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비가 온다고 지난주 예보가 있었다. 그러나 바람은 빗줄기를 겉어갔다. 힘찬 손짓을 하는 바람이 벤치에 놓은 선글라스를 내동댕이친다. 세월의 시련은 이렇게 바람처럼 일상을 흩뜨려놓는다. 늘 조용할 것만 같고 지루한 일상인데 바람이 불고 있다.
하늘은 흐리고 천 층은 무겁다. 벚꽃 잎은 바람결에 떨어져 바닥을 수놓았다. 이 흐림과 바닥의 분홍점들은 어울리지 않는다라고 느꼈다. 때마침 작은애가 그랬다.
"엄마, 이 벚꽃을 보면 뭐가 생각나?"
"글쎄, 꽃술이 노라니까....?"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럴까, 하는 마음에 어물거렸다.
"연못 위에 개구리알 같지 않아요?"
"그렇게 생각하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다시 꽃들로 가득한 나무를 올려본다.
"나도 그런 것 같다."
그렇게 말해놓고 나니, 이제 것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는데라고 말하지 않은 것이 나답지 않다. 벚꽃나무에게 답이 있을까 했지만 다른 대답을 찾지 못했다.
"아유, 개구리알 같아서 징그러워요!"
그 와중에 더 한번 동조를 구하듯 말한다.
늘 벚꽃은 환상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작은애는 나와는 다르게 너무 동 떨어진 생각을 하고 있다.
나는 꽃을 피우기 위해 나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안다. 한 해를 시작할 때 봄을 기대하는 건 꽃이 있어서다. 볼품없이 시들은 들판에 풀꽃은 자연이 생동하고 있음을 말해줬다. 쉬지 않고 무언가 살아가려고 얘 쓰는구나! 여러 송이, 풀포기들이 줄기를 뻗어 영역을 넓혀가는 걸 볼 때 나는 쉼 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걸 배웠다. 무심히 지나치는 자연현상인데 그들이 선사하는 꽃등아래서 예쁨을 즐기지 못하는 작은 애가 안 됐다.
20대에 작은애는 결혼에 대한 환상을 가질 나이다. 내가 작은애 나이 때는 언젠가는 내 취향에 드레스를 손수 골라 입을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런데 나는 왜? 드레스를 좋아하는 거지, 하고 생각해 봤다. 흰 면사포를 쓴 마네킹의 올 백의 드레스처럼 만개한 벚꽃나무는 화사했다. 벚꽃을 보고 좋아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것은 나만의 착각이었다. 꽃을 보고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나와는 달랐다. 작은애도 그 사실을 알고 있겠지만 지금은 자기중심적이라 나무보다는 자기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한 듯하다.
내가 결혼하던 날은 비가 조금씩 하루종일 왔다. 비가 오지만 그 날씨에 주눅이 들지는 않았다. 밖은 조용했고 낮은 어둡지 않았다. 비가 오면 잘 산다는 농부들의 마음을 믿고 싶어 졌다.
"결혼식 당일은 신부의 날이다."
고개 숙여 인사하니 작은 시부는 내가 하객들을 만날 때마다 고개를 조아리니, 그럴 필요 없다는 말을 하며 지나쳤다. 나는 늘 연장자에 대한 예의가 몸에 배어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공작새처럼 흰 백의 드레스를 뻗쳐 입고 가만히 서있기에 내 사고는 동양적 있었다. 드레스와 예식은 서구의 문화라 식전에 먼저 도착하는 하객들을 마주 대하자 생각과 격식에 두 잣대가 몸들 바를 모르게 만들었다.
