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벌며 막 사는 것과 백수로 잘 사는 것
# 막 사는 인생
평일 늦은 밤, 출출해서 시원한 캔맥주에 감자과자를 먹었다.
다음날 출근도 안하고 나갈 곳도 없으니 얼굴이 붓든 말든 암씨롱도 않은 백수니까.
나이 먹고는 알콜만 들어가면 조잘조잘 말이 많아지는데
소파에 늘어져 유튜브를 보고 있던 남자친구가 대화에 충실히 응해주지 않고
자꾸 스마트폰만 보길래, 아 뭐하는데, 물었다.
"유튜브 보는데... 엄청 특이한 사람이 있어서 나도 모르게 계속 보고 있어. 30대 여잔데 고시원 실장이래."
"근데?"
"응? 고시원 실장이래. 그렇게 산대."
"근데??"
"아니 왜 이렇게 사나, 궁금해서 자꾸 보게 되는데?" ('왜'라기 보다는 '궁금하다'에 방점)
"뭐, 숙식 제공되는 일자리네."
"고시원 실장 하면 돈을 받기는 받나?? 얼마 안 줄 거 아냐?"
"요새로 치면 재택 근문데 뭐. 돈 많이 안 줘도 뭐, 어쨌든 일은 하는 거잖아."
"아니 근데...(계속 갸우뚱) 자기 입으로도 그래. 막 산다고."
음, 백수인 내 입장에서는 경제활동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나보다 제대로 살고 있는 것 같은데.
10시부터 19시까지 무려 9시간을 회사 사무실에 옭아매는 시스템을 누구보다도 혐오했던지라,
고시원에서 자고, 일어나면 바로 일터고, 내 공간에서 쉬면서 일할 수 있고,
재택근무랑 크게 다를 것 없어 일반 사무직보다 나쁘지 않아 보였다.
돈도 벌고 일도 하는데 그게 왜 막 사는 거지.
"나름 직업인 건데, 본인 입으로 막 산다고 하는 거면, 그 사람이 생각하는 '제대로 사는 것'의 기준이 있는데 그렇게 안 살고 있다는 뜻 아닐까?"
"...(갸우뚱)"
"근데 그래서, 그 사람은 막 산다면서 불행해 해?"
"아니? 일도 열심히 하는데?"
"그럼 막 사는 게 아니네..."
문득 생각에 빠졌다.
그녀는 왜 본인이 막 산다고 했을까.
아마도, 인생의 목표나 계획, 그것들을 달성하기 위한 자기계발, 그런 것들이 없어서?
하지만 그런 '무언가'를 하지 않고 있더라도,
'막'이라도 살면서 즐겁다면,
제대로 사는 길이라 생각하며 한 순간도 진정으로 즐겁지 못한 것보다 잘 살고 있는 것 아닐까.
정말 '막 사는' 건,
어떤 도전도, 모험도, 의욕도 없이 사는 인생 아닐까.
# 잘 살아 보여도 막 사는 것
돌아보니 전 직장에 다닐 때 내가 그랬다.
어엿한 직장에서 해마다 차곡차곡 연차와 경력을 쌓아가고,
매달 꼬박꼬박 월급을 받아 자생하며 일부는 미래를 위해 모아가고,
그게 '제대로 사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그 때 막 살았다.
그저 막연한 미래를 위해, 현실 유지를 위해
매일 아홉 시간씩 내 시간을 지출하고 돈이라는 숫자로 바꿔왔을 뿐
그 곳에는 내 미래를 그릴 희망도, 비전도, 계획도 없었다.
어쩌다 오랜만에 연락한 누군가가 안부를 물으면
"그냥 살아는 있지"라고 답했다.
정말 그렇게 살아 있었다.
돈을 벌어야 하고, 보이지 않는 미래를 걱정해야 하기에,
그 생각 하나로 그저 엉덩이 붙이고 숨만 쉬었다.
그렇게 내 시간 팔아 눈물겹게 모은 돈을 깎아먹으며
'소득 제로' 백수가 된 지 4개월차.
나날의 80%는 아침 7시에 잠들어 오후 3시에 깼다.
