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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하남 Dec 14. 2022

깡마른 몸에 대한 불편한 찬사

유 퀴즈 온 더 블럭, 아쉬운 문화사대주의와 젠더감수성 문제

작년 가을, 예능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럭>(이하 유퀴즈) 123회에 모델 최현준이 출연했다. 1년이 훌쩍 지나서 이 이야기를 지금 다루는 건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평소 케이블 채널을 잘 보지 않다보니 뒤늦게 재방송분을 봤기 때문이다. 


최현준은 프랑스 패션 브랜드 입생로랑의 모델로 발탁됐다. 한국인 남성 모델 중에 최초란다. 하이엔드 패션계를 장악하고 있는 서구 백인들에게 예외적으로 인정받은 동양인이라는 수식어가 그를 유퀴즈까지 불렀다. 한국인들에게 백인 주류 문화계에서 인정받는 것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타이틀이다.


최현준은 어린 시절 학교폭력을 당했고, 이를 극복하는 수단으로 공부를 선택해 국내 최고의 수재들이 모이는 곳 중 하나인 카이스트에 입학했다. 그리고 갑자기 모델 일을 시작하더니 4개월 만에 입생로랑에 입성했다. 무작정 현지 에이전시의 문을 두드려 성공했다. 방송가에서 가장 좋아하는 만화같은 스토리다.


대중이 좋아하는 소재를 딱 통속 예능의 수준으로 다룬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유퀴즈의 위상과 나름의 사회적 의미를 생각하면 많이 아쉬운 부분이 있다. 비정상적으로 마른 몸을 강요하는 패션계의 악습에 대한 아무런 문제의식이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오히려 찬양했기 때문이다.


최현준은 입생로랑 디자이너 안토니 바카렐로에 대한 썰을 풀었다. 모델을 고르는 기준이 매우 깐깐하기로 유명하단다. 자신의 디자인 의도를 완벽하게 해석해줄 모델은 발 크기도 자신이 원하는대로 갖춰야 했다. 그는 발 사이즈가 290인 모델을 원했고, 처음 섭외된 모델은 발이 작다는 이유로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안토니 바카렐로는 모델들에게 일종의 코르셋을 강요했다. 하지만 유퀴즈는 이에 대해 전혀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발 크기조차 완벽해야" 무대에 설 수 있는 자리에 한국인 모델이 합류했다는 사실만 강조했다. 많이 자랑스러웠나보다.


나는 패션계의 생리는 잘 모른다. 하지만 능력 있는 디자이너라면 발 크기가 원하는 바와 다르다는 이유로 자신의 작품이 저평가당할 수 있다는 걱정은 안해야 되는 것 아닌가. 발 크기와 몸매에 관계없이 착용자가 돋보일 수 있는 디자인을 만들 수 있어야 진짜 능력자가 아닐까.


한편 최현준은 고등학생 시절 공부에 올인하는 과정에서 살이 대폭 빠졌음을 밝혔다. 최현준과, 응원차 방문한 모델 최소라의 몸은 누가봐도 심하게 말랐다. 최현준이 살이 빠지는 모습을 보며 그의 어머니는 제발 공부 좀 그만하라며 우셨다고 했다. 그렇게 살이 빠지는 건 정상적이지 않고 건강이 나빠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아주 예외적인 체질이 아니라면 후유증을 걱정할 수밖에 없는 수준이다. 그들과 같은 몸매를 유지해야 하는 모델 업계에 거식증과 골다공증을 비롯한 온갖 질병들이 횡행하는 것은 전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유퀴즈 제작진에게는 모델들에게 요구되는 극단적인 체중관리에 대한 문제의식도 없다. 


모델들이야 꿈을 이루기 위해 업계 권력자들의 눈에 들려는 노력을 할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몸을 학대하게 되는 것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사회의 시선마저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많이 아쉽다. 자극적인 소재들로 넘치는 예능판에서 그나마 그런대로 청결을 유지하는 유퀴즈의 위상을 고려하면 더욱 아쉽다. 그저 서양 백인들 사이에서 인정받았다는 사실이면 그 모든 모순이 중요하지 않은 것인가. 거식증, 불임, 호르몬 불균형, 골다공증 등 험악한 부작용을 유발하는 미적 기준에 대한 문제제기는 왜 못하는가. 


사실 애초에 모델을 게스트로 초대한 이상 불가능한 기대이긴 하다. 그 사람을 오로지 찬양하기 위해서 불렀는데 그 사람이 몸담은 업계를 비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이야기를 무기로 삼던 유퀴즈는, 코로나 사태를 기점으로 스튜디오형으로 바뀌면서 유명인 화제몰이 토크쇼로 변질됐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유퀴즈에서는 이제 특별한 사람이 아니면 더이상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없다. 


사회가 강요하는 다이어트에 신음하는 여성들을 배려하면, 그냥 깡마른 몸매를 찬양해야만 하는 모델을 섭외하지 않았어야 한다. 오히려 그러한 시선에 맞서서 외모 차별을 극복하고 건강한 몸과 마음을 전파하는 인물을 초대했다면 유퀴즈도 더욱 빛나지 않았을까. 현재의 유퀴즈는 더이상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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