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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아니 Nov 29. 2019

아이들이 없는 세상

#거리에서 쓰다-민식이법 내팽개 친 국회

수 년 전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거나 장애인이 된 어린이들을 취재했다. 기획기사의 일환이었다. 


이미 시간이 흐른 기사에 김모 군, 박모 양 등으로 남아있는 이들을 스스로의 힘으로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어서 관련 단체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았다. 그들이 건네 준 연락처로 나는 어린이에게, 그리고 부모에서 유족으로 처지가 바뀐 어른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참담한 일로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이들을 만나 그 자초지정과 원인, 그리고 심경을 묻는 일은 늘 민망하고 면목 없었다. 그들에게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나는 대부분의 경우 조용히 아무 말 없이 수첩에 그 내용을 받아 적곤 했다. 사연을 다 들은 후에야 끓어오르는 분노와 회의감을 누르고 몇 가지 추가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아이들은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옆에서 천진난만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찾아갔던 사고 현장 중 한 곳은 초등학교 옆 어느 골목길이었다. 


정말 그냥 골목길이었다. 아침에 총총걸음으로 회사원들이 지하철역으로 발길을 재촉하는 길, 오후에 엄마들이 장바구니를 들고 느긋하게 걸어오는 길, 사람도 차도 다니고, 퇴근길 집에 오는 길이면 마주치는 그런 흔한 골목길 말이다. 사고현장은 대로가 작은 이면도로 골목으로 이어지고 그 옆에는 초등학교 담장과 좁은 인도가 있고 그 맞은편에는 허름한 동네 문방구가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그때 만난 초등학생은 그로부터 몇 년 전 그 골목에서 놀다 차에 치었다. 그 사고는 그 조그마한 어린 남자아이에게 치료 불가능 한 장애를 남겼다. 말 그대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소소한 행복을 꿈꾸며 알뜰하게 살림을 꾸리던 아이의 엄마는 그날 이후로 전사(戰士)가 됐다. 엄마는 부주의하게 운전 한 가해자와 싸우고 어떻게든 보험금 지급액을 줄여보려는 보험회사와 싸우고 아이들이 사고를 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이면도로를 방치한 시청과 구청과 경찰서와 싸웠다. 금쪽같은 아들을 비극으로 밀어 넣은 세상의 모든 부조리와 싸우며 가까스로 생계를 유지했다.


지방에서 만난 또 다른 아버지는 딸을 잃었다. 


이번에는 흔히 스쿨버스라고 부르는 통학차량이었다. 어린이집 통학차량이었다. 이제 한창 친구를 사귀고 엄마 아빠와 재미진 대화를 나누는 즐거움을 배워갔던 여자 아이는 통학차량에 치어 죽었다. 그 사건이 벌어진 이듬 해에도, 그 다음 해에도, 그 다음 다음 해에도, 그 아버지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은 죽은 딸이었다. 


그때도 정부는 주요 관계 부처를 모아 합동 회의를 열고 안전대책을 세우겠다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그 호들갑은 시간 지나 허공에 흩어졌고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당시 정부가 배포한 두툼한 보도자료에는 세상 모든 대책이 다 담긴 듯 했다. 아, 그래도 이렇게만 된다면 더 이상 아이들이 차에 치어 죽어나가지 않겠구나, 이것들만 지켜진다면 초등학교 입학도 못 해본 꽃다운 아이들이, 엄마 아빠랑 바닷가 나들이 한번 가보지 못한 고사리손 같은 아이들이 억울하게 죽어 구천을 떠도는 일은 없겠구나, 했다. 


하지만 그 호들갑은 전국의 유치원에, 어린이집에, 학원에, 태권도장에, 학교에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 후에도 일 년에 몇 명씩 아이들은 여전히 차에 치어 죽었다. 정부와 정치인과 공무원이라는 작자들은 마치 기억상실증 환자인 양 수 년 전에 내놓았던 호들갑의 날짜를 바꿔 시민에게 국민에게 또 들이밀었다. 자, 여기 대책이 있습니다. 


김민식 군은 2019년 9월 충남 아산에서 차에 치어 숨졌다. 


당시 겨우 아홉 살이었다. 김민식 군이 비극을 당한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스쿨존이었다. 스쿨존은 학생보호구역이라는 뜻이다. 마땅히 학생을 지키고 보호하고 보듬어야 할 스쿨존은 그 임무를 다하지 못했다. 어른들이 회의를 하고 페인트칠을 하고 표지판을 달아 만들었을 그 스쿨존에서 어른들은 과속으로 차를 몰고 법규를 위반하고 아이들을 살피지 않아 결국 아이들을 죽인다. 