나는 신부대기실에 따로 있지 않았다. 미리 야외에서 앨범을 만드는 행사가 추천됐지만, 비용이 70만 원이나 추가되다 보니 거한 결혼비용 같아 선택하지 않았다. 결혼식 예행연습은 없었다. 아버지와 나는 발을 맞춰보는 연습을 집에서 하고 왔다. 예식장에 전속 사진사는 신랑신부의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다양하게 요구했다. 낯선 곳에 익숙지 않은 둘은 마냥 행복한 표정을 짓고 가깝게 서 있어야 했다. 어색함이 해프닝이 되고 웃음을 자아냈다. 이런 시간들이 긴장한 예식에 대한 부담을 잊어버리게 했다. 나보다 더 긴장한 남편은 예식이 끝나자마자 시동생이 주선한 차로 갔다. 긴장이 풀리자 신혼여행을 떠나는 공항 근처에서 늦은 점심식사를 함께했다.
그런데 작은애는 그런 거에 대한 기대가 없다. 흰 결혼드레스에 대한 설렘을 말한 적이 없다. 현실적인 문제가 거기까지 생각을 하지 못하게 했다. 봄이면 바람결에 이는 먼지와 하늘거리는 꽃가루로 비염이 생기고 재채기를 한다. 아름다움을 느끼기보다 몸에 자극을 주는 물질에 반응하는 것들에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이 심해졌다. 며 칠전부터 피부과에 다녀오라고 돈까지 줬는데 의사에게 나무라는 소리를 들을 것 같아 미적거리고 있다.
나는 나쁜 버릇이 있다. 사람을 스켄하듯 위아래로 보는 습관이다. 레이다망에 작은애가 들어왔다. 코밑이 웃으면 찢어질 것 같아 불안하다. 갈라지고 굳은살이 보푸라기처럼 인중을 덮었다. 옆에서 큼큼한 냄새가 난 다 고했더니 팔안쪽에 염증이 다시 생겨서 고름냄새가 난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자기는 익숙한 냄새라며 다가온 큰애에게 다시 웃으며 내게 한말을 돼 풀이해서 말한다. 손 싸개를 다이소에서 살 때만 해도 그렇게 심한 줄 몰랐다. 그저 가려운데 긁지 않으려고 장만했나 보다 했다. 그런데 이제 것 약으로 땜질처치를 해 왔던 것이다. 이제 동인천 피부과에서 약처방받은 약은 다 떨어졌다고 했다. 그러면 또 병원에 가야 처방전을 받고 약을 타와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살았다.
작은애가 병원에 혼자 다녀왔다. 내가 준 돈 십만 원에 놀라는 작은 애에게 나는 십만 원이라는 돈이 크다고 여겨서 올 때 큰애가 원하던 몇 천 원 하는 조각케이크를 사 오라고 했다. 그런데 병원비로 다 썼다. 물가가 오른 데다 아토피로션을 세 개를 샀다. 경험상 아토피는 돈이 많이 든다. 작은애 어릴 적에 1년을 병원에 다녔다. 얼굴에 바르는 아토피로션은 몸에 바르는 로션보다 비쌌다. 15,000 원하는 바디로션을 받아오는 게 전부였다. 나를 나무라는 의사에게 기가 죽었고 주의사항을 들었다. 수영장에는 가지 못했고 새 옷은 입히지 못했다. 늘 너에게는 새 옷이 독이 오르니까 입던 옷을 입어야 한다고 물려받도록 설득했다. 면이어야 하고 땀날 때는 자주 갈아입어야 했다. 늘 신경을 써서 밀가루음식을 먹지 않게 하고 기름진 튀김음식을 조심시켰다. 그렇게 해서 고비를 넘기고 건강해졌다. 의사는 애가 크면 면역력이 좋아지고 아토피가 좋아진다고 했다. 시간이 지나니 말 그대로 되었다.
그런데 이제 성인이 되고 작은애는 자기 먹고 싶은 것에 진심이 되었다. 밥 먹기 싫으면 과자나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방학 때는 큰애가 시켜 먹는 단짠음식에 길이 들었다. 결국 몸이 반응하기 시작하고 아토피는 심해졌다. 난 어릴 적 작은애를 수영장 데려갔을 때 본 이후 한 번도 벗은 몸을 본 적이 없다. 늘 가리고 옷을 입고 속이 보일까 봐 신경을 썼다. 아마, 내가 거북이처럼 살이 굳은살로 덮인 몸에 한 부분을 보고 놀라서 눈이 동그라지고부터인 듯했다. 상상 그 이상으로 보드라운 살이 떡진 모습은 처음이었다. 속살이 저렇게 변할 수 있다니! 내 표정에 작은애가 그때부터 숨기기 시작했다.