어떤 날은 3시에 깨고도 저녁 먹고 또 졸려서, 10시에 책 보다가 잠들고는 새벽 1시에 깬다.
그러고는 또 놀다가, 또 배가 고파서, 빵 하나 먹고 또 놀다가, 오전 11시에 휘청휘청 다시 잔다.
요즘의 내 시간은 하루 24시간은 커녕, '하루' 단위마저 상실된 채,
그냥 졸리면 자고, 졸린데 더 놀고 싶으면 놀고, 먹고 잠만 잤는데 또 배고프면 먹고.
그렇게 흥청망청 흘러가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지금,
제대로 산다.
벌컥벌컥 시원하게 들이켜고 내려놓은 물잔이 잠깐 고개 돌렸다 돌아보면 다시 꽉 채워져있듯,
그렇게 한 잔 가득 꽈악- 채워진 충만한 내 시간을
내가 하고 싶은 것들, 보고 싶은 책과 영화들, 궁금한 것들에 마음껏 써가며 어떤 부담도 느끼지 않는 즐거운 시간들.
느즈막히 부스스 일어나 환기시킨답시고 창문 열어뒀다가,
아- 비 한번 주구장창 오는구나 궁시렁거리며 이 방, 저 방, 창문을 다시 닫고.
오늘도 흐린가보네, 우울하게- 하고 암막 커튼을 제꼈는데
웬걸, 쨍한 하늘이 펼쳐지면 부랴부랴 폴짝 일어나 온 방 창문을 활짝 열고,
정성들여 키우고 있는 초록화분 다섯개를 총총, 창틀에 올려두고.
커튼봉에 걸어둔 풍경이 짤랑, 짤랑, 바람따라 내는 종소리를 듣고.
집구석에 처박혀 있으면서도, 참 웃기게도,
내가 존재한다는게 이젠 제대로 실감이 난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 대화, 직장이라는 타이틀, 직업이라는 의무와 책임
그 모든 걸 다 떠나
아 심오하고 오묘한 우주의 한 시공간에 내가 있구나, 느낀다.
제대로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 시절엔
타인이 주는 불쾌함, 팽팽한 신경전이 주는 피로함, 쏟아지는 단톡 갠톡 업무전화에 바닥난 뇌용량,
내가 '살아는 있다'는 걸 아주 기분 나쁘게 알게는 해주었다.
아, X발 정신없어 죽겠다.(아직 죽진 않았네)
뭐 이 따위의 존재인식.
가끔은 너무 한가로워 구름 속에 있는 기분이 든다.
이렇게 둥둥 떠 있어도 되는 걸까, 싶지만
나는 지금 살고 있다.
남들 보기엔 집 한 채도 없는 게 돈도 안 벌고 밥이나 축내고
시간 아까운 줄 모르고 탱탱 놀고 막 살고 자빠졌다- 하겠지.
시간을 남이 아닌, 돈이 아닌, 나한테만 쓴다는 것.
그 행복감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고 99%는 확신할 수 있다.
딱히 어딜 가지 않아도, 생산적인 무얼 하지 않아도,
내 시간이 오롯이 내 꺼다.
난 막 사는게 아니라 잘만 살고 있다.
# 인생의 한 조각, 잘 살아봅니다
인생은 여러 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한 권의 책인 것 같다.
단편, 단편, 어쩌면 시기에 따라, 혹은 동그란 일일계획표의 한 조각마다, 다른 삶을 써나갈 수 있다.
'제대로 산다', '잘 산다'의 기준이 존재할 수 있을까.
상투적이지만, 인생에 정답이 있을까.
자신에 충실하게, 즐겁게 살았다면
그 시간은, 그 조각은, 그 단편은, 그 자체로 잘 살아낸 것 아닐까.
나와 모두들,
지금 이 계절이, 지금 서 있는 그 조각이,
후에 돌아봤을 때
막 살아 낭비해버린 아쉬운 시간들이 아니기를.
제대로 살기 위해 힘겹게 불행을 버티며 막 살고 있지 않기를.
시간을 다소 흥청망청 써버리더라도, 즐겁게 제대로 살아낸 시간으로 남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