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난이도 최상인 날들
오늘 저를 만난 건 비밀로 해 주세요.
그는 거듭 당부했다.
"그럼요, 제가 누구한테 얘길하겠어요."
집에 와서 생각하니 이런 우연의 장난을 글로 남기지 않고는 못 베기겠다. 그래, 그가 비밀로 해 달란 건 '오늘', '저를' 만났다는 사실이니까 내가 '얼마 전'에 '누군가'를 만났다고 떠드는 건 괜찮지 않을까? 용기를 내어 글을 써 본다.
우울감이 심해졌다. 혼자 있고 싶었다. 평일이라 멀리 떠날 수도 없었다. 모텔이라도 찾아보자고 검색을 하다 숙박 26,500원짜리 방을 발견했다. 내 정신 건강을 위해 이정도 지출은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빠르게 짐을 쌌다.
모텔은 텅텅 비어있었던 것 같다. 알아서 룸을 업그레이드 해주셨다. 지나치게 저렴한 방에 들어갈 때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든다. 문을 열면 싸구려 기운이 해일처럼 넘쳐흘러 내 오감을 공격할 것 같다. 카드키를 찍고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담배 냄새 조차 안 나는 깔끔한 방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일단 잠옷으로 갈아입고 누워서 잤다.
한기가 느껴져 잠에서 깼다. 8시쯤 되었으려나. 저녁을 먹고 자야겠다는 생각에 주변을 검색하니 바로 앞에 해장국집이 하나 있었다. 해장국 집에서 혼밥하며 반주 한 잔, 완벽한 계획이었다.
제법 넓은 가게 내부는 텅 비어있었다. 주인 아주머니 혼자 뉴스를 보고 계셨다. 아무도 없는 가게는 선뜻 들어가지지 않는다.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왁자지껄 회식 하는 고깃집, 그리고 그 옆에 또 고깃집, 이미 마감한 분식집, 망한 건지 휴무인지 알 수 없는 돈까스 집, 식탁에 바퀴벌레가 기어다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외관의 백반집, 그리고 돌고 돌아 다시 그 해장국집. 어쩔 수 없었다. 나는 해장국 집에 들어갔다.
다른 손님이 들어와도 눈이 마주치는 일이 없게 벽을 보고 앉았다. 앉고보니 벽에는 커다란 거울이 붙어 있었다. 밖에서 봤을 때 가게가 유난히 넓어보이는 게 그 때문이었나보다. 해장국에 소주 한 병을 비웠는데 어쩐지 아쉬웠다. 두 병째 소주를 꺼내왔을 때 남자 손님 한 명이 가게로 들어왔다. 그는 나의 뒷 테이블에 나와 같은 방향을 보고 앉았다.
한참 먹고 있는데 거울 속 그가 옆구리를 오른쪽으로 쭈욱 늘이며 "혹시?"하며 말을 걸었다. 뒤를 돌아보았더니 내 뒤의 그는 "그.." 하며 나를 아는 척 했다. "아!" 생각이 났다. 죽을 때까지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인간 top5 안에 드는 사람. 하필 그를, 낯선 동네에서, 손님 없는 해장국 집에서, 서로 혼술을 하다 만나다니 내 인생 난이도 역시 장난 아니다.
나였다면 알아봤어도 모른 척했을텐데 그는 왜 먼저 말을 걸었을까? 우리는 취기를 빌려 합석까지 해서 그 옛날의 싸움을 이어갔다. 웃으면서 조곤조곤 '내 말이 다 맞으니 너는 그렇게 살지마라'를 이어가다 문득 쌩얼임을 깨닫고 "어머 근데 저 화장도 안 했는데 알아보셨네요?"라며 나의 쌩얼 미모를 은근히 자랑하고 또 다시 대화를 이어가다 뜬금없이 "내가 너보다 나이 많은 거 아냐?"라며 나의 동안 미모를 대놓고 자랑했다.
이렇게 두서없는 대화의 엔딩은 블랙아웃. 이미 술을 많이 마신 나는 모텔 잡은 것도 잊은 채 집으로 귀가했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모텔에서 차와 짐을 찾아 출근했다.
그러고보니 그를 만나기 며칠 전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top5 중 다른 한 명을 마주친 일이 있다. 거의 4년만에 마주친거라 '누..구..더..라?' 하는 생각을 하며 3초나 아이컨택을 했다. 이미 지나치고 나서 그가 누군지 떠올랐고 자알~ 지내는지 안부라도 물을 걸 후회가 됐다. 굳이 나에게 말을 건 해장국집 그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을까? 자알~지내고있나보자하고 말을 걸었다가 너무 잘 지내고 있어서 화가 났을까? 잘 모르겠지만 그랬으면 좋겠다. 잘 지내는 나를 보고 배가 아팠으면 좋겠다. 아직도 이런 마음이 드는 걸 보면 나도 참 가여운 인간이다. 그래도 어쩌겠나 이게 나인걸. top5 다섯 명을 제외한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