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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채원 Jan 08. 2021

어쩌다 소개팅

어쩌다 결혼

초등교사 임용고시에 합격하고 3월 1일자로 발령받았다. 내가 발령받은 곳은 집에서 2시간 떨어진 시골 마을이었다. 근무할 학교가 정해지자마자 자취방을 구하러 갔다. 시골 마을에 내가 혼자 지낼 자취방이 있기는 할지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지도를 보니 내가 근무할 곳은 바닷가 마을이었다. 나는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작은 어선이 여러 대 출렁이는 항구, 농작물이 빼곡히 심어진 밭, 그리고 시골집 몇 채가 있는 한적한 어촌을 상상했다. 도착해서 보니 내 생각만큼 깡촌은 아니었다. 동네에는 아파트도 있었고 원룸도 있었다. 마트도, 편의점도 있었다. 커피숍도 몇 개 있었고 심지어 프랜차이즈 커피숍도 있었다. '이 정도면 살 만하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그 동네에 있는 편의 시설을 마음껏 즐길 수 있을거라 생각한 건 착각이었다. 동네에서 마주치는 아이들은 모두 우리 학교 학생들이었고, 동네에서 마주치는 어른들은 대부분 그 가족이었다. 그러니 잠깐 집 앞에 나갈 때도 민낯으로 추리닝을 입고 나가기는 신경 쓰였다. 게다가 마트 사장님도 삼겹살집 사장님도 치킨집 사장님도 모두 우리 반 아이 학부모였다. 내가 가면 괜히 서로 불편할 것 같아 마트도 식당도 잘 안 가게 되고 집에만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연고도 없는 작은 마을에서 나는 금방 외로워졌다.

그러던 4월의 어느 날, 아이들이 하교한 뒤 선생님들과 커피믹스를 한 잔 마시고 있었다.
"이거 신청하면 영화표 두 장 준다는데?"
한 선생님이 이벤트 정보를 공유하셨다. 그러자 다른 선생님이 나를 쳐다보며 말씀하셨다.
"오~ 쌤 이거 신청해. 주말에 남자친구랑 영화 보러 가면 되겠네."
"저요? 저 남자친구 없어요."
옆에서 대화를 듣고 계시던 다른 선생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물어보셨다.
"어머, 진짜 남자친구 없어?"
"네."
"그럼 내가 소개해줄게. 기다려 봐."
평소에 일 처리가 빠르기로 소문난 그 선생님은 내가 대답할 틈도 안 주고 이미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계셨다.
"전화 안 받네. 바쁜가 봐. 예전에 같이 근무했던 선생님인데 사람이 참 괜찮아. 술 담배 안 하고 성실하고. 나이가 좀 많긴 해. 서른다섯이거든. 근데 결혼할 사람으로 딱이야. 가정적인 스타일이거든. 나중에 연락이 오면 알려줄게."

갑작스러운 소개팅 제안에 당황스러웠다. 그 와중에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뭐? 서른다섯? 난 아직 스물아홉인데 서른다섯을 만나라고? 내가 그렇게 별로야? 거기에 초등교사라니. 학교에서 온종일 선생님들이랑 일하는데 퇴근해서도 선생님을 만나라는 거야? 게다가 술을 안 마시면 무슨 재미로 같이 놀아? 결혼할 사람으로 딱이라고? 난 결혼 생각이 없는데?'
당황해서 우물쭈물하다 거절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예의상 만나보기는 해야할 것 같았다. 두세 번 정도 만나보고 나서 나랑은 안 맞는 것 같다고 거절하면 되겠다는 계획을 세운 뒤에야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솔직히 고백하면 나는 그때 남자친구는 없었지만, 동갑내기 썸남은 있었다. 썸남에게 전화를 걸어 이 사실을 털어놓자 그는 크게 웃었다.
"푸하하하하하. 서른다섯? 너무 아저씨 아니야? 잘 놀다 와라."
썸남이 진심으로 놀리는 것을 듣고 있자니 더 침울해졌다. 어쩌다 서른다섯 아저씨랑 소개팅을 하게 됐는지 내 신세가 처량했다.

소개팅 날이 다가오자 우울해서 소주를 사 놓았다. 잠깐 만나고 들어와서 혼술을 할 생각이었다. 너무 기대를 안 하고 만나서였을까.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동안이라 서른다섯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아저씨티가 나지도 않았다. 우리는 밥도 먹고 차도 한잔 마셨다. 안 친한 사람과 같이 있을수록 조용한 걸 못 견디는 나는 쉴 새 없이 말을 했다. 말을 하면서도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이 얘기를 왜 꺼낸 거야?' 싶은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나는 그날 혼자 계속 떠들다 할 말이 바닥났던지 뜬금없이 "저 되게 착해요."라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남편은 그 얘기를 듣고 뭐 이런 여자가 다 있나 싶었지만 안 친해서 그냥 듣고만 있었단다. 남편은 지금까지도 그 얘기를 꺼내며 나를 놀린다. 착하다는 말에 속아서 결혼까지 결심했다나.

다음 날 그가 메신저로 미술 수업 자료를 보내줬다. 덕분에 미술 시간 2시간을 알차게 보내고 환경정리까지 끝낼 수 있었다. 발령받은 지 한 달이 조금 넘은 나에게 8년 차 교사인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였다. 그 이후로 나는 모르는 게 생기면 같은 학교 선생님들보다 그를 먼저 찾았고, 그는 내가 아무리 바보 같은 질문을 해도 다 받아줬다. 퇴근 후 심심하다는 말 한마디면 한 시간 반을 달려와 나랑 놀아주기도 했다. 게다가 주말이면 한 시간반을 달려와 나를 데리고 다시 한 시간을 달려 시골에는 없는 이마트, cgv, 맥도날드, 백화점 같은 곳에 가줬다. 두세 번만 만나고 거절하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사막처럼 메말랐던 내 일상에 그가 뿌려주는 촉촉한 빗물을 내 손으로 을 수 없었다. 그가 있는 삶이 너무 편해서 그가 없던 때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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