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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맷돌 Sep 26. 2023

현재에 우리는 과거와 싸우고 있다

집에서 맞는 기념일

   5월가족행사로 어린이날, 어버이날이 있다.  애들이 어릴 때는 어린이날 나에게 바라는 게 있었다. 선물이다. 나는 여러 종류의 과자를 사서 두 애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큰애와 작은애는 엄마의 선물로 사랑을 저울질했다. 그래서 가위. 바위. 보로 선택의 순간을 주면 즐거운 놀이가 됐다. 더 갖고 싶은 걸 구할 때는 애들끼리 조율을 했다. 5월은 작은애 생일이 있는 달이다. 큰애는 가족생일에 늘 케이크를 사기를 바랐다. 먹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자기 생일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관여를 했다. 그래서 생일은 잊어먹을 수가 없는 행사가 되었다.


   근로자의 날 쉬고 또 7일에 쉬니까 어버이날 전날 엄마를 찾아뵐 있겠다. 작년만 해도 난 한 달에 두 번 이상을 서울과 영종도를 왕래했다.  9호선이 생기기 전에는 가는데 3시간 15분이나 되는 시간 동안 버스공항철도. 지하철, 버스를 갈아탔다. 해가 갈수록 그런 일정은 직장과 병행하기엔 체력적으로 힘에 부쳤다. 9호선 덕에 1시간을 단축하게 됐으니 교통의 발전에 감사한 일이다. 이제는 가는데 2시간 15분, 돌아오는데  2시간 15분,  총합 4시간 30분에 이것저것 먹을 거를 고르고 사들고 가는데 환승버스시간을 고려하면 되는 일이다. 


  토요일 는 날이다. 미리 전날 인 금요일, 일이 끝나는 언니는 자기에게 달려오길 바란다. 저녁에 와서 자기랑 수다를 떨며 쉬길 바라는 언니는 전화를 다. 그러나  입장에선 선뜻 갈 수가 없다. 일정은 단축할 수 있을지언정 피곤함이 더 누적되는 통에 망설여진다. 청소, 세탁, 밑반찬등 소홀히 하면 밀려서 그대로 방치되기 때문이다. 다음날인  쉬는 날 당일치기를 하는 게 속편 하다.


  어버이날 앞날인 7일에 가는 게 맞는 일이지만 작은 애는 일주일 전 외가에 가 있었다. 직장을 잡기 위해 취업을 알아보던 중 자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다행한 일이지만, 내가 더 신경 써야 할 일들이 생겼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5년이 지난 시점에 한집에 병간호하던 오빠네가 들어와 살고 있었다. 복잡한 집안 환경에  낯선 직장생활까지 한꺼번에 맞이하게 된 것이다. 걱정과는 달리 흔쾌히 외가로 갔고, 무던하게 작은애는 외가식구와 살겠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친정엄마를 보기 위해 난 자식도리만 하면 되었는데 이제는 내가 한 지난 일들이 무슨 대가를 바라고 한 일로 보일 것이었다. 이건 우연과 필연이 동시에 발생하면서 엮인 일이었다.


   전에는 빈방이 많은데 썩 하는 거 같아 놀고 있는 자식이라도 살았으면 했던 적이 있었다. 남편은 늘 자기처럼 20대에는 독립해야 된다고 내보낼 구실을 찾았고 그로 인해 난 잡음에 마음이 힘들었다. 한국사회는 자식을 중시하는 풍토고 같이 살기를 바라는 부모들이 많다. 중류층 가정이라면 여유 있게 사회에 준비시켜 자립을 하도록 도와주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아무 준비 없이 학교만 졸업했다고 자본금도 없이 제힘으로 나가라는 거는 무책임한 방임이기 때문이다. 늘 밥을 주고 집을 제공하다가 너는 원래 야생 고양이로 태어났으니 나가서 잘 살을 거야 하고 자신의 귀찮은 속내를 핑계 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들고양이도 손을 타면 다시 야생에서 살아남기 어렵다고 동물관계자들은 말한다.


