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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괭이네 집 Sep 22. 2020

'덕질'의 우주에서 정세랑을 만나다

너의 덕질일기17

고등학교 입학 후 치른 두 번의 시험으로 초특급 멘붕(사실은 예상 가능했던 현실이지만)을 맞이한 이후,  지난 두 달 동안 우리 모녀의 일상은 급격히 변화했다. 덕질에 쏟았던 열정으로 공부라는 것을 해보자는 당찬 포부로 이름하여 엄마표 섬머스쿨을 시전 했던 것이다.


결과는 아직 미지수. 그러나 확실한 건 엄마표 공부란 아무나 하면 안 된다는 지극히 올바른 깨달음을 얻게 해 준 시간이었다는 점이다. 그녀의 만족도와는 별개로, 엄마인 나의 삶은 말 그대로 초토화되었기 때문이다. 학교만 가면 나아지리라 했던 나의 희망과 달리, 코로나 19로 인해 학원마저 원격수업이 되면서 9월까지도 우리의 섬머스쿨은 장장 2개월 코스로 지속되었다.ㅠㅠ


그녀의 등원과 등교가 재개되면서, 나 역시 일상을 되찾았다. 그리하여 나 역시 오랜만에 나의 덕질을 다시 시작하였으니, 내가 애정하는 정세랑 작가의 작품을 다시 들입다 파기로 결정한 것이다. 정세랑 작가와 다소간 안면이 있는 사이라 대놓고 덕심을 드러내긴 조금 쑥스럽지, 그래도 뭣이 중할까? 그저 그의 작품을 읽는 것만으로도 늘 행복한데~~


물론 책이라면 담을 쌓은 우리집 그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혀를 내두르지만, 비단 안구정화만이 덕질이겠느냐 정서적 정화도 덕질의 아름다운 영역인 것을.



그리하여 다시 읽은 정세랑의 「지구에서 한아뿐」은 그간 엄마의 삶에 찌들었던 나의 연애세포는 물론, 내 스타일의 덕질을 가능하게 주었다. SF와 로맨스의 외피를 두르고, 오늘의 사랑을 특별하고도 독특한 관점으로 바라본 작품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과거였다면 어쩌면 나는, 사랑을 위해 몇 만 광년이 떨어진 우주에서 지구로 온 한 남자의 '직진'뿐인 사랑에 열광했을 것이다. 오직 한아라는 한 존재를 위해 자기의 온 세계를 내어주고 그녀의 남자 친구이라는 외피를 얻은 이 남자 외계인 경민. 그리하여 시작된 지구적인 사랑 적응기는 지극히 비현실적이라 오히려 현실적인 매력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나를 매료시킨 지점은 새로워졌다. 주인공 한아와 외계인 경민의 사랑이 오히려 서브 스토리처럼 느껴지게 만든 또 하나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본투비 덕후'인 주영이라는 인물이다.


주영은 세계적인 한류스타인 아폴로의 덕후로, 팬클럽 회장까지 거머쥐었으니 반은 '성덕'의 반열에 올랐다 하겠다. 아폴로에서 시작되어 아폴로로 끝나던 주영의 일상이 부서진 지점은, 주인공 한아와 외계인 경민의 만남이 시작된 시간과 맞물린다. 지구인 경민처럼 유성우를 보기 위해 캐나다로 갔던 아폴로가 실종되고 만 것이다.


아폴로의 실종은, 주영으로 하여금 자기 세계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한다. 놀라운 것은 그 결과가 일상으로의 복귀가 아닌, 지구라는 일상으로부터 우주적인 삶으로의 전이었다는 사실이다.


주영은 아폴로의 실종에 의문을 품고 추적하던 중 외계인 경민과 한아를 만나고, 아폴로가 우주로 떠났음을 알게 된다. 그녀가 지구가 아닌 우주에서의 삶을 선택한 것은 필연적이다. 더 이상 지구에는 아폴로라는 그녀의 모성(母星)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영은 자신이 선택한 세계(아폴로)에 들어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정한 궤도를 그리는 그 거리감을 유지하기 위해 지구에서의 삶을 버린다.


지구에서 한아뿐이 보여주는 매력이 여기서 뿜뿜~~!!! 정세랑 작가는 '덕질'의 가치를 무려 우주적인 사랑으로 전환해버렸다. 우리집 그녀의 덕질을 오랜 시간 관찰해온 나에겐 그야말로 '이심전심'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덕질’에 대한 평가를 떠올려 보라. 여전히 너무나 자주 무시되고 간과되며, 때로는 한심하다는 평가에 직면하기도 한다. 실제로 우리집 그녀의 덕질에 열심히 합류하고 있는 나 역시 그런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하지만 정세랑의 해석은 다르다. 지구에서 한아뿐에서 아폴로와 주영의 관계를 통해 드러난 스타와 팬의 관계는 모성(母星)과 위성(衛星), 태양과 행성 간의 궤도라는 우주적 질서 속에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서사적 매력이 넘치는 정세랑 작가에 대한 나의 '덕심'이, 이로써 다시 한번 레벨업이 되었다.



게다가 더 좋은 건, 나의 덕질은 이제부터 제대로 시작이라는 점이다. 다가오는 2020년 9월 25일이면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바로 이 보건교사 안은영을 만나볼 수 있다. 원작자인 정세랑이 극본에 직접 참여한 만큼 어떤 시너지가 날지... 기대 또 기대 중이다.


문제는 하나, 우리집 그녀를 설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덕질은 나눌수록 더 즐거우니까. 사실 우리 모녀는 무조건적인 '얼빠'이니까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닐 것 같다. 정유미 배우와 남주혁 배우가 분한 안은영과 홍인표의 매력을 어찌 외면할 수 있으랴. 아마도 <보건교사 안은영>을 통해 우리집 그녀도 조금은 눈을 뜰 수 있지 않을까?


이제 남은 건 정주행뿐이다.


* 이 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문화 톡톡에 실린 [류수연의 문화톡톡-정세랑이라는 세계] 초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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