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채원 Jan 07. 2021

나는 비혼에 실패했다.

어쩌다 결혼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와, 이건 진짜 배신이다."


내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친구들 반응은 이랬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자타공인 비혼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결혼 얘기가 나올 때마다 "결혼? 글쎄.. 그거 꼭 해야 해? 난 결혼 생각 없어."라고 자신 있게 말하던 나였다. 친구들이랑 술이라도 한잔 할 때면 우스갯소리로 "나는 결혼 안 할 거니까 결혼식 대신 마흔 살 생일 때 비혼 축하 파티하자."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입이 방정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건가.

드라마에서 결혼식 장면에 질리도록 나왔던 그 대사, 한 번쯤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신랑 신부는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서로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나는 이 말을 들으면 검은 머리가 파 뿌리로 변하는 기이한 장면을 떠올리며 스스로 물었다.
'나는 저 질문에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을까?'
'만약 맹세까지 하고 결혼했는데 헤어지고 싶으면 어떡하지?'

만남과 이별을 몇 번 겪었더니 더 자신 없어졌다. 눈만 마주쳐도 설레서 천생연분이라고 확신했던 사람과도 결국엔 헤어지지 않았던가. 나에게 결혼은 감당하기 힘든 커다란 책임감과 무거운 부담감이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결혼은 됐고, 연애나 하면서 살겠다고.

혹시 몰라서 나만 아는 예외조항도 만들었다. 만약에 영화처럼 운명적인 사랑을 만난다면, 그러니까 단순히 '좋아한다', '사랑한다', '보고싶다'는 감정이 아니라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사람과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면 그때는 결혼하겠다고. 물론 그런 일은 영화에서나 일어나겠지만 말이다. 결혼을 하게 되더라도 최대한 늦게 하고 싶었다. '아줌마'가 되는 일을 서두르고 싶지 않았다. '아줌마'라는 단어의 어감이 싫기도 했고, 한번 아줌마가 되면 아가씨로 되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스무 살 때부터 자취했던 경험도 비혼을 결심하는데 큰 몫을 했다. 혼자 사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혼자 사는 게 편하고 좋았다. 한 번씩 부모님 집에 가면 20년을 함께 살았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어색했다. 집 안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불편했다. 혼자 살아서 좋은 점은 차고 넘쳤다. 혼자 살면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고 자고 싶을 때 잘 수 있다. 같이 사는 사람이 있으면 먹기 싫은데 먹게 되는 경우도 생기고 자고 싶은데 못 자는 경우도 생기니 불편할 수밖에. TV도 내가 원할 때만 켤 수 있고 원하는 프로그램만 볼 수 있다. 에어컨이나 보일러 온도도 나한테 꼭 맞게 조절할 수 있다. 한여름에 샤워하고 맨몸으로 나와 에어컨 바람에 몸을 보송하게 말리는 일은 혼자 살아야만 누릴 수 있는 엄청난 즐거움이다. 나는 결혼 때문에 이 모든 편안함과 즐거움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결혼 생각이 없다고 말하면 자주 듣게 되는 말이 있다. "결혼 안 한다는 애들이 꼭 일찍 하더라."는 말이다. 결혼을 하는 것도 모자라서 일찍 한다고? 곱씹을수록 끔찍한 말이었다. 그런 말을 들을 때 마다 절대 아니라며 손사레를 치면서도 속으로는 '혹시 내가 결혼을 안하겠다고 말하고 다녀서 오히려 남들보다 일찍 결혼하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찝찝한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지. 나는 서른 살에 결혼했고 결국 그 말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 중 하나가 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나는 비혼에 실패했다. 지금 나는 결혼 7년 차, 두 아이의 엄마다. 예외조항의 조건에 부합하는 일이 생겼냐고? 그러니까 운명적인 사랑 같은 거 말이다. 아쉽게도 아니다. 나는 지금 다시 생각해도 조금 어이없고 황당하게 결혼을 해버렸다. '했다'는 말보다 '해버렸다'는 말이 훨씬 어울리는 그런 결혼이었다. 결혼을 해버리고 나니 비혼주의자였던 과거의 내가 얼마나 현명하면서도 순진했는지 잘 알게 됐다. 비혼을 결심한 건 현명한 선택이었고 고작 TV채널 선택권을 양보해야 할까 봐 걱정했던 건 순진한 생각이었다. 남이었던 사람과 같이 살아보니 그런 사소한 불편함은 불편함 축에도 못 끼는 일이었다. 슬프게도 나는 이제 다시 아가씨가 될 수도, 비혼주의자가 될 수도 없다. 대신 비혼에 실패한 비혼주의 옹호자로서 아직 결혼을 잘 피하고 있는 운 좋은 지인들에게 결혼생활의 고달픔을 끊임없이 전파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그들의 반응은 "너는 해놓고 왜 나는 못 하게 하냐"지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