   아무래도 근로자의  날에 미리 다녀오는 게 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내가 어버이날에 집에 있을 수 있고 작은애가 돌아왔을 때 어색한 분위기를 중재할 수 있겠다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가족 중 스펀지 같은 완충재역할을 한다. 친정에서나 집에서나 한쪽 목소리가 높아지면 중재를 하고 서운해하는 쪽에 이야기를 차분하게 들어준다. 늘 우리는 현실문제에 부닥친 것 같지만 늘 과거에 연연해서 살고 있다. 지난날 서운했던 일이 발목을 잡는다.


   불합리한 일에 발끈하는 게 호기심과 경계심 많은 사회 초년생이다. 작은 애는 집에 있어보니 아빠의 일수거일투족을 다 점검하고 있었다. 나는 일을 나가기 위해 아침부터 바쁘고 다 큰애들을 챙기기보다 내가 먹은 거를 정리하고 나가기 바쁘다. 나를 생각해서 작은 애는 저녁을 준비하고 빨래를 걷었다. 나는 애들에게 명령조로 잔일을 시킨 적이 없다. 기분 내키면 하고 그렇지 않으면 가만히 자기 하고 싶은 걸 하게 내버려 뒀다. 그에 반해 남편은 세탁기를 돌려놓고 세탁물을 널기를 바랐고 마른빨래를 걷어가지 않는다고 나무랐다. 어느 날 작은 애는 집안 청소를 하고 있었다 작은 애는 엄마가 불쌍하다고 말한다. 마음먹고 팔을 걷어붙이고 대든 집안일이 오후 늦게 돼서도 끝나지 않고 있었다. 티도 나지 않는 일을 하느라 하루가 다 갔다며 이렇게 살아온 나를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지나고 보니 작은 애는 결혼이란 것에 대해 생각해 본 거였다. 부모의 집안에서의 역할분담을 통해 미래에 자신이 꾸릴 가정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이다.


   애아빠는 퇴직을 해서 한가했고 나만 발을 동동 구르다 집을 나섰고 귀가 후에는 다시 저녁준비하랴, 세탁하랴, 바빴다. 밥을 먹은 후 설거지하고 안마를 하고 졸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퇴직 후 남편은 경제적 활동을 잠정 중단한 상태였다. 작은애가 고분고분하게 자기 말을 듣지 않는 일로 인해 학비를 알아서 벌어다니라고 했다. 이제 것 부모만 믿고 학교를 다니던 작은 애는 배신감을 느꼈다. 언제는 내가 가고 싶다고 대학을 간 것도 아닌데 은행 대출을 해서 갚으라고 하니 아빠의 의도가 기가 막혔다. 빛을 지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사회 첫 발을 내딛기도 전에 채무를 지고 직장 생활하는 동안 빚을 갚아야 하는 의무를 져야 하기 때문이다. 나 또한 사람일은 내일을 알 수 없는 일이기에 있을 때 도울 수 있는 일은 해결해 주고 싶어 했다. 부부는 갈라서면 남이지만 자식은 끝까지 돌보지 않으면 불행을 떠안고 가야 하는 부채이다. 내가 만일 죽는다면 내 자식은 아빠의 자립이란 표어아래 맨몸으로 사회에 체감온도를 감당해야 할 것이다. 있을 때 문제를 해결하고 뒤로 미루지 않는 게 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와 웃으며 조금은 살갑던 부녀는 이제 휴전선처럼 나뉘었다. 남편은  일, 네 미래는 나와는 아무 관계없다는 폭탄선언은 무리수였다. 더 이상 그 관계에서는 비용을 물을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가족인 줄 알았는데, 여태껏 큰소리치며 혼내고 결정하는 게 아빠였는데, 갑자기 비용 앞에서 태도를 바꾸었다. 입장을 백번 이해하려고 보면 남편은 과거와 싸우고 있다. 자기에 울타리가 돼줄 가족, 디딤돌이 돼줄 가족이 없었다. 이제 떠안아야 할 원가족이 또 만들어지고  남편은 과거의 고생했던 자신의 상처를 보상받고 싶어 했다. 시집살이한 며느리가 더 매서운 시집살이를 시키는 시어머니가 된다고 한말이 틀리지 않았다. 나는 1년이 지나면 졸업이고 제대로 된 급여를 받을 텐데 하는 생각에 작은애가 대학을 관두는 것을 말렸다. 엄마가 다 해결해 줄 수 있다는 확신을 줬다. 내 재력을 보여줬고 걱정을 잠식시켰다.


