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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제라도봄 Mar 13. 2024

십 년간의 양말전쟁

지적보다는 칭찬으로!

양말을 벗어 바로 빨래통에 넣지 않는 것은 신혼 때부터 이슈였다. 가장의 무게를 지고 발에 땀이 나도록 일하는 남편에 대한 존경과 감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무게를 나눠지려 맞벌이를 하는 아내가 거실 여기저기 널브러진 양말을 매일 빨래통으로 옮기는 것은 그리 유쾌하지 않다. 여름이라면 더욱더.


이 부분을 그에게 충분히 설명했다. 별거 아니라 느끼겠지만 나로서도 별거 아니라서 더 화가 나기도 한다고 기분 상하지 않게 조곤조곤 설명도 해봤고, 아무 데나 벗어놓으 양말은 다 버려버리겠다고 협박도 해보았다. 당근도 채찍도 효과는 일주일이 최대치였다. 빨래를 그에게 시키면 되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겠으나 아파트에서 밤 9시 넘어 세탁기를 돌리는 것은 매너가 아니기에 그보다 출근은 늦고 퇴근은 빠른 내가 가사를 더 분담하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엄마가 되고부터 동경해 왔던 '엄마학교'의 서형숙 선생님의 학생이 되었다. 선생님의 책만큼이나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는데 수업 중 선생님이 우리 집의 양말전쟁과 같은 경험을 이야기해 주셨다. 평소 남편분이 아무 데나 양말을 벗어놔서 매일 그걸 치우는 게 일이었는데 어느 날 남편이 병원에 입원하니 더 이상 여기저기 있던 양말이 없다는 걸 깨닫고 그 후로는 양말을 치우면서도 "건강하니 양말도 벗어두는 거다."면서 하니 기쁜 마음으로 가능하셨다는 것이다.


그래, 내가 세월호사건 이후 아이들에게 매일 하던 잠들기전 인사와 결이  같다. '오늘 하루 건강하게 아프지 않고 다치지 않고 지내줘서 고마워. 무탈하게 내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 그래 그런 마음을 남편에게도 내어보자.


2015년 9월 그날부터 집에서 실행해 보았다.

'그래 병원에 입원하지 않아서 벗어놓은 거야.'

'아프지 않고 열심히 일하고 와서 힘드니 그런 거야.'

'병원에 입원했으면 여기다 벗어둘 수 없었겠지.'

'병원에 입원하면 정말 여기 양말이 없겠지?'

그렇게 약 열달즘이 지나며 나의 초심은 바닥나고, 2016년 여름 기록적인 폭염에 지친 어느 날 그의 양말을 빨래통에 집어던져 넣으면서 나는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아우, 저 자식을 병원에 집어넣던가 해야지!!!"


그날 밤 정말 충격을 줘야겠다는 마음으로 화는 가라앉히고 진지하고 단호하게 남편에게 이야기했다. 그간 당신이 살아 돌아와서, 병원에 입원하지 않고 건강하게 집에 있어서 감사하고 다행이란 마음으로 양말을 치웠다고, 근데 그 마음이 계속 지속되지 않는다고. 요즘처럼 더워서 힘이 들면 머리에 꽃 달고 각설이 타령을 부르게 될 거 같은데 괜찮겠냐고!


착한 남편은 '살아 돌아와서'가 감격이었는지 '각설이 타령'이 충격이었는지 양말을 신경 써서 빨래통에 넣어줬다. 그러나 또 열흘 즘 지난 시점부터 더더더 이해하기 힘든, 아니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현상이 벌어졌다. 더 이상 '아무 데나' 벗어두지는 않았다. 그런데 빨래통에 넣지도 않았다. 빨래통 앞에 양말을 고이 벗어두기 시작했다. 하루 이틀은 벗어놓고 깜박했겠지 하는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아니 속마음은 사실 폭발시킬 분노를 응축하고 있었다.

당시 모습을 오늘 아침 재현해 보았다.


그 며칠간 나는 온갖 소설을 썼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인가? 무언의 반항인가? 이는 건가? 나랑 살기 싫다는 의미일까? 분명 여기저기 벗어두는 것보다 번거로움은 줄어들었으나 더 깊은 빡침이 올라오는 것은 왜일까? 꾹꾹 누르다가 마지막 이성의 끈을 놓기 전에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당황스럽게도 그에겐 어떤 악의도 저의도 없었다. 아니 기억도 없었다.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거짓말은 아니다. 아니 사실 본인은 기억도 제대로 못하고 있었고 계속 잘하다가 하루이틀 실수한 걸 지적받는 건 아닌지 억울해했다.

 

그날 병원에 입원시켜버리고 싶다고까지 생각했던 그전 여름의 속내까지 다 쏟아냈다. 당신의 양말이 평온한 일상을 갉아먹고, 10년째 나에게 소설을 쓰게 한다고. (결국 소설은 아니지만 글감이 되었다. 고마워 신랑!) 그렇게 나의 애원 섞인 절규로 우리의 10년간의 양말전쟁은 큰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내는 해에 막을 내렸다.


그러니 가끔 두 아이들이 양말을 벗어두고 빨래통에 넣는 걸 까먹어도 나는 화가 나지 않는다. 남편은 마흔에 완성했으니 외려 잘 넣는 날 칭찬을 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아빠보다는 학습속도가 빠르다. 많은 소아정신과 선생님이 말씀하시듯이 지적보다는 칭찬이 효과가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남편에게도 지적대신 잘 한 날 칭찬을 했어야 하나 뒤돌아보게 된다. 여성심리학은 따로 있지만 남성심리학이 따로 없는 이유는 아동심리학에 들어가기 때문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머리를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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