큰애가 병원 비을 작은애에게 너무 많이 줬다고 나에게 퉁명을 떨 때와는 달리 아토피는 돈이 많이 들었다. 다녀온 후 진료비와 아토피 얼굴용, 바디용. 먹는 약을 사는데 보험 처리되고 100,000 만원이 넘게 들었다. 자기가 먹을 빵까지 사 왔는데 그건 자비로 계산한 것으로 한다고 했다. 남편이 우리가 거실에서 하는 말을 듣고 나왔다. 나는 작은애가 병원에 다녀온 얘기를 했다. 진료보고 약처방받고 50,000원 들었데 하고 보니 넉넉히 보태준다고 다시 보태준 돈 50,000원을 합친 100,000을 다 섰다는 얘기를 깜박했다. 내 정신머리가 이렇다니까 대충 듣고 앞에 들은 얘기만 전하고 말았다. 남편은 비용에 대해서는 예민했다. 얘들은 다 컸고 이제 그만 생활비에 손을 떼고 싶은 의지를 보였었다.
나는 직장을 나간 지 3개월 만에 남편이 아파서 그만두게 되었었다. 다행인지 코로나로 병원에서 보호자관리가 힘들자, 주둔하지 못한다고 해서 집에 돌아왔다. 그리곤 다시 직장에 나갔다. 아프게 되니 자기 집이 절실했던 남편은 집을 샀다. 내 의향을 물어봤지만 결국 부동산사장의 예쁜 말솜씨에 매료됐다. 그래서 답답하게 기둥이 한가운데 서있는 집을 선택했다.
다시는 집주인에게 싫은 소리 듣지 않아서 좋고 이사 가는 일로 번거롭지 않아서 좋다고 하였다. 뒷산은 그의 건강을 위한 산소공급지였고 작은애에게도 좋을 것 같았다. 남편표정으로 봐서 여러모로 마음에 흡족한 모양이었다. 근처로 이사를 오자 마음이 거북한 지인은 왜? 여기로 이사 왔냐고 묻는다. 내게 직장을 알선해 준 사람이 다른 사람 궁금증까지 전하는 거 같아 기분이 안 좋았다. 내가 집을 고른 것은 아니었다. 내 이름으로 산 집은 더욱이 아니었다. 남편이 좋아해서 고른 걸 나보고 어떡하란 말인가?
" 나는 모르지, 남편이 좋다고 해서 산 거야!"
나는 이곳에서 좋은 일들만 있기를 바라고 살았다. 코로나로 집들이는 없었다. 제일 늦게 장만한 집을 자랑하기에는 뒷북치는 소리 같아 동료들에게 자랑거리가 아니라고 남편은 내게 겸연쩍어했다.
"내가 집장만한 게 동료 중 제일 골 찌야! 자랑거리도 아니지."
부모. 형제. 가족들에게 이제 가장으로서 대접받고 싶은 듯하였지만 작은애는 교통이 불편하여 기숙사생활을 했고 내 부담은 몇 배로 가중되었다. 현실적으로 나는 소소한 것들에 비용이 버는 즉시 빠져나갔다.
남편은 퇴직과 함께 지갑도 문을 닫았다. 생활비는 내가 벌고 있으니 줄 필요 없다고 했다. 나는 거지 같은 결혼생활에 체념하는 길을 택했다. 무슨 말을 해도 웃지 않았고 건성으로 들었다. 감점이 동요하지 않는 것은 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기에 시간을 놓아버렸다. 날짜를 잊어버렸고 요일만이 내가 가는 날, 쉬는 날이었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게 계절이 세 번 바뀌었다. 군대 간 셈치자, 언젠가 때는 오겠지 하는 심정이 되었다.
