한 것 같은데.."


"운동을 좋아해. 설기도 운동이 좋니?"


"달리면 기분 좋아요. 몸을 움직이는 게 티브이만 보던 때보다 훨씬 상쾌하고요. 그리고 운동 잘하면 특기전형으로 대학교도 갈 수 있다고 해서요."


"이제 초등학교 6학년인데 거기까지 생각하다니. 기특하구나."


"열심히 해서 장학금까지 받을 거예요. 우리 아빠 혼자서 고생하는데 저 때문에 부담갖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단거리로 나갈 거니?"


"중거리요. 800m가 제 지구력으로 볼 때 딱 맞는 것같아요."


"체력 관리 잘해야 할거야. 근육 운동도 해주고 보조로 줄넘기도 괜찮을 거란다."


"고마워요. 아저씨."


 계속 제자리 뛰기를 하면서 말해도 호흡이 길어 큰 무리가 없어 보였다. 재능이 있어. 장래가 기대되는걸. 이후 시현은 신선한 즐거움을 느끼며 아침마다 설기의 연습을 바라보곤 했다. 한달 정도 후 지수 아저씨가 작은 과일 한 봉투를 가지고 찾아 왔다.


"이거 별거 아니지만 받아 둬. 시현 씨. 과일은 먹지?"


"아주 잘 익었군요. 감사합니다."


"우리 설기가 실력이 금방 금방 는다고 학교에서 소문이 자자해. 지난 번 작은 대회에서 아주 잘 뛰었거든. 시현 씨가 조언해준 덕분이야. 커피도 줬다면서. 정말 고마워."


"아저씨가 계시기에 설기가 걱정없이 달릴 수 있는 겁니다."


지수 아저씨는 소년처럼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시현의 무뚝뚝하지만 부드러운 언행이 마음에 닿은 걸까. 몇몇 가족에게만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꺼내는 사이 눈가에 물기가 어리었다.


"설기 엄마가 죽고 1년 되던 날..이웃집에서 설기 엄마가 작년에 주었던 김치라면서 들고 왔어. 차마 먹을 수가 없었다고 하더라고. 그 김치를 조금씩 꺼내 먹다가 마지막 찌개를 끓이면서 얼마나 울었는지..이젠 나도 김치 잘 담궈. 하늘 나라에서 만나면 설기 엄마한테 밥상을 차려주고 싶어."


"부부는 다시 태어나도 부부라 합니다. 현재를 후회없이 보내도록 하세요. 설기를 위해서라도."


"그럴까..그래. 그렇겠지."


지수 아저씨를 보내고 시현은 냉장고에 과일을 넣어 두었다. 시현의 식생활에서 과일은 큰 사치에 해당했기에 부자가 된 듯한 기분까지 들었다. 의외로 시현은 당주 시절에도 소박한 식사를 했다. 돈 걱정 따윈 생각해본 적도 없었지만 당주 시절 시현은 하루에 두끼. 식물성 단백질 식품과 살코기, 채소를 주로 먹어 지금과 별 다를 바가 없었다. 그렇게 철저히 육체 관리를 하며 강함을 유지했기 때문일까. 타인에게 관대하고 이해의 영역을 넓히는 모습은 실제 나이에 비해 더 원숙한 것이었다.


'빛나는 나무' 주변엔 입소문난 맛집이 꽤 많았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노점 음식도 아주 훌륭한 수준이었고. 가끔 퇴근한 예성이 시장을 어슬렁거리며 야식 사먹는 걸 본 적이 있는데, 그 덩치를 유지하기 힘들다 떠들듯 못 먹는 거 없이 십인분 양의 음식들을 입 속에 밀어넣곤 했다. 그러면서 시현에게 각 음식의 맛을 정확하게 평가해줄 때는 꼭 맛집을 취재하는 리포터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보통 음식을 먹어본 기억조차 얼마 없는 시현이었지만 확실히 자신이 자리 잡은 상가와 시장은 먹거리 천국이란 별명에 부합한다 생각하고 있었다.


오전 열 한시쯤 반죽을 치고 있을 때 찾아온 아가씨 손님은 딱 봐도 여행객처럼 보이는 차림을 하고 있었다. 여러 종류의 식빵으로 꽉 들어찬 '빛나는 나무'를 이리저리 둘러 보고 이따금 냄새를 맡는 모습이 무척 자유로워 보인다.


"저 야채식빵 하나 주세요. 그렇게 맛있다면서요?"


