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 이야기
한바탕 까망이 소동이 끝나고 몇 주 후 예정된 결혼식을 무사히 마쳤다. 마치 미뤄뒀던 숙제를 끝낸 것처럼 홀가분한 늦가을이 시작되고 있었다. 어느 날 와이프가 인스타그램에서 포스팅을 보여줬다. 이미 팔로우(following)하고 있는 고성군 보호소에 올라온 아이 었다. 고성군 보호소는 배우 조승우 님이 반려견인 '곰자'를 입양하면서 이슈가 된 곳이었다. 전국에서 가장 높은 안락사 시행률을 보였지만 지금은 구조단체(비글 네트워크)와 업무협약을 통해 많은 아이들에게 새로운 삶을 찾아주고 있다. 와이프가 보여준 사진 속에는 곧 안락사가 시행될 아이들이 있었고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아이는 바로 1-128번 아이 었다.
생김이 놀랍게도 영옥이와 똑 닮은 아이는 다른 유기견들과 무리 지어 주민을 위협했다고 한다. 까망이와 영옥이 같은 겁쟁이 아이들과 살다 보니 그 아이의 눈빛만 봐도 단숨에 성격이 보였다. 분명 무리 생활을 하면서 생긴 경계심 때문에 짖는 행동이 위협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이미 안락사 예정일이 잡혀 있었기에 와이프와 나는 서둘러 입양 또는 임시보호 가족을 찾기 위해 인스타그램을 통해 홍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락사 예정일이 하루하루 가까워졌음에도 가족을 찾았다는 소식이 없었다. 결국 안락사를 며칠 남겨두고 우리는 임시보호 신청을 하기로 결정했다. 세 마리의 반려견과 함께 산다는 게 얼마나 고된지 가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마치 이 아이를 죽음의 위기에서 구해내고 가족을 찾아주는 게 사명인 것 마냥 한 껏 의욕적으로 살구의 임시보호를 시작한 것이다.
이름도 없이 공고번호로 우리 집에 온 아이에게 살구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이미 까망이는 망구, 영옥이는 옥구라고 부르고 있었기 때문에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아이니 ‘구’ 자 돌림을 넣어 살구라 부르기로 했다. 천사 같은 이동 봉사자님의 도움으로 어두운 저녁시간에야 집에 도착한 살구는 경계심보다 피곤함이 가득해 보였다. 아침부터 켄넬에 갇혀 거의 12시간 가까이 차를 타고 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살구는 차멀미가 심한 아이 었다. 일단 집에 도착 후 켄넬 째 옥상으로 올라갔다. 좀 더 개방된 공간에서 까망이와 영옥이를 만나게 하고 편하게 옥상 화장실(잔디 배변판)에서 배변을 시키기 위해서였다. 신나서 촐싹거리는 까망이와 데면데면한 영옥이는 이미 살구를 새로운 친구이자 가족으로 생각한 듯했다. 서로 인사를 마치고 집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우리는 멍빨(멍멍이 빨래=목욕)을 시도했다. 장시간 이동에 피곤했겠지만, 참을 수 없을 만큼 냄새가 심해서 간단하게라도 닦아내기로 했다. 아직 아이의 성격을 모르는 상태로 목욕을 시도하는 건 사실 위험한 시도이다. 물을 싫어할 수도 있고 특정 부위에 알지 못했던 상처나 트라우마가 있어서 터치할 경우 입질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살구는 입질 한 번 없이 얌전하게 우리 손길을 받아주었다. 물에 젖은 살구의 몸은 한눈에 보아도 근육량이 부족했고 너무나 말라있었다. 목욕을 마치고 잰 살구의 몸무게는 영옥이보다도 덜 나가는 5.9kg이었다.
낯선 환경에서 자고 일어난 살구는 다음날부터 놀라운 속도로 집 멍이로 변하기 시작했다. 하루 만에 침대를 점령하더니 잘 때도 같이 자려고 살금살금 올라왔다. 나는 평소 예민해서 잘 때만큼은 편하게 자는 것을 선호했지만 내가 씻고 누울 때까지 기다렸다가 눈치 보면서 올라오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못 이기는 척 받아줬다. 살구는 밥도 남김없이 뚝딱 잘 먹었다. 덕분에 위기감을 느꼈는지 입맛 까다로운 까망이는 덩달아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이미 기본적인 접종을 보호소에서 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며칠 후 병원에서 검사를 진행했다. 다행히도 살구는 크게 우려할 만한 문제없이 건강했고 몇몇 부족한 항체를 위해 일부 접종만 하면 되었기에 곧바로 중성화 수술을 위한 계획을 잡을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반려견의 중성화 수술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는 반려견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사람들의 편의를 위한 결정이 아니냐며 반대한다. 하지만 반려견의 건강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유기견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중성화 수술은 꼭 필요하다. 내 반려견과 오랜 시간 건강하고 행복하기 위한 것이라면 안 할 이유가 없다. 살구는 수술도 사고 한번 안치고 잘 이겨냈다. 넥 카라를 불편해해 씌우지 않았는데 그래도 수술부위를 건들지 않고 잘 견뎌준 녀석이 기특했다.