오늘 어제 결판 끝에 이만 혼자 사는 길을 걸을 것인가 선잠을 설쳤다. 직장을 관두고 둘이 법원으로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 사건의 발단은 작은애 아토피얘기가 시작이었다. 퇴근 후 나는 지쳤고 배고팠다. 남편은 시간이 많고 할 말은 많았다. 작은애가 아토피로 인해 혈관이 보인다고 보고하자, 남편은 말이 많아지고 중언부언하기 시작했다. 돈을 충당하고 살림하고 애까지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다고 나무랐다. 난 퇴근 후 씻고 안마를 한 후 특별한 일 없으면 식탁에 음식을 준비해서 한술 뜨고 치우는 게 하루일과였다. 결국 몰인정한 남편에 되풀이되는 심각한 어투와는 반대로 책임지지 않는 남편말에 화를 내고 말았다.
나는 늘 남편이 만만했다. 아직도 나를 사랑하나 하는 착각이 들 만큼 남편은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는 내게 저주는 것도 있었다. 내가 배우들 이름을 잊어버리면 뒷날을 걱정하는 듯 말했고 얘들이 나에게 못되게 굴면 야단을 쳤다. 맛있는 게 있으면 내놓기도 하고 아주 작은 비용면에서, 만원 이하의 것들에 넉넉하게 굴었다. 늘 너네 집은 부자란 말로 부모님 용돈을 제치고 자기 집은 가난하단 말로 비용부담이 당연하게 여기게 했다. 늘 옷에는 관심 없다며, 외모에 관심 없다며, 후줄근하게 입던 옷만 입고 다녔다. 생활비는 적다고 말할 수 없게 했다.
반찬은 김치면 돼!
그런데 오늘 남편은 마음이 해이해진 나머지 실수를 했다. 귀가 후 배고픈 나에게 작은애 아토피 때문에 어떡하냐며 답이 없는 말만 되풀이했다. 애를 데리고 병원에 가야지? 한다. 관심 없이 그렇게 비용문제에 손때는 모습을 보이고 실망하고 있는 내 생활을 못 본척했다. 보자 보자 하니 , 이 인간이 날 열받게 하고 있었다.
°그럼 내가 돈 벌어, 살림해, 애 데리고 병원 가란 얘기야?°
어제는 내가 쉬었다. 그렇치만 일요일이었고 병원 가라고 돈 십만 원을 카카오페이로 준 상태다. 돈을 분명 줬고 큰애랑 가기로 했는데 큰애가 질투에 눈이 먼 나머지 세상물정까지 몰라 병원비를 많이 줬다고 화를 냈다. 자기를 엄마가 차별한다고 휴대폰비까지 들먹이며 심통을 냈다. 그때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혼자 가기 싫은 작은애는 주저앉았고 나는 그저 남편에게 아토피가 심해져 혈관이 보인다고 말했을 뿐이다. 갑자기 나는 나쁜 엄마로 전락했다.
남편은 퇴직 후 아픈 걸 핑계 삼아 그저 집 근처 등산을 다녀오는 게 가장 큰 일과다. 아이들과는 잘 지내지 못했고 그건 순전히 금전적인 비용발생을 막으려는 목적이었다. 나긋나긋하게 음성조절을 못하는 문제로 대화는 마치 싸우는 듯 들리기에 나는 소리를 낮추라고 했다.
어느 날 영종역 가는 버스를 타러 버스부스에서 기다리다 18분이면 좀 걷자고 했다. 나는 일방적인 남편의 말을 들었고 그 걸음걸이를 따라가느라 뛰다시피 했다. 그런데 모르는 사람에게서 길을 가다 꽂을 받았다. 우측 길을 건너 차도를 지나 좌측길로 넘어오는 비쩍 마른 아줌마가 웃으며 말한다. 밭에서 꺾은 듯 하지만 가시를 떼낸 팔 길이의 미색장미꽃 한 송이를 삐죽 내민다.
"싸우지 마세요!"