  그런데 이렇게 다른 곳으로 옮겨간 작은애에게 일이 터졌다. 작은애와 이모사이에 불협화음이 났다. 언니는 큰애를 작은애보다 편하게 생각하는 편이었다. 손이 많이 가는 아이지만 순박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정이 간다고 말했었다. 작은 애가 갑자기 외가를 선택했을 때 나는 이모와 잘 지낼 수 있을까? 하고 마음에 걸렸다. 작은 애 속을 모르겠기에 처음에는 하는 데로 내버려 두었다. 언니는 편견이 있었다. 별로 어릴 때부터 얘기를 나눠보지 않은 사이라 친밀감까지 덜하기도 했었다. 친탁을 한 작은 애 외모까지 언니는 내 눈동자를 닮은 큰애를 더 선호했다.


   어느 날 언니는 작은 애가 버릇없다는 얘기로 전화를 시작했다. 작은애 말버릇에는 나도 이해 못 하는 버릇이 있다. 뭐?, 뭐? 하는 추임새와 억양이다.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다만, 그 말투는 기분이 안 좋거나 마음에 안 들 때 나오는 소리였다. 그런데 언니한테는 가시처럼 목에 넘어가지 않았다. 오빠의 아들에 밥을 차려주고 비위를 맞추는 분위기에 작은애는 자기도 편승하고 싶었을 수 있겠다. 왜. 자기만 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해야 되는지 내게 물었다. 그래도 자기는 할 거 다 했다고 볼맨소리를 했다. 하라는 데로 반찬 꺼내고 밥 뜨고 수저 놓고 밥 먹고 설거지했다고 했다. 나는 이모가 마음에 안 드는 뭐, 뭐 하는 말투에 대해 말했다. 그에 대해 작은애는 부연설명 하지 않았다.


   작은애는 사회 첫 직장이라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견디고 있었다. 안 하던 일을 해서 피곤했다. 귀가 후 혼자 방에 느리게 있고 싶었다. 그런데 조카가 방 두 개를 쓰고 있었고 큰방에서 할머니와 언니, 작은애가 지내게 되었다. 친정에 갈 때면 불편해서 내 집이 더 편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당일로 돌아오곤 했다. 작은애의 습성을 아는 나는 추측이 갔다.  손빨래는 안 하다 하려니 귀찮아서 샤워 후 쌓아놓았을 테고, 드라이하고 있다 보면 어느새 이모가 욕실을 점검했을 것이다. 채근하듯 어이, 빨래하라고 했을 테고 서로 불편해졌을 것이다. 이모는 또 그랬을 것이다. "제는 욕실에 왜 이렇게 오래 있는 거야? 굼띠기는" 하는 말을 내뱉곤 했을 것이다. 작은 애는 낯선 외갓집 생활에서 눈치만 늘었다. 언니는 혼자 시장가는 걸 싫어해서 작은애를 대동하고 가고 싶어 했다. 내가 갔을 때도 시장 가는 게  일과였다. 사람 있을 때 카트를 끌고 빈폐트병을 수거자판기에 넣고 시장을 갔다. 작은애는 직장 다녀온 후 쉬고 싶었을 것이다. 엄마라면  이해해 줬을 일인데 이모에겐 그게 통하지 않았다. 이모가 시장 가자고 하면 쉬고 싶은데 작은애는 말하지 못했다. 피곤해도 내색하지 않고 따라나섰고  짐을 옮기자고 하면 도왔다. 이불을 햇볕에 소독하고 싶으니 옥탑에 널자고 하면 거들었다.  작은 애 생각에 그 정도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고 여겼다. 이모는 집에 있는 조카보다 말은 잘 듣는다고 인정은 했다.


