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나는 늘 내일만 있을 줄 알았다.
죽음이란 걸 배우지 못했을 때 나는 늘 맑음이었다. 죽음이란 걸 주변에서 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키우던 정든 고양이를 보낼 때, 어린 시절 사고로 먼저 간 동네 친구의 소식을 들을 때, 우리는 언젠가 죽어야만 하는 존재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런 경험들을 통해 언젠가는 떠날 부모와 이별하는 순간을 상상하며 슬퍼했다. 다시는 볼 수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엄마의 얼굴을 떠올리곤 잠에서 깨어 괜스레 울었다.
엄마는 자신이 죽을 때 울어줄 자식이 있으면 했던 거 같다. 주변에 돌아가신 분에 소식을 들을 때 엄마는 꼭, 자식이 있는지 물었다. 그리곤 울어줄 자식이라도 있으니 다행이라고 했다. 엄마한테 자식이란 그런 존재였다. 돌아가는 상황을 듣고 나도 죽을 때 내 자식이 있다면 울어줄 거야 하고 생각했다. 하기야 정들었는데 설마,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겠는가? 자식만큼 부모의 죽음을 슬프게 받아들일 사람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에 내 피붙이를 놓지 않고 죽는다는 것은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예전에는 초상집에 가족대신 울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부모를 위해 곡을 하는 건 당연하다고 여기던 시절, 눈물로 애통해하며 죽은 이를 생각하는 마음에 효심이 있다고 여겼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이를 보내는 마음이 저승까지 통해야 좋은 곳으로 간다고 하는데 죽어서 문상객이 없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슬플까? 그래서인지 누가오든 초상집에 오는 이를 문전박대하지 않았다. 지옥에 가지 않는 방법은 죽은 후 울어줄 사람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된다고 여겼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오빠는 아버지의 전화번호수첩과 핸드폰에 저장된 지인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88세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빈소에는 이미 고인이 돼서 올 지인들이 많지 않았다. 살아계시지만 거동이 불편해서, 자식이 만류해서, 못 오시는 분이 계셨다. 옛말에 초상집에 갔다 대신 저승사자에 끌려갔다는 전설이 있다. 연로하신 분들은 남의 부음에 오지 않는 게 관행 같았다. 오래 살다 가면, 올 지인은 당연히 거의 없다. 늦게 결혼하면 축하해 줄 친구가 없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줄 알았다. 막상 아버지 장례를 치르는 삼일장 내내 눈물이 비어져 나왔다. 속상하고 괴로웠던 지난날들의 일들이 슬픔이란 연민의 정으로 다가왔다. 조문객과 내 가족들을 돌보며 지나는 동안 눈이 바빴다. 사진으로 남기려는 6,25 참전 기념사업 일환으로 수고하시는 분들이 왔다. 살아생전 이룬 업적을 치하하고 기려주셨다. 이모님들까지 숙식을 함께하며 빈소를 같이 지켜주었다. 장례 때는 아버지가 보험에 들어둔 덕에 장례지도사가 왔다. 절차를 다 주관하고 알려주니 따라 하면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외롭지 않은 장례를 치를 수 있다는 것은 아버지의 덕이었다.
나는 그 이후 집으로 돌아왔지만 가족을 잃었다는 슬픔이 눈물로 새어 나왔다. 버스를 탈적에는 내 지각능력이 마비됐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본 것이 본 게 아니고 읽은 것이 읽은 게 아니었다. 가족을 보낸다는 것은 이런 것이었다. 내 기억에 있어야 할 사람을 뇌가 지도처럼 찾고 있는 것이었다. 지난날 어느 순간 초등학교를 돌아보고 싶어 꿈꾸게 했었다. 다시 찾아가고 싶은 열의에 찬 길을 내 가족과 갔었다. 뇌는 확인하고 안심이 됐는지 그 이후 나는 두 번 다시 그 꿈을 꾸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어디에서 아버지는 볼 수 없었다.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재가 되어 날아갔다. 나를 지배하던 정신적 지주는 힘을 잃었다. 우상을 잃은 상실감에 뇌가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납골당은 차가웠다. 내 마음까지 작은 장속에 머물기에는 너무 낯설었다.
눈물은 꽃이다. 꽃은 살아있다. 꽃은 생화다. 그런데 생화는 시들어버리기에 사치스럽다고 생각한다. 눈물은 유치한 짓이라고 눈물을 비칠라치면 혼을 낸다. 마음이, 진심이 삐져나온 건데 입을 막는다, 눈을 막는다. 속옷처럼 겉옷밖으로 나온 실수처럼 칠칠치 못하다고 한다. 마음을 질질 흘리고 다닌다고 한다. 눈물은 두 뺨 위에서 흐르다 마르지만 눈물을 쏙 빼게 혼내야 정신을 차린다고 혼내는 부모가 있다. 세태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었다.