"싸우는 거 아니에요, "
하고 나는 웃으면서 꽃을 받아 들었다.
"오늘 같은 날은 양산 쓰고 오붓하게 다녀야 하는데,,,,"
날씨가 좋다. 하늘에 해는 쨍하고 밝은 하늘에 구름까지 경쾌했다.
나는 평소에 남편이 잘난척해서 소리치듯 말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부부가 싸우며 간다고 생각하고 왔다. 그러니 남에 말에 진심인 남편에게 나는 할 말이 생겼다.
" 거봐! 당신이 야기하면 싸우냐고 하잖아"
그 후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목소리 좀 낮추라고, 남들이 우리가 싸우는 줄 알겠다고 했고 남편은 수긍했다.
작은애를 데리고 병원에 가보라는 말에 남편은 펄쩍 뛰면서 말했다.
"내가 가자고 하면 개가 가?"
하고 소리를 지른다.
"당신은 돈에만 관심 있지, 돈 안 들이려고 애 하고 나쁘게 군거잖아? 당신이 그렇게 일부러 그런 거잖아? "
남편은 말이 없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지 눈을 깜박인다. 그 일이 그렇게 큰 다툼이 될 줄 몰랐다. 자기를 위해 해 준 반찬이 없다느니, 김치밖에 더 했느니, 지가 먹고 싶은 거만 사느니, 하여 얘기가 봇물을 탔다. 나는 생활비도 안 주면서 내 입에서 이혼얘기가 나오게 무슨 작당들을 하고 있는 거냐? 따지기 시작했다.
"내가 벌어, 내가 살림해, 내가 애 데리고 병원 가, 나는 지금 배고파!, 피곤하다고!!"
소파에 느긋하게 얘기하는 남편과는 달리 나는 서서 그 말을 받아주고 있었다. 그게 다 작은애 아토피에 대한 남편의 끈질긴 되풀이 화법 때문이었다. 술 먹고 했던 말 또 하고 또 했던 버릇은 술 안 먹고도 했다. 결혼전이나 후나 계속된 온 습관이었다. 마치 내입장은 없고 한가한 자기는 걱정 꽤나 하는 듯 생색을 내고 있었다.
싸우지 않는 부부는 부부도 아니란 말이 있다. 우리는 불만을 터뜨리고 고름을 짰다. 퇴직 후 20개월의 생활비 먹통은 이제 다툼을 통해 틔였다. 오전만 해도 쌍벽을 겨누던 눈빛은 오후 퇴군 후 바뀌었다. 언제 그랬냐 싶게 누그러진 화법으로 남편은 다가왔다.
°생활비 안 준 게 그렇게 기분 나빴어? 미안해! 내가 생활비 안 준 거는 잘못한 일이야!°
나는 내 옆 소파에 앉으라고 말했다. 처음과는 다른 태도에 저으기 놀랐다. 내가 생활비 2년을 안 줬다고 할 때만 해도 정신없는 아내가 날짜를 세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은 듯했다. 은행에 그어보면 다 나와, 하니까 그제야 인터넷을 뒤진 후 19개월이라고 못을 박았다. 그렇지만 이번달은 지출이 많다는 말만 했다. 얼마를 원하냐고 시작한 말꼬리 뒤에 정기적으로 지출하는 비용을 언급했다. 그리고 주겠다는 날짜는 연금날짜가 2주 남은 시점부터 언급했다. 결국 4월과 5월의 중간지점이 한 달이 되었다. 관리비와 보험료, 공과금등 비용을 뺀 커트라인에서 받을 수 있는 생활비를 욕심내지 않고 받기로 했다.