   그런데 언니에게는 다른 면에 스트레스가 쌓이고 있었다. 욕실을 매일 쓰는 작은애 습관을 이해해 주지 못했다. 어디를 나갈 때면 작은 애는 늘 샤워를 했고 드라이는 필수였다. 게다가  외출할 때는 뜸을 좀 들이는 편이다. 아침에는 화장실을 언제 갈지 모르는 엄마와 오빠, 조카까지 있다. 화장실은 하나뿐이다. 늘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니  환풍기 없는 작은 화장실, 창문밖에 없어서 통기가 안될 테고 수증기로 뿌옇게 됐을 것이었다. 머리카락은 치운다고 치워도 타월에서 떨어지는 것만으로도 거슬렸을 테고, 욕조 위에 설치된 사용하지 않는 드럼세탁기는 더 욕실을 쓰기에 불편하게 만들었다. 폼만 잡고 있는 세탁기에 물이 튀지 않게 하라고 이모의 잔소리는 늘었을 것이고 좋은 감정을 갉아먹고 있었다. 애는 왜, 저래. 나 때는 안 그랬는데란 말이 자연히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만 것이다.


   결국 보름정도 지낸 시점에서 작은애는 더 이상 스트레스 쌓여서  나가야겠다고 나에게 전화를 했다. 고시원을 알아보겠다고 말을 했다. 일이 급작스럽게 진행되다 보니 어버이날이 아니라 근로자의 날 전에 이불을 옮기러 같이 친정에 가게 생겼다. 집에 온 작은 애는 토요일 근무를 마치고 왔고 나 또한 일을 하는 날이라 부랴부랴 샤워를 하고 서울로 올라갔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우리는 고시텔에 짐을 부리고 주인에게 계약금을 건네고 영수증을 챙겼다. 12시가 다 돼서 외갓집에 도착한 작은 애와 나는 잠을 잤다. 이미 기분이 어그러진 언니는 옥탑방에서 지냈고 떠돌이 고양이를 데려와 기르고 있었다. 나는 자식일은 내려놓고 언니를 보러 갔다.


  작은 애는 누가 물어보면 고시텔 간다고 하면 돈 지랄한다고 할 거라며, 이모에게 기숙사에 자리가 나서 가는 걸로 해달라고 내게 부탁했기에 나도 그렇게 말했다. 언니는 비용에 예민하다. 애아빠랑 그런 점이 흡사한 측면이 있었다. 낭만적이지 않은 것에 비해 새끼고양이를 좋아했다. 떠돌이 고양이를 위해 사료 8킬로짜리를 살만큼 예외적인 면이 특이했다. 엄마는 고양이를 예뻐라 하지만 우리는 어릴 때부터 가족이 먹는 음식찌꺼기를 모아주기 위해 가축을 키웠다. 그래서 언니의 예외적인 행동은 오빠와 엄마에게 비난을 받곤 했다.


    나는 외롭게 사는 사람들이 고양이를 더 선호한다는 점을 인터넷에서 봤다. 고양이는 개처럼 주인을 따르지 않는다. 귀찮게 집착하면 할퀴거나 문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라 남을 배려할 줄 모른다. 그저 자기가 좋으면 그뿐이다. 어릴 때 아버지는 사료를 지키기 위해 쥐잡이 고양이를 사 왔다. 겉은 예쁘고 부드러워 만지면 기분이 좋아 그르렁 소리를 냈지만, 어느 순간 할퀴고 자기 볼 일을 보러 가는 것이 야속했다. 아주 나쁜 성격의 여자 같은 교활함까지 느꼈는데 고양이에게는 보드라운 털과 나긋나긋한 몸이 치명적인 매력이 있다. 거기에 언니도 흠뻑 빠졌다.


    언니는 작은애가 부탁하는 일을 들어줬다. 손가락마다 관절염이 와서 고생 중이라 쉬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신 실습할 수 있는 팔을 내어 주거나 속옷을 작은애 대신 빨아주었다. 한방에 3명이 살기는 좁은데 작은애는 참고 지내고 있었다. 말은 안 했지만 다들 불편을 감수하고 있었다. 큰애와 휴대폰비와 용돈문제로 다투고 나서 작은애는 노선을 분명히 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내게선 용돈을 받지 않겠다고 했고 아빠한테는 집을 살 거라고 말했다. 부모로서 애들을 그렇게 가까워지게 하려고 했는데 외가나 친가나 가깝게 느끼지 않았다. 내 지분이 있기에 작은애가 바쁜 나 대신 필요하면 기거해도 되겠다 생각했는데 그동안 왕래가 명절이나  갔으니 1년에 2번 보는 게 고작이었다. 주운 고양이를 보러 큰애가 관심 보인 끝에 몇 번 더 갔을 뿐이었다.