테라스 자리는 마침 비어있는 참이었다. 시현이 산미가 강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내려주자 눈에 띄게 기뻐하는 아가씨. 당장 할 일이 있었기에 시현은 이야기를 나눌 틈은 없었다. 자리에 앉은 아가씨는 식빵을 찢어 먹으면서 다이어리를 꺼내 뭔가를 확인하는 눈치였다. 밝은 표정을 보면 고민거리는 아닌 듯 싶었지만 꽤나 중요한 일 같아 보인다.


"이 근방에서 추천해 주실 맛집이 있으신가요?"


거의 한 시간에 걸쳐 야채 식빵과 커피를 모두 먹어치운 아가씨는 시현이 한가해지길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이곳 시장과 상가 음식 모두 맛있어요. 노점도 좋으니 들고 다니시면서 먹기 좋을 거예요."


"제가 매운 것하고 진한 맛을 특히 좋아하는데 그런 곳 아시나요?"


시현은 예성이 가르쳐준 맛집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 다이어리에서 빈 페이지 좀 펼쳐 주세요." 연필을 들고 나와 간략하지만 정확한 약도를 그려가며 시현은 아가씨가 원하는 식당과 노점을 표시해 주었다. 아가씨는 어린 아이처럼 손뼉까지 치며 기뻐했고 밤식빵을 하나 사서 들에 짊어진 백팩에 넣었다. 가게를 나서기 전 애교있게 윙크하며 인사하는 모습이 순수해 보인다.


"이탈리아 여행 갔을 때 들었거든요. 그 동네에 대해 알고 싶으면 미용사나 바리스타에게 물어 보라고..이곳은 빵집이지만 사장님이 내려 주신 커피가 너무 맛있어서, 여쭤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약도까지 그려주시고 정말 감사해요."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래요."


활발한 사람이로군. 마침 점심 시간이 되어 시현은 작업실 한켠에 서서 식사를 했다. 평소처럼 아무 맛도 없는 음식을 꼭꼭 씹기를 반복. 오분 만에 식사를 끝냈을 때 예성과 간호사 아가씨들이 찾아 왔다. 오늘 따라 식빵을 다른 종류로 세개나 사서 먹었다. 예성은 야채 식빵의 반을 뜯어 우물거리며 시현과 이야기 나눈다.


"오늘 재미있는 손님이 왔어."


"시비 걸었어?"


"아니, 맛집 여행하는 아가씬 가봐. 어디가 맛있냐고 물어 보더라고."


"그럼 나한테 와야지. 왜 빵집에서 맛집을 물어 봐."


"상식적으로 치과에서 맛집을 물어볼 일은 없을 것 같은데."


"그건 그렇군."


예성은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벌써 손에 들고 있던 빵을 먹어치웠다. 간호사들이 펼쳐놓은 식빵에까지 손을 뻗는 걸 보며 시현은 대단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저녁, 가게를 정리하는 사이 낮의 아가씨가 컵밥을 먹으며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미인은 아니었지만 사랑스러운 매력이 느껴지는 여인이었다. 시현을 알아본 아가씨는 먼저 말을 걸었다.


"닭볶음탕이랑 돈코츠 라면 진짜 맛있게 먹었어요. 닭볶음탕은 이인분을 혼자 다 먹었는데도 더 먹고 싶더라고요. 감사합니다. 일찍 문 닫으시네요?"


"예. 여덟시 전엔 문을 닫는 편이예요. 맛있는 거 많이 드셨나요?"


"추천해 주신 것 말고도 다 맛있었어요. 죽네 사네 결정하는 수술 받기 전에 추억 여행 온건데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아가씨의 얼굴은 아주 밝았다.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즐거움을 조금이나마 느끼고 싶었던 기구한 사연을 구구절절 늘어놓지는 않았다. 다만 기쁨을 힘겹게 끌어낸 억지 웃음을 짓는 느낌이 시현에겐 전해지고 있었다. 시현은 '친절한 사람'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으며 하룻밤 묵기에 좋은 인근의 모텔을 가르쳐 주었다. 아가씨는 연신 고마움을 표시하며 활기 넘치는 시장 거리를 향해 나아간다. 시현은 그 뒷모습을 잠깐 바라보다가 '오늘은 제대로 수련하자.'가게 안의 방으로 돌아갔다. 부디 아가씨 손님의 기쁨이 추억으로 남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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