만약 얘들이 용돈문제로 다투지
만 않았다면 내가 지출하는 비용을 못 본 척했을 수도 있겠다. 큰애는 매일 나가는 비용을, 작은애는 학자금과 생활비, 교통비, 휴대폰비, 용돈등 비용이 생겼다. 카카오폐이의 편리함을 가르쳐준 큰애는 숫자에 영민하지 못했지만 생활의 이기를 다룰 줄 알았다. 꼭, 은행에 기지 않아도 되어 내 시간의 바쁨을 처리해 주었다. 그런데 단점도 생겼다. 내역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그걸 보고 큰애는 자기보다 작은 애가 많은 비용을 쓰고 있음에 열을 받았다. 그에 못지않게 작은 애는 큰애가 자기를 나무라는 얘기에 화가 났다. 마침 남편이 집으로 들어왔고 작은애는 억울함을 호소했다.
생활비를 당장 벌거나 휴대폰비를 내라고 윽박지르는 큰애게 화가 난 작은애는 자기도 용돈 안 받을 테니 큰애도 받지 말라고 받아쳤다. 문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 아이들은 엄마가 누구의 편이 될지 끌어들였다. 작은애 휴대폰비는 고1 때부터 지로로 내던 것이라 벌 떠 7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도 까마득히 잊고 지냈다. 어느 날 V.I.P가 돼서 통신사에서 무료 영화권을 받았다. 나에게 같이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해서 그때 알았다. 80,000원이나 통신비가 나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늘 벌러 다니느라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어느 날 작은애는 와이파이가 큰애 문제로 아빠가 차단해 버리자 통신비를 높게 만들었다. 학과숙제를 해야 하기 때문에 노트북까지 내가 사주었다. 그때는 큰애가 아무 말하지 못했다. 기가 눌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에 잠자코 있었다. 그런데 오늘 둘 다 월권을 행사해서 돈문제로 다투고 있었다. 자기들 용돈만 받으면 되는 일이었다. 큰애는 자기 휴대폰비를 안 내주는 거에 불만이었다. 게다가 늘 무제한인데도 불구하고 데이터가 부족해서 내 것까지 끌어 썼다. 데이터를 나눠 쓰는 서비쓰는 천 원이 넘는 비용이 달마다 발생한다는 것을 인터넷을 찾아보고 알았다. 작은애가 예정취업을 한 상태에서 졸업을 했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문제였다. 취업이 목전인데 작은애가 아토피가 심해졌다. 나는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중재에 나섰다.
큰애에게 작은애가 취직하면 너도 취직해야 된다고 했다. 그런데 큰애에게 가능한지 물어봤다. 자신 없다는 말에 그러면
"너는 용돈 받고 작은애도 용돈 받으면 돼지?"
하니 그제서 고개를 끄덕인다. 그 와중에 남편이 들어왔고 작은애는 큰애에게 받은 설움으로 우리의 비밀을 남편에게 고해 받쳤다. 이제 역효과가 나서 내 생활비는 날아갔나? 생각할 즈음 남편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래서 돈이 없다고 했군. 하고 만다. 이주일이 남은 이 시점에서 남편은 생활비를 보내줘야 받은 것인데 마음이 변할 수도 있어서 내입장 또한 착잡했다.
둘은 사이가 나빠졌다. 큰애는 아빠가 자기 스스로 유튜브수익으로 생활하는 줄 아는데 요즘 심통치 않아서 용돈으로 사는 걸 알게 된 게 화가 났다. 이제 용돈도 끊기나 지레 겁을 먹고 화가 났다. 작은애는 선취업이었지만 하반기까지 기다리는 일은 후배들과 경쟁하는 자리여서 믿음이 가지 않았다. 늘 혼자, 친구들과 룸메이트로 살던 습관으로 원룸을 얻어주길 바라는데 집안분위기가 영 아니다.
얼마 전 면접 본다고 하더니 작은애는 취직을 했다. 퇴근길에 늘 통화하고 모르는 거 이해가지 않는 인간관계를 물어본다. 사회에 첫발을 디딘 알바가 험해서 울었던 지난날에 비하면 참을 수 있다며 말한다. 다시 만났을 때 작은애는 나를 버스정거장까지 배웅나선 자리에 입을 삐쭉이면 눈물이 나는 것을 삼킨다. 자기에 설움을 들킬까 이모에게 말하지 말라고 어려운 얘기를 꺼낸다.
