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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채원 Feb 27. 2024

생일 선물을 못 받은 마음

나는 가지고 싶은 게 별로 없다. 남편은 나의 이런 점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다. 연애 때부터 지금까지 뭘 사달라며 귀찮게 한 적도 없고 나에게 특별히 돈 쓸 일도 없으니 장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게 늘 장점이기만 한 건 아니다. 특히 내 생일이 되면 선물을 고르느라 골치가 아프다.  


생일 선물로 특별히 받고 싶은 건 없지만, 생일인데 그냥 지나가는 건 또 싫다. 남편도 내 생일을 챙겨주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뭘 선물해도 크게 기뻐하지 않을 것 같으니 고민이 많다. 게다가 남편과 나는 취향이 완전히 달라서 남편이 골라온 건 그게 무엇이든 99%의 확률로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내 생일 선물을 내가 직접 골랐다. 내가 고른 것들은 그날이 생일이 아니었어도 꼭 사려고 했던 것들이었다. 예를 들면 장바구니에 넣어둔 책이라던가 마침 떨어진 화장품 같은 것들 말이다.


아무리 고민해도 사야 할 게 떠오르지 않는 해에는 편지를 써달라고 하기도 했다. MBTI가 TTTT는 아닐까 싶을 정도로 파워 T인 남편의 묵직한 팩폭이 여기저기 담긴 편지를 읽은 후로 다시는 남편에게 편지를 써달라는 말은 안 한다. 처음 만났을 때는 성격이 엉망진창이더니 같이 살면서 조금씩 착해지는 것 같아서 다행이라는 둥, 건강이 염려되니 살을 빼는 게 어떻겠냐는 둥, 분명 생일 축하 편진데 그 목적은 까맣게 잊고 진심만 가득 눌러 담은 편지에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던 그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올해도 어김없이 내 생일이 찾아왔다. 뭘 사야 할지 모르겠다는 남편에게 나도 더 이상 고민하기 싫으니 현금으로 주라고 했다. 나중에 필요한 게 생기면 알아서 사겠다고. 남편은 생일 선물을 현금으로 주는 건 성의도 의미도 없어 보인다며 내키지 않는다고 했다. 오호, 이번 생일에는 진심과 팩폭 대신 성의와 의미를 눌러 담으려나 보지? 살짝 기대해도 될까?


생일 며칠 전, 택배가 도착했다. 흔한 황토색 택배 상자가 아닌 흰색 바탕에 알록달록 풍선이 잔뜩 그려진, "It's party time"이라는 글자가 크고 요란하게 써진, 누가 봐도 파티용품을 담은 상자가 현관문 앞에 놓여있었다.


"파티용품 샀어?"

"어떻게 알았어?"

"상자 좀 봐봐. 우리 집 파티한다고 동네방네 광고하는 수준이야."


나름 서프라이즈 파티를 준비하려던 남편은 시작도 전에 나한테 들켜서 김이 빠진 것 같았다.


드디어 내 생일, 서프라이즈는 이미 망했지만 남편은 거실에 풍선을 장식할 동안 자리를 비켜달라고 했다. 날은 춥고 귀찮았지만 패딩을 챙겨 입고 집 앞 도서관에 다녀왔다. 남편과 아이들이 한 시간 정도 정성껏 꾸민 거실은 두서없고 엉뚱하면서 화려했다. 남편이 주문한 풍선이 천장에 둥둥 떠다니고 "HAPPY BIRTHDAY" 풍선이 거실창에 붙어있었으며 테이블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인형과 장난감이 가득 있었다. 촌스러운 장미 장식이 올라간 초코케익을 보고 살짝 인상을 찌푸렸더니 시크릿쥬쥬 초코케익을 사자는 아이들과 평범한 생크림케익을 사자는 남편이 서로 한 발씩 양보해서 고른 케익이라는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자신들의 작품이 꽤나 만족스러운 것 같은 표정의 남편과 아이들을 보며 차라리 시크릿쥬쥬가 나을 뻔했다는 말을 꾹꾹 눌러 삼켰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선물이 보이지 않았다. 선물은 어딨 냐고 묻자 남편이 또 명쾌하게 설명해 줬다.

"여보 성격이 너무 까탈스러워서 선물을 못 고르겠더라. 그래서 선물은 없어 ^^"

선물을 준비하지 않고도 미안한 기색은커녕 해맑은 표정으로 내가 까.탈.스.럽.다.니. 어이가 없었다. 설령 내가 까탈스럽다고 생각했더라도 굳이 그 말은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내 남편은 항상 이게 문제다. 은폐나 축소 따위는 모르는, 꾸밀 줄도 모르고 돌려 말할 줄도 모르는, 오직 투명하고 솔직하고 직설적인 화법만 구사한다는 것. 이 화법으로 여러 번 나를 놀라게 하고 화나게 했음에도 반성의 기미는커녕 솔직한 게 죄냐며 큰소리만 떵떵 친다.  


나는 늘 남편에게 당부한다. 솔직한 것도 좋지만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은 하지 말라고. 못생긴 사람한테 굳이 못생겼다고 알려주면서 기분 나쁘게 할 필요 있느냐고 말이다. 그러면 남편도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사실을 말한 것뿐이니 감정을 담지 말고 그냥 받아들이라고. 누가 못생겼다고 말하면 그냥 인정하면 되지 기분 나빠할 필요가 있느냐고. 이렇게 우리의 대화는 항상 평행선을 달린다. 아마도 우리는 평생 접점을 찾지 못하고 서로를 신기해하며 살아갈 것 같다.  


나는 까탈스럽기만 한 게 아니라 옹졸하기까지 해서 그날 이후 며칠 동안 까탈스러운 내 성격을 앞세우며 남편을 괴롭혔다. 남편이 무슨 말만 하면, "글쎄, 나는 까탈스러워서 잘 모르겠네.", "내가 좀 까탈스럽잖아. 그래서 이건 좀 마음에 안 들어.", "까탈스러운 내 생각엔 그건 좀 아닌 것 같아." 하면서 모든 일에 딴지를 걸었다. 남편은 자신의 입에서 나온 '까탈스럽다'에는 당당했지만 내 입에서 나오는 '까탈스럽다'에는 안절부절못했다. 결국 이제 그만하면 안 되겠냐며 애원하다시피 하길래 승리자만 지을 수 있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너의 죄를 사하노라."고 답했다.


 나는 생일 선물을 준비하지 않은 남편을 용서하며 한 번의 기회를 더 줬다. 4월에 결혼기념일이 있으니 그때는 서프라이즈 파티도 선물도 잘 준비해 보라고 했다. 작년 결혼기념일에 '80년 같은 결혼 8주년'이라는 솔직하고 과감한 멘트를 썼던 일을 상기시키며 다시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할 것이라고 경고도 했다. 남편은 그동안의 실수를 만회할 마지막 기회를 잡은 사람답지 않게 표정이 어두웠다. 나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웃어! 웃으라고!"

남편이 앞니를 드러내며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웃으면 복이 온다는데 결혼기념일에는 복이 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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