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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소연 Dec 17. 2019

ADHD가 살아남는 법


                   

세수를 하다가 자기 손가락에 콧구멍이 찔려서 코피가 나는 인간이 몇이나 될까.     


나는 덜 떨어진 인간이다.

그것도 아주 여러모로.     


유치원 시절, 나의 멜로디언 솜씨에 놀란 부모님께서

‘이 아이가 천재가 아닐까’ 하며 가르친 피아노는 4년을 넘게 배웠지만 결국 바이엘 상권밖에 떼지 못했다.

왜?

피아노는 멜로디언과 달리 두 손으로 치는 것,

나는 양손 협응이라는 게 안 되는 인간이었던 거다.

양손 협응만 탓할 순 없다.

초등학교 다닐 때, 전교에서 공기놀이를 못하는 아이는 나 밖에 없었다. 불행이도 나는 멜로디언을 제외하면 한 손으로 하는 일에도 큰 재능이 없었다.     


살림이란 걸 시작하니 더 끔찍한 일들이 매 순간 일어난다.

내 손에는 거의, 언제나, 늘 밴드가 감겨있다.

야채대신 손가락을 써는 일이 더 많아서다.

아이가 기저귀를 차던 무렵엔 수도 없이 그 기저귀를 세탁기에 넣은 채 빨래를 돌려 온 세탁물에 투명 끈끈이 알갱이가 들러붙게 했다.

절대!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다음 빨래도 다음 빨래도 나는 세탁통에 딸려 들어간 아이 기저귀를 걸러내지 않고 세탁기를 돌렸다.

하루 종일 하는 집안일의 팔 할은 내가 저지른 걸 수습하는 거다.     


어린 시절 학교 조회 시간이면 늘 궁금했다.

어떻게 다른 친구들은 저리 꼼짝도 않고 한 자세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일까.

영화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꼿꼿하게 흐트러짐 없이 영화를 보고 있는 다른 관객들에게 늘 감탄했고

결말이 맘에 안 들면 내가 만든 새로운 결말을 실재처럼 믿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너무나 명백히 사망한 주인공이 내 기억 속에선 살아남은 채 영화가 끝났고 (예를 들면 봉준호 감독의 <괴물>).

댓돌 위에 놓인 청춘남녀의 신발 위로 펑펑 눈이 내려 쌓이며 그 씬이 페이드 아웃되어도 그 신발의 임자인 여자가 임신을 했을 때 그 기원을 이해하지 못했다.(예를 들면 MBC주말 연속극 <아들과 딸>속의 최수종, 채시라 커플)     

이런 적도 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함께 본 친구에게 말했다.     

“와, 신기하다. 이 영화는 어떻게 여자들만 보러왔니?”     

친구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그 말을 한 장소가 여자 화장실이었던 거다.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주의 집중과 양손협응이 안 되는 실수투성이 인간으로 나만의 세계에 혀...   

  

나의 덜떨어짐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은 있었지만 정확히 깨닫게 된 건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간 이후였다.

아이의 담임 선생님께서 애가 엄말 많이 닮았다고 말씀하신 일이 있다.

나는 무슨 소리인가 의아했다.

아이는 나와 달리 논리적인 사고가 발달해 수학에서 특출한 재능을 보였다.

그것 하나만으로 나는 아이와 내가 완전히 다른 인간이라고 믿고 있었다.

성별도 남자와 여자로 다르니 그 아이와 나 사이엔 어떤 접점도 없다고.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니었다. 선생님 말씀이 백번 옳았다.

아이는 나를 닮아 (미안하다 아들) ‘덜 떨어졌다’     


방금 한 질문이 뭔지 기억하지 못하고

늘 물건을 잃어버리고

한 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아무리 가르쳐도 운동화끈을 묶지 못하며

남들이 자길 욕해도 눈치 없이 늘 행복하다.   

  

아이 얘길 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나는 아이를 키우면서 ADHD라고 불리는 증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우리나라 아동의 6.5%가 (2006년 조사) 거기에 해당된다는 통계를 보고 상당히 안도했다는 얘길 하려는 거다.

백 명 중 6~7명.

결코 적지 않은 숫자다.      


내가 어린 시절이던 1970~80년대엔 그런 명칭이 없었다.

다만 교육열 높으신 우리 어머니께서 유명한 심리학 교수님(서울대학교 장병림교수라고 기억하는데 정확하진 않다)께 우리 남매의 지능 검사와 성격 검사를 의뢰했을 때 그 분께서 내 심리 검사 결과지의 어느 한 부분을 콕 집으며 이건 좀 유의하며 키우시는 게 좋겠다고 했던 것이 기억난다.      


충동성     


이라는 항목이었다.

100이 최고 수치이고 점수가 낮을수록 좋다는데 나는 거기서 자랑스럽게도 90점이라는 높은 점수를 기록했다. 지금으로 치면 백퍼 ADHD라고 진단 내려졌을 수치.

하지만 우리 어머닌 당신께 기분 좋은 것만 기억하시고 그 따위 주의사항은 귀담아 듣지 않으셨다.

그 시절엔 선생님들이 많이 무서웠다. 먼 미래에 ADHD라고 불리게 될 증상을 품고 살아남아야만 했던 나는 정신 똑바로 차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다행이도 나에겐 나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 한 필살기가 있었다.     


(자, 이제부터가 본론이다.)     


대개 ADHD들은 산만하고 어수선하며 지저분하고 분위기 파악에 느려서 주변의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한다. 선생님들께도 문제아로 찍히기 쉽다. 그런데도 나는 친구들의 사랑을, 선생님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살아왔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먼저 친구 얘기부터.     


