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야기 채집가 Jan 27. 2022

미싱타는 여자들

제2의 전태일이 기꺼이 되어주었던 여자들, 그들의 이야기 

내가 하고 있는 작업이 여성 생애구술사 발간 작업이다. 

2021년에 인터뷰했던 박영분, 김후자 두 분이 산업체고등학교에 근무했던 분들이라, '미싱타는 여자들' 영화 소개글을 보고서 '꼭 봐야 하는 영화'로 리스트업 해둔 상태였다. 


이 영화는 인트로, 도입부분과 엔딩 장면이 참 인상적이고 아름다운 영화다. 

다소 아프고 우울할 것만 같은 관객들에게,

맑은 하늘 아래 미싱을 앞에 둔 세 여자들의 웃음소리를 깔아둔다.

마치 '너무 우울한 얘기는 아니니까 걱정은 넣어둬'라고 말을 거는 것 같다. 


1970년대만 하더라도 12살, 13살 어린 나이에 학교 대신 공장을 가야하는 여자들이 많았다. 

공부 대신 일터를 가야했던 것은 '가난'때문이기도 했지만 '여자는 공부하면 안된다'는 말도 안되는 관념들 때문이다. 이러저러한 각기 다른 이유와 저마다 다른 곳에서 평화시장에 들어왔지만 미싱 앞에 가면 모두 똑같았다. '7번 미싱 시다'. 아침부터 밤10시까지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미싱 앞에 꿇어앉아 일을 해야 했다. 그냥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그러다가 전태일 1주기에 사장들은 그냥 집에 가라고 했다. 그날 전태일이 깡패가 아니라는것을 소녀들도 알게 되었다.  '근로기준법'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고, 노조를 알면서 사람들은 조금씩 모이기 시작했다. 

배우는 것이 얼마나 기뻤는지, 일이 아무리 늦게 끝나도 '노동교실'로 달려갔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은 그들 모두의 어머니가 되었고, 배움에의 갈증으로 모두 일이 끝난 후에는 학생이 되었다. 


단지 배우고싶었을 뿐인데, 나라는 그들이 모이는 것을 막았다. 그 당찬 여자들은 온몸으로 그것을 거부했다. 구속된 이소선 '어머니'를 풀어달라고 했고, 노동교실 문을 닫지 않게 해달라고 요구했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연행이 되어 구치소로 끌려가고, 몇몇은 구속되어 형을 살게 된다.


"대학생들은 화장실도 마음대로 가고 사식도 마음대로 먹을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화장실도 제대로 못가요. 쌍년이 데모는 알고 한거냐고, 빨갱이 아니냐고 때리면서. 속옷을 15일간 못갈아 입어서 사타구니가 다 헐었어요."


울분과 저항에도 그들은 등급을 매겼다. 대학생의 분노와 미싱 시다의 분노에 다르게 값을 매겼다. 그녀들도 그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비참했다. 그것이 우리의 1970년대이다. 야만의 시대다. 


이 영화는 그 후 한번도 제대로 꺼내놓지 못한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어준다. 

여러 가지 상처로, 서로 간의 오해로 조금씩 멀어지거나 연락이 끊겼다. 스스로 그 기억을 묻어두기도 했다. 떠올리면 아프기 때문이다. 그들의 10대 청춘이 아팠고, 지금 그것을 떠올리는 자신이 아프기 때문이다. 

제2의 전태일은 여자가 되어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했다는 고백이 눈물겹다. 

그때의 여자들은 기꺼이 제2의 전태일이 되었다. 다만 그것을 기억하거나 알아봐주는 우리가 없었을 뿐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갑작스럽게 '훅'들어온다.

13살의 사진을 쓰다듬는 그 손길에서 북받쳐오른다. 

그들은 못 먹고 못 배운 소녀들이었지만, 흑백 사진 속의 그녀들은 티없이 밝고 맑은 청춘들이다.

과거의 자신에게 '그래도 잘 살아주어 감사하다'고 말하는 50대의 그녀들이 있다. 

그 청춘의 일부를 '상식'과 '노동'을 위해 기꺼이 내어준 그녀들에게 감사하다. 

가장 가난하고, 가장 가여운 여자들에게 그렇게 빚진 것이다. 


영화를 보기 직전, '이재문 열사의 사모님 김재원님 별세' 문자가 떴다. 

이소선이 전태일만의 어머니가 아니라, 가난하고 못 배운 여공들의 어머니, 

상처 가득했던 야만의 시대를 품어준 어머니였다는 사실을 뒤늦게나마 깨달았다. 

그 어머니의 품에서 위로받았던 어린 여공들과 청년들은 얼마나 많았을까.


전선이 조금씩 더 뒤로 뒤로 좁아지고 있다.

하청에 하청, 고등학생까지 내려가는 가혹한  

노동의 가치와 인간으로서 권리를 지키고자 사람들의 전선은 더욱 위태롭다.

부끄럽지만 수많은 '미싱타는 여자들'에게 빚진 시대적 부채를 

새로운 '미싱'을 위태롭게 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갚아야지 싶은 영화다. 

이제 그 누구도 미싱 그 너머로 떨어져서는 안된다. 

   


작가의 이전글 나는 생존자입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