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UJU Feb 06. 2020

고이 걸러 맑고 투명한 물처럼.

2010년 파리의 금요일, 2020년 서울의 금요일.


있잖아. 그런 날 있잖아 왜. 오늘은 무슨 일이 생길 듯 성 싶은.


우연히 찾은 레스토랑에서 입에 맞는 고기절임과 모듬야채를 듬뿍 먹어 배가 든든하고, 종일 걸었지만 컨디션도 쌩썡하고, 공기 중에 떠다니는 분위기가 달큰해서 그대로 하루를 마무리 하기엔 아쉬운 금요일 밤이었어. 그래서 샤워도 다시 하고 공들여 내 맘에 드는 치장을 하고 밖으로 호기롭게 나갔지.


목적지도 분명했어. 며칠 전에 우연히 발견한 세련되고 멋진 사람들, 의도가 들어있는 멋스러운 까페와 레스토랑이 가득해 이 곳의 자정은 어떨까 궁금했던 곳이 있었거든. 이제는 익숙해진 수동개폐 문을 가진 지하철을 타고 두근두근 소개팅을 앞둔 사람처럼 작은 기대를 품고 그곳으로 향했어. 계단을 하나하나 밟아 출구로 올라가며 준비해온 표정을 짓기도 했지. 지하철 역 출구 앞 벤치에 앉아 누구를 기다리는 것 마냥, 그 즈음 핸드폰 대신 항상 가지고 다니던 니콜라이 고골 단편집을 무릎에 올려두고 곁눈질로 사람들을 흘끔흘끔 쳐다봤어.


역시나, 멋쟁이 빠리지앵들이 삼삼오오 모여들고 키가 높고 작은 원형 테이블에 와인잔, 위스키 등 각자의 취향에 맞는 술잔을 앞세워 팔꿈치를 괸 채로 들뜬 목소리로 떠들고 있었지. 어찌나 그렇게 다들 유쾌하고 즐거워 보이는지.


저 중에 내가 속해있는 상상을 해보기로 했어.

 

나는 가장 늦게 나타나 이미 두어잔 씩 술을 비워 술기운이 올라오는 친구들의 환호를 받으며 사이에 앉는거야. 비쥬를 주고 받고, 그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계단을 올라오느라 숨이 턱까지 찼지만 호흡을 고르기도 전에 쏟아내고 있는거야. 친구가 요즘 데이트 하는 상대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는 것을 상대방 입장에서 몰입도 해보고, 직장 상사의 쓰레기 같은 헛짓거리도 욕을 섞어가며 쏟아내. 상상을 하는 것이 어렵진 않았어. 내가 언제나 고국에서 하던 것들 이니까. 그런데 갑자기 문득, 참을 수 없게 서러운 감정이 복받쳤어.


꼭 바람을 맞은 사람처럼 모두가 짝이 있는 그곳에서 나 혼자만 속하지 못하고 겉도는 기분이 들었거든. 그리고 당황스러웠어. 내가 이 먼 파리에 혼자, 그것도 다른 모든 도시는 포기해버리고 오직 이 작은 도시에서 한달 동안 지내기로 한 건 그런 복작거림에서 한발 물러나 오직 혼자 있기 위해서 였는데. 그것을 위해 많은 비용을 치르고 떠나온 이 먼 곳에서 저버리고 싶던 일상을 그리워하다니. 작은 수치감이 일었어. 그렇지만 분명한 건 그때의 나는 거기에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단거야.


누군가 말을 걸어 마지못해 깨어진 나의 고독, 버스에서 졸다가 누군가에 가방이 나를 가격해 잠에서 깨어버렸는데 마침 내려야 할 역이 바로 다음인 것을 알아차린 것처럼, 그렇게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바라고 또 바랬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


파리에서의 나는 어느 곳을 가더라도 지도를 보지 않고 그저 발걸음이 나를 이끄는 곳으로 걷다가 다리가 아파질 때 보이는 노천 까페에 앉아 카푸치노를 주문하고 책을 펼쳐 마음껏 읽었어. 모든 시간과 장소는 나만을 위한 선택이었고 그 찬란한 나날들을 모두 담기 위해 나는 종일 미친듯이 기록을 해댔어. 사진이 아닌 작은 무지 노트에 글로, 그림으로. 사진은 그 장소는 담을 수 있지만 그 공간을 담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거든. 냄새와, 온도와, 귓가에 들려오는 높낮이가 분명한 그 말들을 말이야.


어느 날엔 버스를 타고 가던 중에 우연히 흐르는 노래와 덜컹거리는 나의 몸이, 식빵 한 조각만큼 벌어진 창문 틈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너무 달콤해서 노트를 펴 눈을 감고 펜을 그러쥐고 음악의 선율에, 버스의 움직임에 나풀거리는 선들을 그려 넣기도 했지. 도무지 찾아 낼 수 없었어. 그 감정에 딱 맞는 단어를, 문장을.   


십 년이 지난 지금도 눈을 감으면 선해. 그 때의 나, 나를 둘러싸고 있던 그 모든 감격이. 나는 모퉁이가 전부 닳아버린 그 별모양 무지노트가 나의 서랍장 깊숙한 곳에 있다는 걸 알지만 한번도 그걸 펼쳐볼 생각은 하지 않았어.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야. 그건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작은 의심.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은 과연 그때 느꼈던 ‘그것’과 일치할까?

너무나 진부하고 쓸데없는 잡설로 가득한 낙서장에 불과한 건 아닐까?


두려워 나는.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나의 소중한 기억이 누렇게 바래고 헤진 너덜거리는 종이 쪼가리로 전략해 버릴까봐. 그 찬란한 순간에 지울 수 없는 얼룩을 남길까봐.


그런데 신기하지? 그 금요일 밤. 그날의 감정만은 어제 일처럼 눈에 보일 듯 선명하고 손에 움켜진 신생아의 배설물처럼 뜨겁고 뭉클한 덩어리로 느껴져. 심지어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다 다시 울적해지고 말았으니까.  


우리가 살면서 마주하는 수많은 강렬한 순간 중 어떤 것을 버리고 어떤 것을 취할 지 선택할 수 있을까? 그것을 알 수 있다면, 살아가는데 조금은 다른 내가 될까, 아니면 허무주의에 젖어 아무것도 아닌 내가 될까?


나를 스치는 많은 것들을 그러쥐고 놓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지만 그럴수록 나는 손아래 빠져나가는 모래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무기력한 나를 발견하곤 해. 모래와 가끔 내리는 단비와 단단한 흙이 모두 섞여 진흙탕이 되어버린 나의 작은 호수.


탁해진 물을 아주 가는 체로 고이 걸러 맑고 투명한 물과 또르르 굴러다니는 작은 자갈들만 존재하는 잔잔한 강물로 만들고 싶어. 지나가던 누군가가 목을 축이고, 무료함에 돌멩이를 던지더라도 크게 동요하지 않는, 그저 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그렇지만 공들여 만든 나의 평화로운 호수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면 나는 십 년전 금요일 밤그 날처럼 외로움에 목말라 처연하게 굳어버릴거야.


있잖아, 지금이나 그때나.  나는 여전히 혼자이고 싶고 타인을 사무치게 그리워해.  














작가의 이전글 신도시의 첫인상과 잔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