   세가 나가지 않는 30년 넘은 3층 건축물에 오빠는 미련이 없었다. 그건 처음 수리를 하기 위해 외벽에 흰색 페인트를 칠할 때 사고 때문일 수 있겠다. 사다리에서 등 쪽으로 떨어지는 사건이 있었다. 의욕이 앞서니 준비 없이 젊음만 믿고 덤볐다 일어난 사고였다. 5년 아버지의 병환에 자기의 거치가 묶인 후 늘 아버지의 아들로 살았다. 밖에 생활대신 휴대폰으로 주식을 보는 일이 유일한 취미정도였다. 병세가 나빠지고 길어질수록 언니가 쉬라며 자기가 아버지를 돌보길 바랐지만 단칼에 잘랐다. 조카가 군생활중 오빠는 방이 없었다. 아버지가 응접실에 기거하면서 아버지에 이어 오빠도 아버지를 보낸 후 응접실에 터를 잡고 산다. 밤늦게 스탠드를 켜고 음악을 듣고 유튜브를  보거나 책을 읽었다. 엄마는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오빠가 화해하길 바랐다. 서로 극을 이루는 띠로 서로를 미워한다는 말띠와 소띠라 서로 안 맞는다고 했다. 오죽 답답했으면 그런 미신적인 것을 믿을까 했지만 나는 아버지가 오빠를 한 번도 칭찬한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이제 누군가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가 된 후 서로 실과 바늘처럼 있는 사이가 아이러니했다. 아버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을까?  엄마는 맏이이자 아들이 마지막으로 기둥노릇을 하길 바랐다. 나중에 유산문재에서도 떳떳하게 기회를 주려는 의도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용돈이나 생활비를 준다고 참을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오빠는 늘 똑같은 일을 하고 같은 곳을 배회하는 묶인 신세가 되었다. 바보가 되고 있었다. 돌아가는 세상을 몰랐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오직 간병인으로 엄마의 지지를 받고 화애애한 대화를 이 이어갔다.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비대해진 몸이 걱정거리였다. 엄마는 늘 건강관리를 하라고 했다. 처음에는 무식하게 걷기를 하루 종일 했다. 발바닥에 물집이 생기고 다리에 쥐가 나게 다녔다. 살이 빠지게 하려고 다이어트를 했다. 고기를 덜먹고 하루 다녀온 얘기를 자랑하듯 들려줬다. 살이  몰라보게 빠지기 시작하자 밖으로 돌기 시작했다. 탁구, 헬스나 걷기로 건강을 챙기는데 주력했다.


    집에  일은 언니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곤 대를 이어 쓰레기를 치우고 앞마당  청소를 했다. 계단은 집 장사가 지은 집이라 가팔라서 오르내리기가 힘들었다. 그 계단을 아버지는 퇴원 후 걷는 힘을 키우기 위한 수단으로 오빠의 부축을 받으며 하루에 한 번은 오르락거렸었다. 지나고 보니 참 힘든 일이었다. 집안에서 식사와 빨래나 시장 보는 일을 언니가 담당했다. 언니의 또 다른 일은 부동산에 방 세놓는 일을 대신하는 일이다. 엄마는 사시는 날까지 셋돈을 받아 생활하는 것에 의지하고 있었다. 엄마가 돌아가시면 오래된 집은 값이 없지만 땅값을 하기에 분명 작자가 나서겠지 하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엄마는 이 집을 사실 때 부모님이 오셔서 좋아하셨다는 말씀과 더불어 엄마가 터가 좋으니 팔지 말라는 말을 했다는 말만 전했다.


   분명 옆집은 비어있었고  활용할 생각이란 말을 언니한테 들은 터라 기대를 했었는데 공사는 지지부진했다. 벌어놓은 돈이 있지만 언니는 60에 더 이상 앞으로 수입이 없을 거란 불안에 조바심치고 있었다. 생활하는데 여러모로 푼돈을 쓰게 되고 재산세를 내고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나는 출가외인이고 서열상 제일 막내였다. 어떤 발언권도 없는 남에 식구였다. 결혼을 한 순간 남 뒤치다꺼리나 하는 삶을 선택한 거라 생각하는 언니에게 난 독립한 여자가 아니었다. 독신으로 살지만 그렇다고 혼자가 아닌 가족하고 사는 삶은 충성을 뜻했다. 가족의 신의를 저버리지 않고 가족밖으로 이탈하지 않는 삶은 나에 또 다른 반대편에 생각을 갖게 했다.