나의 부모님은 살아생전 자신의 손으로 꽃을 돈 주고 사시지 않았다.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순위대로 아끼고 절약하며 사셨다. 웃음은 입가에 피었다 사그라지는 꽃이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나를 웃게 하기 위해 본인이 웃으며 말을 건네지 않았다. 웃음의 볼래의 목적은 기분 좋게 하는 기능이 있다. 누군가를 웃게 한다는 것은 서비스다. 나는 이것을 여유라고 부른다. 마음에 여유가 없는 사람은 남을 위해 웃지 않는다. 마음에 여유가 없던 아버지는 늘 일에 찌든 마음으로 화가 잔뜩 있었다. 그 얼굴은 청동처럼 불덩이를 삼킨 듯 굳은 얼굴이 됐다. 하여 자식들은 아버지 발자국소리만 나도 자기 방으로 숨곤 하였다.
현실에서 생각해 보니 눈물은 거짓이 없다. 참회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마음에 산물이다. 눈물은 감동의 증거다. 눈물은 따뜻한 마음에서 나온다. 눈물 없는 사람은 없지만 사람에 대한 눈물은 연민에서 나온다. 연민은 언젠가는 다 같이 죽는다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고 그 연민을 막는 것은 미움이다. 사랑받고 큰 마음은 사랑을 주고 미움받고 큰 마음은 미움을 준다. 미음이 마음에 들면 죽음의 문턱을 넘기 전에 까지 증오심을 느낀다. 사랑이 가문 마음은 쩍쩍 갈라져 속을 들어내는 소리를 낸다. 성마른 소리로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 정 들여 키워놓은 자식이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슬픔에 눈물 한 방울 없다면 그건 고장 난 마음이다. 자식이 흘리는 눈물은 부모의 수고로 만든 마중물 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몸보다 생명이 길다면 이런 일로 슬퍼할 기운이 없을 것이다. 생명에 반해 몸은 낡어 가고 있다는 것은 부모나 자식이 다 노인축에 들 때 부모를 여의는 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노동이 된다. 감정의 동요는 젊을 때는 감당할 수 있지만 노인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는 자식의 짐이 되기 싫어한다. 그래서 부모와 자식 간에 늘 예의라는 거리를 두었다.
몸이 늙으면 오래 사는 것은 의미가 없다. 생각만 있고 실행할 능력이 없다면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자신감은 제 수명대로 살아냈어! 하고 말할 수 있을까?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노년이 쉽게 생각한 인생이 짧다고 느꼈는데 진정 백 살은 긴 것인가? 장거리를 가기 위해 차에 연료를 넣어야 가듯 그 길을 순탄하게 가기 위해 비용을 준비해야 하는 부담을 감당할 수 있을까? 분명 백세까지 살면은 장수한 삶이다. 자기 관리를 잘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긴 생명에 기쁜 인생은 아니다.
내가 읽은 눈물의 상징은 여러 가지다. 외국동화 속에서 눈물은 진주가 되고 사람을 살리는 기적을 낳기도 했다. 사람이 입으로 웃으면 웃음꽃이 피고 눈이 울면 눈물꽃이 핀다. 사람들은 먹을 게 들어가면 웃음소리가 나고 칭찬을 들으면 눈웃음을 짓는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순간이다. 같이 환하게 웃을 수 있다는 것은 즐거움을 나누어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웃음이 거짓이면 조소라고 하고 울음이 거짓이면 가증스럽다고 한다. 눈물은 돈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을 살 수가 있다. 눈물은 많은 것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를 보여주고 그 사람을 내 안에 담는다. 눈물의 결과는 감동에서 비롯되기에 똑같은 마음이어야만 가능하다. 눈물이 외면당할 수 있지만 마음에 진한 호소를 하는데 이것만큼 크게 작용하는 거는 없다.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기 위해 상냥한 말씨로 얘기하는 거, 인사를 건네고 위로나 감사의 말을 전할 수 있는 건 다 마음이 촉촉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생각하고 울 수 있는 감성이 있다는 건 다른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다. 자신만 알고 남들 마음에 관심 없다면 독백만이 있을 뿐이다. 대화할 수 있다는 건 마음을 주고받는 것이다.
