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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끼적 Jun 06. 2023

나는 자라서 내가 되었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세상에게

아침을 먹지 않고 잠을 더 잤다. 아침밥은 내가 하루를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침밥을 먹지 않으면 시작되지 않은 하루 속에서 살아가는 기분이 든다. 그런 내가 아침밥을 저버렸다. 아직 적응하지 못한 알바 후, 늦은 저녁밥과 늦은 취침 시간이 그 원인이겠다.


지각은 하지 않는다. 지각하면 서두르지 않는 편이고, 지각할 바에는 가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웬만하면 지각하지 않는다. 늦게 일어났음에도 지각은 하지 않았다. 약간의 청결과 소중한 아침을 포기했을 뿐이다.


구름 위에서 수업을 듣는 기분이었다. 정신은 몽롱했다. 몸에서는 방전을 알리기 위해 온갖 신호들을 보내왔다. 꼬르륵 소리, 약간의 짜증과 먹고 싶은 수많은 음식을 떠올려 집중력을 저하했다. 나는 그 신호들을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 인간은 아니었기에 이를 꽉 깨물고 시계만 쳐다봤다.


수업이 끝나고 누구보다 빨리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정신없음에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길 한복판에서 잠시 방황의 시간을 가졌다. 눈에 와플 대학이 보였다. 키오스크로 메뉴를 살폈다. 결정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먹는 음식이 한정되어 있고, 호불호가 강하다. 새로운 메뉴에 도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실패를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오늘 나의 점심은 누텔라 바나나 와플과 아이스 아메리카노 되시겠다.


와플과 커피를 포장하여 다시 길을 나섰다. 학관에 가려다가 날씨가 너무 좋아서 파라솔이 꽂혀 있는 운동장 옆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바람도 불고, 날도 좋았다. 날씨 좋음에 밖에서 학우들과 대화하며 점심을 먹는 학생들의 대화 소리와 익숙한 배경에 속에 계속 바뀌는 등장인물들, 시원한 여름 냄새와 땀 냄새 그리고 약간의 담배 냄새까지. 미디어에서 그리는 대학생이 된 것 같았다.

잠시 멍을 때린 후, 조심스레 와플의 포장지를 벗겨냈다. 알맞게 녹은 누텔라 잼과 오른쪽을 베어 물면 튀어나올 것 같은 왼쪽 바나나 조각. 이럴 땐 과감한 선택이 필요하다. 입을 크게 벌려 한쪽을 공략한다. 오른쪽 당첨. 바삭한 식감과 달달함이 내 입 속에 스며들어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스물두 살이나 먹고 입 주위가 초코범벅이 되었음에도 부끄럼 하나 없이 행복만 한다. 살짝 어른의 포인트를 더하자면, 달달함을 느끼고 산미 있는 커피로 입가심한 후 그 깔끔함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정도?

신발을 벗고 무릎을 가슴 앞으로 모았다. 팔꿈치로 무릎을 모으고 본격적으로 와플을 먹는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 점심이었다. 오랜만에 그랬다.


배가 불러오니 머리가 일을 하기 시작했다. 배부름과 동시에 카톡 알림음이 울렸다. 단톡방에서 친구들이 각자 방학 계획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인턴을 한다느니, 토익시험을 본다느니 같은..

그 후 자연스럽게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졸업하고 뭘 하고 싶다, 어디에 취직하고 싶다, 어디에 살고 싶다 등 이루어질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소망들에 대해 나열하며 불안을 나눴다. 그리고 그 불안이 배가 됐는지, 반이 됐는지는 모르겠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너무 버겁다. 아침을 먹어도 버거운 하루인데, 아침을 먹지 않은 오늘 하루는 얼마나 버거웠는지.. 고작 아침이 내 하루를 좌지우지하는 마당에 당장 방학에, 내년에, 졸업 후에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나는 모르겠다. 그냥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 오늘의 가장 큰 과제이다.


뭐가 되고 싶었던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런데도 세상은 끊임없이 내게 뭐가 되기를 바랐다. 내가 더 보통의 사람이 되길 바라고, 어디에 소속되기를 바라고, 많은 이들이 선택하는 길을 걸어가길 바랐다. 미래를 꿈꾸길 바라고, 그걸 계획하고 준비하길 바라고, 그 미래가 직업이길 바란다.


나는 아직 스물두 살인데. 나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데. 나는 당장 내일 아침에 뭘 먹어야 할지 고민이고, 내가 내일 해야 할 일을 다 끝낼 수 있을지 걱정인데. 나한테 너무 많은 것들을 요구한다. 나는 커서 내가 되었다. 그리고 더 커서는 약간의 세월을 조금 더 잘 견뎌낸 내가 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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