   비혼주의였던 내게 혼기가 꽉 찬 언니는 나의 또 다른 길을 가게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둘 다 가족으로 남을 수는 없었다. 자리가 없으면 자리를 만들어야 했는데 내 설 자리는 미래에 갑갑함뿐이었다. 팔자 좋게 혼자 사는 것은 눈치껏 자리를 비켜주지 않는 구성원이 있는 한 어림없는 길이었다. 돌아가는 꼴이 이러니 나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 집을 나가야겠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쯤 엄마는 언니에게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아버지가 동향분을 만나 그분 자식을 선을 보이려 집으로 데려오고, 이모들이 주선해서 선을 보고, 엄마가 교회에 신망 높은 전도사를 찍어놓고 말을 해도 선을 보고 돌아오면 꼭 상대 남자들의 티끌을 끄집어냈다. 그렇게 어영부영 세월은 흐르고  3년이란 기회가 날아갔다. 엄마는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서 더 늦기 전에 나라도 보내야 마음 편할 것 같았다.


"너라도 가라. 그러다 혼기 놓칠라!"


  나는 모든 여건이 힘든 시기였다. 취업은 나이 때문에 밀리고 있었다. 결혼적령기에 취직했다 기껏 가르쳐놓아 금방 시집갈 거 아니냐는 말을 면접관이 말했다. 취직을 한 후에 계속해서 뭔가 풀리지 않았다. 급여를 주지 않으려고 공사대금을 결산이 오래전 끝난 일인데 내가 잘못한 거처럼 연결해서 받아오게 하고 싸움 아닌 함정을 파는 업주를 만났다. 내가 해보지 않은 경험들이 사회에는 너무 많았다. 잘못하다간 함정에 빠져서 하지 않은 일로 손해배상을 하든, 급여를 떼이든, 여러 가지 수법으로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반푼취급을 받았다. 법원에 재판을 신청할 때는 부모가 있고 집이 있어도 내 힘으로 해결하지 못해서 억울한 일을 당하겠기에 선택했다. 가족한테까지 내 못남으로 피해를 줄 수 없었다. 그럴 때는 법의 보호를 받기 위해 소송을 하는 것이다.


  고교시절 사회시간에 배운 일사부제리 원칙을 믿고 있었다. 한번 재판한 일은 똑같은 일로 재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잘못해서 업주에 권력에 굴복하면 억울일은 내 몫이 되지만 막을 수가 없겠다는 결론이 나면 승부를 걸어야 한다. 나에게 나쁜 마음을 먹었던 사람일지라도 여러 사람들 앞에서까지 꼼수를 부릴 만큼 한낮에 부끄러운 도둑질을 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래서 매스컴에서 부부문제나. 청소년문제, 고부간의 갈등, 데이트폭력등을 상담형식으로 보여주는 프로그램이 느는 건 당연한 결과라고 본다. 개인 간에 갈등은 힘으로 누르고 속이며 살 수 있지만 남들 다 보는데서는 그렇게 비열한 짓을 하는 건 체면이 깎이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언니를 포기하고 나를 선택한 엄마를 따라 맞선을 봤다. 약속장소를 가르쳐준다는 핑계로 언니도 따라나섰다. 나중 안일이지만 중매한 아줌마가 전화 왔을 때 엄마는 고민 중이었다. 언니를 또 선자리에 내보내느니 동생이라도 기회를 주는 게 났겠지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러니 엄마가 언니에게 염증이 나지 않았다면 언니를 선보게 할 수도 있었던 선택이었다. 언니는 유명백화점 호텔에 딸린 커피숍에 가면서 양산도 사야 된다는 핑계를 댔다. 자기가 버린 기회가 어떤지 알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곤 특판행사하는 판매대에서 내게 다가오는 남자를 보고 있었다. 그리곤 집에 쪼르르 달려가선 오늘 본 소감을 늘어놨다. 나중에 엄마에게 들을 수 있었다. 내가 봤으면 다시는 안 만난다는 얘기였다. 엄마는 역시나 자신의 선택이 잘했다고 생각하셨을 것이었다. 또 기회를 차버렸을 테니까.