살구는 구김살 없는 순둥이였다. 눈치 없이 영옥이에게 놀자고 장난치다 혼나기도 하고 우리 부부가 집을 비울 땐 까망이와 신나게 뛰어놀기도 하는 세상 밝은 개린이(개+어린이) 었다. 초반엔 배변훈련이 안되어 있어서 집안에서 배변 실수를 자주 했다. 침대 시트와 소파 덮개, 그리고 애견 방석을 하루가 멀다 하고 빨았다. 하지만 그 마저도 산책이나 옥상 배변에 익숙 해면서 스스로 조절했고 나중엔 실내와 실외에서 모두 배변을 하는 완벽한 반려견이 되었다.
두 달쯤 지나자 오줌 냄새로 꼬질꼬질했던 겁 많은 아이는 빛 좋은 개살구가 되었다. 다른 집에 보내기 아쉬울 정도로 완벽한 살구였지만, 우리보다 더 나은 환경의 좋은 가족을 찾아주기로 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홍보를 하기 시작했다. 평소 인스타그램을 통해 별도 계정으로 임보 모습을 꾸준히 올렸는데 까망이 영옥이와 함께하면서 변화하는 모습에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었다. 하지만 내가 구조한 귀한 생명을 책임져야 하는 만큼 우리는 조금 까다로운 조건들로 입양 신청자들을 심사했다. 우리는 살구가 오롯한 사랑을 받길 바라는 마음에 다견 가정에 보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린 자녀를 둔 가정에 입양된다면 착하고 애교 많은 성격에 아이들과 잘 어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산책과 배변은 가족들의 일정에 따라 바뀔 수 있지만 적어도 하루에 한 번 이상 실외 배변을 해줄 수 있길 바랬다. 마당 있는 주택이면 좋지만 그게 아니어도 안전하게 산책할 수 있는 아파트 단지와 같은 주거환경이어도 괜찮았다. 적어도 1년에 한 번 검진이 가능하고 매달 심장사상충 약을 챙겨줄 수 있을 만큼 경제력과 꼼꼼함을 가진 가족이길 바랬다. 그렇게 깐깐한 심사 끝에 우리는 살구를 충청북도 충주의 한 가정에 입양 보내기로 결정했다. 살구를 입양한 가정은 정말 놀랍게도 우리가 원하는 모든 조건들을 충족했다. 과연 이런 가족을 찾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완벽하게 들어맞는 조건의 가족을 찾은 건 정말 행운과 같았다. 살구의 주 보호자는 입양 신청서에 동의한 대로 가끔 살구의 소식을 인스타그램을 통해 올려주신다. 얼마 전엔 입양 100일 기념 파티 영상과 함께 소식을 들려주었다.
살구의 임시보호는 조금은 무모할 수도 있는 도전이었다. 반려견이 한 마리에서 두 마리가 되면 두배로 힘들지만 두 마리에서 세 마리가 되면 여섯 배로 힘들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다행히도 마성의 영옥이가 카리스마 있게 잘 돌봐줬고 까망이가 산책을 못하는 아이기 때문에 크게 힘들지 않게 임시 보호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국내 가정에 입양 가서일까. 오레오를 해외로 보낸 후 겪었던 상실감과 불안함은 거의 느끼지 못했다. 대신 한 생명을 살리고 새로운 견생을 보낼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는 뿌듯함이 가득했다. 지난 연초에 살구의 가족은 살구 덕분에 가족들이 이야기하는 시간도 많아졌고 유기견에 대한 이슈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전해줬다. 우리는 소식과 함께 보내주신 큰 선물을 유기견 보호소에 기부하면서 그 고마움을 나눴다. 영옥이와 닮았다는 이유로 시작된 임시보호가 다른 유기견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나비효과를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아직 주변엔 이름 없는 수많은 아이가 안락사 위기에서 원치 않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 오늘도 그 아이들이 또 다른 살구가 되어 공고번호가 아닌 예쁜 이름으로 불려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