어렸을 적에 만난 애들의 지고 이기는 기준은 눈물이었다. 먼저 우는 사람이 지는 것이었다. 누가 정했는지 모르겠지만, 울음에는 감동해서 나오는 눈물이 있고 억울해서 흘리는 눈물이 있다. 분명, 싸움의 근원은 오해가 대부분이었다. 그렇다면 우는 사람의 심정은 억울해서 일 것이다. 먼저 제압하려고 싸움을 걸어 선방을 날렸을 것이고 얼떨결에 싸움에 휩싸인 상대는 이 상황이 기가 막혀서 눈물을 쏟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울지 않았다. 힘에서 밀렸지만 가는 길이 바빴고 누군가에 압력에 밀려 링 위에 서게 됐을 뿐 집에 늦는 것이 나를 더 답답하게 했다. 마음은 다른 곳을 향해가야만 하기에 감정이 생길 틈조차 없었다. 억울하게 누군가의 상대로 뽑혔지만 그런 모략을 짠 아이조차 나를 어찌하지 못했다.
몇십 년이 지나 수소문 끝에 내 어린 시절을 힘들게 했던 애들을 만났다. 시간은 흘맀고 나는 그 애들의 기억에서 잊혔다. 이제는 사심 없이 물어볼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여자가 남자를 이겨먹었다는 이유로 괴롭힘을 일방적으로 당한 것이었다. 물론 내가 울지 않은 것이 첫 번째 이유였다. 나 같은 여자애를 그 남자에는 처음 본 것이었다. 그 애는 늘 남자에게 여자가 지는 게 순리라고 생각한 듯했다. 여자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반성 없이, 미안함 없이, 나이만 먹어 어른이 된 애에게 무슨 말을 원했던가 체념하고 그만. 돌아왔다.
징징거린다거나, 훌쩍거린다는, 표현은 이제와 생각해 보니 마음을 표현할 자유를 속박하는 것이었다. 꽃은 짧은 인생을 비유한다. 꽃처럼 살다 갔다거나 불꽃같이 살았다는 말은 일찍 타계한 사람들의 수식어가 되었다. 꽃은 유한하다. 유한한 것에 사람들은 돈을 쓰길 싫어한다. 튼튼하고 오래가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똑같은 커튼을 매년 달고 사는 것은 지루한 일이다. 튼튼하다고 남자들이 아내로 마지하지는 않는다. 잡아먹고 싶은데 오래 살 거라고 그냥 키우지는 않는다. 오래 산 부부라고 행복하지는 않다. 결혼 몇 주년마다 리마인드웨딩을 하는 부부가 있지만 지루한 생활에 이벤트로 활력을 주고자 한 용기다. 수작은 오래 봐도 싫증 나지 않는다고 한다. 유명세를 탄 미술품은 세월 감에 따라 값어치도 따라간다. 그 맛이 없다면 싫증 나지 않았을까 한다.
나무테처럼 사람은 좋은 시절과 그렇지 못한 시기로 나뉘었다. 양적 성장을 해서 쉽게 쉽게 경제적 여유를 누리며 살은 아이는 예전 그대로였다. 어려운 시기를 겪은 아이는 사회에 일찍 진출해서 자기 몫을 하고 있어서 놀랐다. 부모의 경제력이 뒷받침해 주는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 부모의 양육태도에 따라 지원을 받고 자립하는 아이와 여건상 녹녹지 못해 사회에 진입하는 시기가 늦은 아이를 봤다.
차별 없는 사회를 부르짖지만 출발선은 늘 같을 수는 없다. 서있는 자리에 따라 빛이 들어는 양에 따라 관심을 받는 면에 따라 화초의 길이가 다르듯 인생은 그 끝이 다르다. 친구들끼리 한 아이는 사장이 되고 그 가게에 사원으로 지내는 아이를 봤다. 좁은 곳을 떠나지 않으면 이렇게 엮여 사는구나 생각이 들었다. 인생은 유한한 시간 안에 답안지를 내야 하는 시험시간이다. 생에 마지막 순간 온점을 찍어야 하기에 인생은 늘 초조하다. 그래서 앞만 보고 가는 사람이 생긴다. 뒤따라 오는 아이를 보며 더 뛰어야 제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생긴다. 죽자고 따라붙어야 되는 사람이 생긴다. 웃음꽃이 피고 눈물꽃이 피는 인생이 시간에 최종점검을 하는 뒤안길에서 후회하지 않으려고 애쓰다 쓰러진다. 유한한 인생에 받을 수 있는 눈물꽃을 꺾으려 한다. 그건 연민의 정이다.
우리가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안 순간 가만히 죽음이 찾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만은 없다. 우리가 아등바등 사는 이유는 다 때가 있기 때문이다. 때는 다음단계를 가기 위한 마감이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할 일은 많은데 인간의 생에는 때가 있다. 그때를 극복하지 못하면 인생 후반전이 힘들게 된다. 완벽하게 할 수 있는 일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걸음마를 떼듯 앞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게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