욕실에 세탁기는  폼만 잡고 있는 상태고 배출하는 호수를 오빠가 치우는 바람에 손빨래를 하고 있는 상태였다. 작은애가 들어간 지 보름이 지난 시점에 옆집을 보여줘서 가보니 창문은 페인트 칠한다고 떼어져 있었고 조카가 원한다고 흰색을 고집스럽게 문짝마다 바른다고 화학약품 냄새가 진동했다. 50만 원 들인 싱크대가 키가 맞지 않아 허리에 맞추느라 다리밑쪽은 나무를 댄 상태였다. 언니는 자기가 부른 사람들이 본인이 없을 때 들이닥치는 바람에 마침, 집에 있던 오빠에게 도움을 청했다. 근데 마음에 안 들게 했다는 말만 했다. 저렇게 했는데 돈을 줘서 보냈다고 격분해했다.

  



  애 사정은 졸업 전에 취업 예정이 있었지만 불분명한 아니,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얼마 있으면 예정된 직장에서 연락이 올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4달이 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다 아무것도 못하고 시간만 보낼 판이었다. 운전이라도 해서 면허를 따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무섭다고 했다. 굳이 싫어하는데 강요를 하면 안 될 일이었다. 그런데 운전이나 다녀볼까? 하고 물어오는 것이었다. 학원을 알아보렴 했지만 또 방에서만 뒹굴뒹굴한다. 코로나 19로 인해 잘 나가던 직장사람들이 잘리는 마당에 작은애의 미래는 불확실했다.


 "학교에서 연결해 준 직장, 확실한 거야? 잘 알아봐, 벌써 네가 졸업한 지 몇 개월째야."


다시 작은애가 노트북을 켜고 인터넷으로 들어가 본다. 한참만에 알아낸 듯 말한다.

"내가  들어갈 수 있는 게 전반기가 아니라 11월이나 12월이래."

"거봐, 잘 알아봤으면 뭐래도 할 수 있었잖니?"

  

작은애 친구가 때마침 해외여행을 가자고 했었는데  이렇게 정보를 모르고 포기했다. 코로나가 걸리거나 여행 후 14일의 격리기간 때문에 아까운 취업의 기회가 없어질까 봐 그렇게 된 것이다.


   근로자의 날, 나는 엄마에게 미리 용돈과 감사 편지를 드렸다. 5월 7일은 직장에 다니느라 타지에 간 작은 애가 집에 와서 카네이션과 찹쌀시루팥떡을 사 왔다. 나는 돌아가는 길에 작은애가 원해서 외할머니에게 드릴 카네이션을 들려 보냈다. 작은애 반찬거리를 준비하느라, 며 칠전부터 장을 봤다. 하느라고 했는데 작은 애는 원하는 거 몇 가지만 가져갔다. 배추 겉절이와 평소에 잘 안 먹는 돼지 안심장조림을 싸줬다. 큰애는 작은 애가 꽂을 사 오니까 케이크를 담당했다.


   5월 8일 귀가하니 큰애가 김치볶음밥을 내가 씻는 동안 준비했다. 후식으로 블루베리 생크림 시폰케이크를 꺼내왔다. 하루 전 미리 저녁에 사놓은 케이크이다.

초를 자기 생일 수만큼 꼽고 어버이가 된 햇수를 기념했다. 자녀들에게 어버이로서 축하를 받았다. 아이들은 20대 성인이 됐고 집에 남편을 위해 나는 아이들을 기다렸다.


   조카는 오빠에게 의자를 선물했다고 했다. 내가 언니에게 저녁식사하라는 돈은 주일예배를 다녀온 후 힘들어하는 엄마가 집에서 식사하는 바람에 그대로였다. 돈이 있어도 기분도 못 맞추고,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다는 카톡만 왔다. 거리나, 음식점이 조용하고 한산해서 기분이 안 난다는 핑계는 언니다웠다. 분명 돈이 아까워 쓰지 못하고 분위기는 그대로일 것이다. 다 부질없고 소용없는 일이었다. 있는 동안 작은애 생일케이크를 부탁하며 삼십만 원을 맡겼지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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