먹고 싶은 유과를 사주지 않은 일에 슬펐던 일. 시장을 끌고 다니며 가격을 비교하다 못 사고 온 일등 집에서와 많이 다른 자기만의 상실감에 대해 꾹꾹 참고 있다. 나의 언니는 사실 자린고비다. 시간이 돈이라 아까워서 놀지 못한다. 요즘 관절염으로 고생하느라 집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용을 아끼려고 손수 집을 고친다. 세탁기가 고장 나면 손빨래를 한다. 똑같은 값이면 비교해서 싼 걸 산다. 내가 물건 산 값을 얘기했다가 비싸게 주고 산 줄 알면 바보취급을 한다.
작은애 눈치에 나는 예정 취업 지에 집을 얻어주고 싶었다. 없는 돈 보태서 원룸 얻어주려고 나는 돈을 모았다. 그런데 잘 지내는지 한주 열락을 안 한다. 게다가 작은애에겐 계획이 다 있었다. 자기가 돈을 벌게 되면 원룸에 내는 월세, 관리비등이 자기 월급으로 계산해야 할 날이 온다는 것을 알았다. 그 비용은 사실 큰 부담이지 않을 수 없다. 용돈을 받아 쓰다 비용을 내려면 그건 입장이 바뀌는 일이다. 큰애는 더 경쟁자가 없어 편한지 느러지고 있다. 생활비가 끊긴 지 처음으로 4월 생활비가 내 통장으로 들어왔다. 받던 생활비보다 석장 빠진 금액이라 각자 먹고 싶은 재료를 사기로 했다.
고비마다 눈치 보는 사람이 참고 떠나게 돼있다. 작은애는 치사해서 아빠 보고는 돈 벌어 집을 살 거라고 했다. 남편은 작은애가 야무지고 욕심 많아 돈을 잘 모을 거라 확신하고 있다. 작은애는 규모가 크다. 용돈을 주면 생활에 필요한 6개짜리 갑 티슈 티슈 티슈 1+1 , 작은 생수 40개 1+1, 과일 중 큰 토마토. 방울토마토, 귤등과 냉동군만두, 크리스피 핫도그, 어묵. 양파, 소불고기 반찬재료를 산다. 냉장고에 떨어진 재료나 필요한 재료를 사서 자기 먹을 입을 해결했다.
이게 전화위복인지 모르겠다. 둘씩 둘씩 우리는 다투고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큰애는 내가 자기의 재산이라 나눠 쓰는 것에 신경 쓴다. 작은애도 내가 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협력자라 나에게 협력하지 않는 아빠에게 자신이 취직하면 생활비를 주라고 못 박았었다.
용돈문제도 알고 보면 사실 엄마가 자기들 주느라 힘들어한다고 다투게 된 것이다. 내가 일하지 못하는 순간이 온다는 것을 작은애는 이해한다. 흰머리를 부끄럽지 않게 볼 줄 안다. 늙음이 자연의 섭리라는 것을 가리지 않아야 세대차가 생기지 않는다. "너는 젊어봤냐? 나는 늙어봤다, "란 말이 있지 않은가? 늙는 것은 시간을 초월한 것이다. 자연스럽지만 배울 수 없는 것이다. 때가 돼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데 늙음을 부끄러워한다면 노인의 설자리는 없어진다.
나이에는 국경을 초월한 사랑 운운 하지만 마지노선이라는 게 있다. 장사에서 손해 보고 팔 때는 땡, 처분할 때고 손해 보고 팔 때는 하자 있는 물건이 대부분이다. 지켜야 할 선을 연륜이 지키지 않으면 질서는 문란해지고 교통체증이 생긴다. 체통이 서지 않는 위계질서는 누군가의 입질이다. 세대차는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대표가 있다. 교회에는 나이별 모임이 있다. 소통에는 개인 간 하지 않고 의견을 수렴한다. 개인 간의 싸움은 일어나지 않는다. 한쪽이 이해만 한다면 욕심부리지 않는다면 같이 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