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겨울, 생후 2개월 된 마티즈 한 마리가 양말에 담겨 우리 집으로 왔다. 꽉 쥐면 터질 것만 같던 그 작고 보드랍고 몽클거리는 생명은 아침마다 내 온 얼굴을 핥으며 침대 위를 날아다녔다. ‘기쁨이 샘솟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 첫날밤을 보내고 난 아침, 그 혓바닥 세례 속에서 강아지 이름을 ‘샘물이’라고 지었다. 기쁨의 샘물.
그 후, 강아지 혼자 오래 두면 우울증에 걸린다는 핑계로 내가 다니는 모든 곳에 샘물이를 데리고 다녔다. 심지어 방송국 스튜디오 안까지 개를 데리고 들어가 녹음을 했다. 천만다행 샘물이는 좀처럼 짖지 않는 강아지였고 제작진 역시 한없이 좋은 분들이었다. 게다가 개주인은 눈치가 영 젬병이었다.
샘물이는 내 삶을 많이 바꿔 놓았다. 작은 원룸이 답답할까 하여 더 넓은 집으로 이사도 했고 즐기지 않던 산책도 거르지 않았으며 밤의 술자리는 자연히 모두 접게 되었다. 결혼할 남성의 제1 조건도 내 개를 사랑해줄 수 있는가, 로 수정되었다. 다행이 나보다 더 개를 사랑하는 남편을 만나 샘물이는 두 배의 사랑 속에 공주님 대접받으며 잘 커나갔다. 그러다 내가 임신을 했다. 샘물이의 견생은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더 이상 주인들과 함께 한 침대에서 잘 수 없었고, 길고 탐스런 털은 바짝 잘라내야만 했다, 아기가 태어난 후 삼칠일은 아예 남의 집으로 유배 보내졌다, 집안 곳곳엔 울타리가 설치되었고 샘물이만을 위한 산책, 털 빗고 단장하기, 장난감 놀이 등의 시간은 점점 사라져갔다. 그렇게 집 안의 찬밥이 되어가던 샘물이는 우리 아이가 혼자 힘으로 식탁에 앉아 식사를 시작하던 무렵부터 새로운 존재 의의를 찾게 된다.
이름하여 ‘특수요원 안샘물’. (샘물이는 나와 성이 같다)
식사 때마다 식탁 밑에 대기하고 있다가 아이가 흘린 음식을 잽싸게 주워 먹는 것이 임무인데 이건 샘물이와 아이, 나 모두에게 아주 행복한 일이었다. 사료 외의 음식을 먹을 기회가 별로 없던 샘물이에겐 맛난 먹을 것이 생기고 아이는 혼날 일이 줄어들며 나는 걸레질하러 일어서는 대신 식사를 계속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5~6년 간 생의 활기를 되찾았던 특수요원 안샘물에게 슬픈 변화가 찾아왔다. 우리 아이가 웬만해선 음식을 흘리지 않게 된 것이다.
더 이상 특수요원일 수 없는 샘물이가 택한 전략은 애처로운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것이다. 개를 키워본 사람은 안다. 그 눈빛이 얼마나 사람의 애간장을 녹이는지. 우리 가족은 매 끼니 때마다, 간식을 먹을 때마다 고민한다.
‘샘물이의 나이 이제 열 네 살. 몸에 좋다는 사료만 먹는다면 더 오래 우리와 살 수 있겠지, 하지만 먹는 순간의 기쁨도 중요하지 않을까? 즐거우면 생명이 더 늘어날 수도 있을 텐데.’
어떤 날은 우리 곁에서 더 오래 살아 줬음 좋겠고 어떤 날은 지금 당장 더 행복해하는 걸 보고 싶다.
어떤 게 옳은 것일까?
오래 살 것인가, 지금 이 순간 행복할 것인가.
그 적절한 균형 찾기가 참으로 어렵다.
(이 글은 인터넷 신문에 연재했던 칼럼 중 한 편으로 올해 나온 책 <그를 만나고 말테다!>에도 수록됐던 것인데 오늘 새로 올리는 글 <샘물이를 떠나보내고>를 이해하시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함께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