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알라룸푸르에서 70일간의 여정을 마치며
단풍이 지던 가을에 쿠알라룸푸르로 떠났던 아들과 나는 겨울비가 내리는 아침에 한국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아이 엄마로, 때로는 아내이자 잔소리꾼으로, 좋은 친구, 막내며느리, 의지가 되는 딸 등의 페르소나를 상황에 맞춰 번갈아 쓰다, 쿠알라룸푸르에서는 오롯이 한국에서 온 여행자이자 아이의 엄마로 써야 하는 가면의 수가 확연히 줄어 홀가분했고, 비교적 잘 적응해 편안하게 지냈다 생각했는데, 타국에서의 생활은 무의식 중에 늘 긴장을 하고 있어서인지 모든 것이 익숙한 집으로 돌아오니 그간의 긴장이 풀리면서 아이도 나도 몇 시간을 내리 잠들었다.
푹 자고 일어나 두 달 하고 열흘이 넘는 시간 동안 보고 싶었을 손자를 만나러 온 친정 엄마 덕분에 떨어져 지내며 늘 마음이 쓰였던 우리 집 노견과 단 둘이 집을 나섰다. 평소 가던 동네 산책길을 걸어 단골 카페에 도착해 따듯한 커피 한 모금 마시고 나니 비로소 내가 집으로 돌아왔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다.
잘 다녀왔다. 그래서 무엇을 얻었냐고 묻는다면,
3세 아이와의 여정은 영어 교육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었다. 물론 유치원에서 영어만 사용하는 말레이시안 선생님과 지내며 짧은 영어 문장을 조금 구사하고, 반쯤은 얼버무리는 영어 노래를 흥얼대는 모습에 아이가 영어를 습득한 점은 엄마로서 당연히 기특한 일이지만, 내가 아이에게 주고자 했던 이번 여정의 경험은 학습으로 익히고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다양한 인종과, 종교, 언어를 편견 없이 접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학교와 직장에서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을 줄곧 들으며 살아왔다. 그런데 살아보니 세상을 바꾼 게임 체인저들은 모두 덕후스런 ‘모난 돌’ 들인데 말이다. 모두가 엇비슷한 생김새의 단일 민족 국가여서일까? 성격도 외모도 튀는 것을 용납 못하는 분위기에 자신이 속한 집단의 피어(peer)에 맞추는 것이 가장 중요한 한국 사회에선 어쩌면 다양성을 수용하기도 교육을 통해 가르치기도 너무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쿠알라룸푸르 생활을 통해 아이가 피부색과 종교의 편견 없이 모두와 지내는 것을 배운 이 경험이 이번 여행에서 받은 가장 큰 선물이다. 그리고 어디서나 아이에게 따듯이 인사를 먼저 건네는 말레이시아 사람들과 매일 등, 하원길에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아이는 존중 받음을 느꼈을 것이고,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이웃들에게 그가 이곳에서 배운 대로 먼저 인사를 건네게 되었다.
아들이 살아갈 그들 세대의 세상은 적당히 스펙을 쌓아 평범하게 일하는 제너럴리스트의 세상은 저물고 국적에 상관없이 다양한 인종과 문화에 대해 이해하고 자신만의 분야에서 덕후처럼 전문성을 보이는 이들이 성공할 세상으로 바뀌고 있다. 영어 또한 변별력을 위한 학습이 아닌 세상을 살아가며 편리하게 이용하는 도구로 여길 것이다. 지금도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의 최연소 임원은 인도 출신이라는 것이 더는 특별한 이야기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반복되는 육아에 지치지 않을 엄마는 없을 터인데, 이 시기를 여행하듯 지내며 하루하루 작은 추억을 쌓고 오롯이 아이에게 집중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했다. 나는 더 이상 식당에서의 혼밥이 쑥스럽지 않은 이가 되었고, 어학원을 다니며 영어를 의사소통에 필요한 도구로 여겨 내 의견을 말함에 있어 틀리더라도 망설이지 않게 되었다. 중년에 나이에 다시 학생으로 돌아가 딱딱한 의자에 앉았던 어학원 수업과 아이의 등원 후 주어지는 반나절의 시간을 좋아하는 커피집을 찾아 도시 여행을 다닌 것도 훗날 시간이 지나도 한 번씩 꺼내어 웃음 짓게 하는 내 삶의 보석이 된 것 같다.
살아보니 인생의 장애물은 타인 혹은 환경이 아니라 내 스스로가 만든 편견과 낡은 선입관이었다. 경험이 적으면 무지를 낳고, 그 무지함이 비판적인 의견만 쏟아내는 편견이 되더라. 나 또한 이곳에 오기 전엔 히잡을 두른 모습에서 그들의 종교만 보았는데 일상에서 매일 접하고 눈에 익으니 자연스러운 복장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말레이시아 역시 표면적으로 잘 어우러져 보이는 이면에는 우리네 지역감정 못지않은 인종 간 표출되지 않은 갈등이 있다. 다만, 이 갈등이 극에 달해 유혈사태로까지 번진 아픈 과거의 역사를 갖고 있기에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걸 말레이시아 국민들은 인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 그들의 태도가 이방인의 눈엔 조화롭게 어울려 살아가는 다민족 국가의 모습으로 비칠 것이다. 어찌 되었건 여행자로서 깊은 내막까지는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이곳은 다민족 문화의 용광로로서 다문화를 한 번에 경험할 수 있는 곳임에 틀림이 없다. 한국보다 상대적으로 조금 낮은 물가에 동남아시아 국가들 중에선 치안이 비교적 안전하고 북미나 영국보다 가까운 지역에서 영어 생활권을 경험시켜 아이에게 영어에 대한 동기 부여와 자신감을 심어주고자 한 달 살기를 계획하고자 하는 이들에겐 첫 도시로 그만일 것이다.
그리고 한 달 살기의 이유
나와 아들에게 쿠알라룸푸르의 숙소였던 ‘몽키아라’와 아이와 처음으로 단 둘이 비행에 나섰던 ‘페낭’, 그리고 남편이 합류하여 떠났던 ‘랑카위’를 여행하며 길 위에서 도움을 준 이들을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을 정도로 많았고, 그들이 있었기에 이 여정은 보다 즐겁고 값진 경험이었다. 몽키아라에서 새로이 사귄 이들과 찰진 한국어로 이야기를 나누며 떼쓰는 아이를 등원시키고 별 것 아닌 음식도 이들과 나누어 먹었기에 더 맛있었으며, 때로는 구수한 사투리 한마디에 마음이 따듯해졌다. 페낭의 경찰관들 덕분에 아들은 그의 영웅인 삐뽀삐뽀 님들과 사진 촬영을 하였고, 체코에서 온 소년 덕분에 랑카위에서의 난처했던 순간이 행복한 기억으로 바뀌었다.
우리 부부는 이번 여정의 끝을 열흘 간 함께 하며 아이에게 재화를 물려주기보단 다양한 경험과 아이가 간직할 부모와의 추억을 부지런히 만들어 주기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래서 나는 아들과 또 새로운 여정을 꿈꾸게 되었고,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쿠알라룸푸르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두 번째 여정은 좀 더 면밀히 준비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한 달 살기를 꿈꾸고 실행할 대한민국의 엄마와 아이들의 건강과 안전을 기원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