그 김민식 군의 이름을 따서 어린이 교통안전을 강화하자는 법안을 만들었는데 여당과 야당이 패스트 트랙인지 선거법인지를 두고 아귀다툼을 한 까닭에 그 법은 처참하게 버려질 판이다. 여당과 야당은 민식이법을 싸고 다툰 게 아니었다. 민식이법은 처음부터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들의 관심사는 내년 다가오는 총선에서 조직적인 행동을 발휘할 학원 원장들의 표를 잃지 않는 것이었다. 보듬을 자식을 잃은 힘없는 부모들은 뭉치지 못하고 제각각 쓰러져 오열한다. 이날도 국회에서 민식이 엄마는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오열했다. 이 사태의 원인이 된 정치인들은 “대한민국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겠다”는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였다. 민식이를 버리고 대한민국을 지키겠다는 그 언어의 구조와 인과관계를 나는 납득할 수 없었다.


이쯤 되면 사람들은 국회를 쳐다본다. 


사고를 당할 수밖에 없는 위험한 골목길을 방치한 것은 결국 끝에 국회요, 자식을 잃은 엄마들이 넋 놓고 운 곳도 결국 국회다. 그 국회라는 곳에는 300명 가까운 금배지 국회의원들이 산다. 갓 당선된 초선도 있고 재선도 있고 제법 오래 해먹은 다선도 있을 것이다. 4년에 한 번씩 열리는 선거에서 4, 5번 씩 당선된 그들은 국회에서 제법 오래 서식한 존재들인 셈이다. 오래 서식한 그들. 오래 국회에 머무르고 있기에 오래, 옛날이라는 뜻의 한자 고(古)를 쓸 만도 하다. 선거철만 지나면 국민을 개, 돼지로 하대하는 높은 분들이니 놈 자(者)가 예우에 맞다. 그들은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의 고자(古者)들이다. 


아이들이 처참하게 죽어나가는 사고가 매년 연례 행사처럼 열리고, 그 대안은 호들갑으로 끝나는 사태를 수 년 지켜보며 나는 이 고자들에게 중요한 무언가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은 자고로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힘을 내야 하는데, 진실로 아이들을 살릴 대책을 담은 법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럴 힘을 내야 하는데, 이 고자들은 무슨 연유인지 힘을 내지 못하고 있다. 


아, 여의도의 고자들은 힘을 내게 하는 중요한 것이 없구나. 그래서 매년 벌어지는 비극 앞에 그토록 무력하고 흐물흐물 한 것이겠구나. 과연 고자들에게 없는, 사람을 힘내서 일 하게 하는 그것은 무엇일까. 그들은 애초부터 그것이 없었을까, 아니면 금배지를 단 뒤에 후천적으로 없어진 것일까. 묘한 일이다. 그 중요한 것이 있었다면, 이 나라의 가장 어른들이라고 할 그들은 이미 멋들어진 대책을 땅땅땅 의사봉을 두드려 만들어 시행했을 텐데 말이다.


북한이 포를 쏘고 트럼프는 돈을 뜯고 아베는 수출을 끊는 와중에도 우리는 어린 아이들을 살려야 한다. 사람이 모여 이룬 공동체가, 국가가, 제 안에 사는 아이들을 살리지 못하고 죽게 방치한다면 포를 막아도 돈을 지켜도 수출을 다시 재개시켜도 아무 의미가 없다. 그것을 이뤄내지 못한다면 포가 날아들지 않는 안전한 도시에서 살 아이들이, 지킨 돈으로 이룬 복지국가에서 살아갈 아이들이, 세계 최정상 한국 반도체가 들어간 노트북과 스마트폰을 쓸 아이들이 없다. 그리하여 아이들을 지키는 것은 눈물나게 절실하다.


해야 할 일을 힘을 내지 못해 방치하는 이 고자들을 국민들은 어찌해야 하는가. 


고자들이 일 할 수 있도록, 어린이 안전법을 만들 수 있도록 힘을 모아줘야 하는가, 아니면 힘을 쓰지 못하는 고자들을 싹둑 잘라내야 하는가. 아이 잃은 부모들에게 이런 숙제까지 남기는 여의도의 그분들을 과연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 바짓가랑이를 잡고 울고 불고뒹굴어야 하는가. 아이들을 살려달라고. 아니면 윽박이라도 질러야 하는가. 아이를 잃은 부모는 세상에 하지 못 할 짓이 없다고. 누가 좀 이 고자들의 귓불을 잡아당겨 일갈해주면 좋겠다. 패스트 트랙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지금도 어느 이면도로에서 차가 아이들에게 돌진하고 있고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다고 말이다. 나리들의 자식새끼, 금쪽같은 손주에게도 어느날 차가 돌진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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