어린 시절부터 최근까지 나는 늘 감사한 일이 하나 있었다.

내가 친구 복이 유난히 많다는 것.

묘하게도 내 친구가 되는 아이들은 백이면 백

글씨도 잘 쓰고 정리정돈도 잘하고 말도 조리 있게 잘하고 외모도 깔끔하고 단정했다. 아니, 아예 못 하는 게 없었다! 라고 해야 옳다.

다들 어쩜 그렇게 잘났는지!

해서 나는 늘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며 그 애들을 칭송했다.  

   

넌 어쩜 이렇게 노트 필기를 잘하니.

넌 어쩜 이렇게 정리 정돈을 잘하니.

넌 어쩜 이렇게 옷을 예쁘게 입니.

넌 어쩜 이렇게 똑똑하니.     


생각하는 걸 무조건 입 밖으로 내 뱉어야하는 나는 늘 친구들을 칭찬했고

도저히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선 마음속으로 깊이 그 애들을 존경했다.

그러다 최근 들어 ADHD며 뭐며 조사를 하다가 깨달았다.

이 세상에 나보다 글씨를 못 쓰고 나보다 정리정돈을 못 하고 나보다 더 두서없이 말하는 사람은 참 드물다는 걸.     

물론 내 친구들이 객관적으로도 평균보다 많이 잘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멀리, 넓게 보지 못하고 자기 세계에만 갇혀있는 나만의 특성 때문에

난 내가 유독 운이 좋아 잘난 사람들과만 친구가 된다고 굳게 믿어 왔었다.

세상 모두가 나보다 잘난 걸 전혀 생각지 못하고 말이다.   

  

어찌되었건 그런 진심 어린 칭찬과 존경심 가득한 내 마음 덕분에 친구들은 나를, 이 덜떨어진 인간을 그들의 친구로 다정히 대해주었다.

늘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한, 그러나 늘 해맑은 옆집 남동생처럼.     


난 선생님들께도 사랑을 듬뿍 받는 제자였다. 때로 정말 존경할 수 없거나 단지 내 취향이 아니란 이유로 반항한 선생님도 아주 약간은 계셨지만 나는 대개의 선생님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는데... 고백하기 조금 죄송스럽지만... 그건 나만의 스킬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 어머니는 선생님이셨다.

그래서 선생님들이 어떨 때 행복한지를 나에게 늘 말씀해주셨다.     


“선생님은, 아니, 모든 사람은 상대방이 자기 얘기를 열심히 들어줄 때 행복하단다.”     


그래서 나는 늘 선생님의 말씀을 열심히 들었다.

눈을 맞추고 고개를 주억거리고 미소 짓고 찡그리고...

그런데 나는 ADHD가 아닌가.

수업시간 내내 (17초 마다) 딴생각이 침범해 들어오는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아마도 내가 연기자가 될 팔자여서 가능했던 것 같긴 한데...


난 선생님 말씀을 하나도 듣고 있지 않으면서도 그렇게 했다.

무슨 내용인지 전혀 모르면서도 선생님과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이고 미소 짓고 그 순간 선생님이 짓는 표정을 따라하는, 소위 리액션이란 걸 열심히 했던 것.  

   

수업시간은 1:1 커뮤니케이션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이 대한민국의 교육현실에서는 그 정도로만 반응하면 된다.      


그래, 니 생각은 어떠니?     


하고 묻는 경우가 없단 말이다.     

 

물론 인생이란 게 친구들 사랑, 선생님 사랑 듬뿍 받는 게 다가 아니다.

ADHD가 있건 없건 인생은 고(苦)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살아낼 밖에.     


다행이도 나는 글 쓰는 걸 좋아한다.

수도 없이 지우고 고치고 새로 쓰는 작업을 통해서 산만한 내 생각을 조금은 선명하게 정리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 나 자신을 기 살려주려고 글을 쓴다. 그리고 글을 쓸 때 만큼은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알지 못한다.

상당수의 ADHD들이 나와 같다. 자신이 집중하는 분야에서만큼은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낼 수 있다.

사람은 비슷비슷한 크기의 집중력 배터리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걸 지혜롭게 균일하게 오래 오래 쓸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금 작은 용량의 배터리를 가지고 온 탓에 한 두 군데에만 집중해 써야하는 사람도 있다. ADHD는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남들보다 조금 작은 용량의 집중력 배터리를 가지고 세상에 온 사람들. 평소에는 그걸 쓸 수 없고 진짜 중요한 일을 할 때만 그걸 쓸 수 있는 사람들.

심하면 치료를 받는 것이 옳지만 대개는 후천적 노력과 성장 발달의 자연스런 과정에서 어느 정도 완화가 된다. 세상을 바꾼 사람들 중에도 ADHD증상을 가졌으리라 추측되는 사람들이 많았다. (자주 거론 되는 인물로 에디슨, 윈스턴 처칠,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이 있음)     


자신이, 자신의 자녀가 ADHD가 아닐까 의심 되는가?

그렇다면 요런 노력도 한 번 기울여보자.

     

진심으로 타인을 존중하고 그의 장점을 찾아 칭찬하고

그의 얘기에 풍부한 리액션으로 귀 기울일 것.

내게 부족한 점이 있다는 것을 쿨하게 인정한 후

진짜 좋아하는 일을 찾을 것!     


진짜 좋아하는 일은 어떻게 찾느냐고?

그건 그리 어렵지 않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어떤 일을 했는데 그 일을 하고 나서 전혀 허탈하지 않다면

그게 당신이 진짜 좋아하는 일이다.       

                  

(ADHD와 제가 가진 양손 협응능력 부족은 상관 관계가 없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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