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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림자 Feb 16. 2021

반려견을 보낸 후에

다시 나에게로 온다면...

니나의 온기가 사라진 지 벌써 46일이 되었다. 안락사를 결정하기 한두 달 전부터 니나는 많이 힘들어했었다. 나는 니나를 내 품에 안고 거실을 왔다 갔다 하면서 그 온기를 내려놓기 싫어 니나에게 조금만 버티어달라고 기도했더랬다. 나중에서야 그런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깨닫게 되었지만. 사실 작년부터인가 나는 늘 마음속으로 니나가 없을 빈 공간에 대해 마음으로 연습하고 또 연습했었다. 하지만 막상 점점 그 시간이 다가오자 나는 너무 두려웠고 니나가 없는 그 공간의 부재가 무섭기까지 했다.      


‘제발 조금만 더 버텨주면 안 될까?’

 지금 생각해보니 니나는 힘든 순간에도 무던히도 버텨준 것이었다. 17살의 생애를 넘기고 18살을 맞은 이틀 후 까지 힘들게 내 곁을 지켜준 것이다. 새해 다음 날, 나는 결국 너무 힘들어하는 니나의 모습을 볼 수 없어 병원에 전화를 걸어 안락사를 예약하고 병원으로 향했다. 그 기억을 다시 떠올리자니 눈물이 앞을 가리고 열심히 봉해놓았던 슬픔의 상자가 다시금 복받쳐 오른다.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이런 의미일까? 가슴속 어딘가에 니나의 모든 것이 살아서 숨 쉬고 있는 느낌이 드니 말이다.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그 귀여운 모습으로 내 품에 안겨 재롱부렸고, 성견이 되어갈 무렵, 3대 지랄견 중에 하나라는 코카스패니얼 종자라는 오명으로 말썽 피우고 정신 산만했던 과정을 어김없이 보여주었다. 이후에 고상한 숙녀견이 될 때까지 니나의 모습은 사진의 파노라마처럼 내 기억에 각인되어 있다. 니나와의 추억은 내가 살아온 17년의 세월의 기억의 대부분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일했던 나는 니나를 오전에 동물병원에 맡긴 채 출근을 했었다. 3시간 정도 걸리는 강아지 미용 때문이었는데, 미용이 끝나면 둘째 아이가 방과 후에 병원에 들러 니나를 찾으러 가기로 약속을 한터였다. 한참을 수업을 하고 있는 데 무음으로 계속 전화벨이 울렸다. 언뜻 보니 전화번호가 동물병원이었다. 무슨 일로 전화를 했을까 궁금했지만 쉬는 시간까지 겨우 참고 병원에 다시 전화를 했다. 전화 너머로 들리는 다급한 선생님의 목소리는 나를 지옥으로 빠트리기에 충분했다. 미용 후에 누군가 병원 문을 열어놨는데 니나가 그 틈에 문 밖으로 탈출을 했다는 것이었다.

 “뭐라고요? 니나가 병원 밖으로 나갔다구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온갖 불길한 상상으로 미쳐가기 직전이었고 그런 탓에 수업을 어떻게 진행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였다. 동물 병원 밖은 바로 찻길이라 너무 위험했고 설령 니나가 혼자서 집을 찾아간다고 하더라도 집에 아무도 없기에 길을 잃어버리기 너무도 쉬운 그런 상태였다. 마음이 바싹 타올라 수업을 10분 정도 일찍 끝내고 나는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그 당시는 수도권에 위치한 학교라서 집까지 2시간 넘게 걸렸다.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나는 딸 하나 잃어버린 사람처럼 눈물범벅으로 최악의 상상까지 하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뭐라고 해야 할 거 같아서 아이 학교에 전화를 걸어 담임선생님께 부탁해서 아이를 조퇴시켜달라고 했다. 다행히 반려견을 키우는 여자 선생님이어서인지 내 맘을 잘 이해해주고 아이 조퇴를 허락해주신다고 했다. 아이에게는 집 근처 공원에 가서 니나를 찾아보라고 했다.

차로 서울 근처에 도착했을 무렵에 동물병원에서 다시 전화가 왔다. 천만다행으로 공원 근처를 배회하던 니나를 본 어떤 아주머니께서 니나를 데리고 병원으로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미용을 끝낸 니나의 모습이 유기견 같지 않아 보여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병원에 먼저 들렀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나는 또 울었다. 너무도 고마운 분 덕에 니나를 무사히 찾을 수 있었기에 나도 모르게 안도의 눈물을 흘린 것이다. 만약에 그때 니나가 잘못되었거나 영원히 찾지 못하는 상황으로 까지 갔더라면 나는 어땠을까? 상상하기도 싫은 상황이 벌어졌을 것 같다.

살면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몇 가지 약속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자신의 미래나 다짐에 대한 약속도 있을 것이고 가족이나 다른 사람과의 약속도 있을 것이다. 나는 니나를 데리고 올 때 스스로에게 약속한 것이 있었다. 그건 어떤 경우라고 니나의 마지막을 지켜줄 거라는 다짐이었다. 니나를 키우기 전, 첫 반려견을 끝까지 책임지지 못한 아픈 기억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는 건 내게 작지만 아주 큰 의미이기도 했다.

니나가 내 곁을 떠난 후, 니나에게 미안했던 순간이 너무도 많아서 내 눈물의 절반은 그 이유 때문이다. 그나마 내가 나를 위로할 수 있던 것은 니나의 마지막을 지켜주고 잘 거두어줬다는 위안 때문이다. 그 위안은 니나를 위한 것이 아닌 나 스스로를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면 니나는 떠나는 마지막 순간도 나를 위로해주고 간 셈이 되어버린다.

반려견에 뭐 그리 많은 에너지를 쏟아붓느냐는 질문도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니나는 18년을 나와 함께 동고동락했던 가족이었다. 내가 기쁠 때 같이 기뻐해 주고 내가 슬플 때 기가 막히게 나의 감정을 알고 나를 위로해주었던 최고의 가족이었다. 내 인생의 가장 힘들었던 순간에 내 곁을 지켜주었던 니나를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지금도 나는 혼잣말처럼 떠들 때가 있다.

 ‘니나야, 내 곁에 아직 있는 거지?’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면 다시 내게 올 거지?’

 그래. 지금은 아니더라도 5년 후, 아니 10년 후에 니나의 눈망울을 닮은 강아지를 본다면 나는 다시 내 곁을 내줄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아낌없는 사랑을 줄 수 있을까? 마지막 순간에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사랑을 줄 수 있을까?

그러길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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