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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ko Jan 04. 2020

랑카위 해변에서 만난 등번호 7번

데꾸이 (Děkují) 감사합니다.

랑카위에서 우리 가족이 묵었던 '펠랑기 리조트'는 매 년 12월 31일 저녁에 새해맞이(great new year's eve party) 카운트다운 파티를 리조트 앞 해변에서 성대하게 치른다. 저녁 뷔페와 주류 면세 지역답게 무제한 주류가 포함된 식사와 저녁 9시부터 자정까지 다채로운 공연이 펼쳐지는 형식인데 이 시즌에 숙박을 하는 투숙객은 대부분 이 행사에 참여한다.  파티 시간에 맞춰 예약해 둔 자리로 가니 테이블 위에 미니 폭죽과 파티용 가면, 카운트다운 때 사용할 나팔 등 파티 분위기가 실컷 나게 다양한 소품도 준비되어 있었고, 쿠알라룸푸르에서 지내는 내내 목 늘어난 반팔티만 입고 다니던 나도 모처럼 리틀 블랙 원피스를 입고, 아들도 긴 팔 셔츠를 입혔다. 머리에 얹었던 큼직한 헤어핀은 유난스러워 보일까 방에 두고 나왔는데, 파티 장소에 도착하니 유럽에서 온 여성들은 모두 화려한 눈 화장과 파티 드레스를 입고 나온 것이 아닌가. 혹시 몰라 여행 가방에 늘 갖고 다니는 리틀 블랙 원피스가 없었더라면 뻘쭘했을 것이다.


펠랑기 리조트 파티 뷔페 Meritus Pelangi Beach Resort & Spa

화려한 데코레이션의 케이크와 말레이시안 전통 디저트인 '첸돌'을 만드는 빙수 기계도 들이고, 양을 통으로 굽고 어린아이의 팔뚝만 한 사이즈의 타이거 새우와 꽃게 구이 등 한해를 마감하며 준비된 저녁 뷔페 음식들도 잔칫집답게 다채로웠고, 리조트 로비와 해변 무대에선 흥겨운 공연이 계속되어 어깨를 들썩이며 즐겁게 식사를 하였다. 아이도 흥겨운 음악과 맛있는 식사에 기분이 좋은지 연신 흥얼흥얼 노랫소리에 맞춰 콧노래를 불렀고 맥주와 와인을 사랑하는 남편은 파티 초반부터 기분 좋게 취기가 오른 모습이었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해변 공연 무대로 자리를 옮겼다. 공연은 말레이와 인도의 전통 춤과 유행하는 팝송 그리고 중간중간 귀에 익은 올드 팝을 적절히 섞어 전 연령대가 즐겁게 즐길 수 있었다. 해변 파티다 보니 드레스를 차려입고 모두 신발은 신지 않은 채 말이다. 우리가 투숙한 기간에 독일과 영국에서 온 대 가족 단위의 투숙객이 가장 많았다. 음습하게 춥고 해가 짧을 유럽의 겨울을 피해 햇살이 가득한 이곳으로 왔으리라. 해변 공연 무대 앞 모래사장은 리조트에 놀러 온 아이들이 모두 모인 듯 군데군데 무리를 지어 모래놀이도 하고 공연 음악에 맞춰 춤도 추며 즐겁게 놀고 있었다. 무대 근처에 자리를 잡으려 두리번거리는 동안 아들은 벌써 무대 앞 아이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아들의 나이는 3세, 정확히 27개월이 되었다. 말이 조금 빠른 편이라 간단한 의사표현을 하고 쿠알라룸푸르의 유치원에서 다른 국적의 아이들과도 제법 어울릴 줄 알지만, 그건 선생님의 지도하에 가능했던 일이고 어떻게 어울려야 하는지는 제 나이답게 아직 서툰 녀석인데 문제는 아들이 요샛말로 너무도 '인싸' 한 성격이라는 것이다. 낯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좋아하는 아들은 이곳 쿠알라룸푸르에서 지내며 어딜 가나 아이에게 인사를 건네고  친절한 성향의 말레이시안들 덕에 더욱 그 성향이 두드러졌다. 70일 간 다니고 있는 몽키아라 유치원 가정통신문에도 빠짐없이'outgoing, mingle'이라는 단어가 반복적으로 기입되어 오는 아이다 보니 해변 무대 앞에 모여있던 아이들에게 당당히 끼어들게 불 보듯 뻔하기에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아이 근처에서 한 발작 떨어져 지켜보았다.


삼삼오오 모여있던 아이들 중 유치원생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들 무리 앞에 턱 하니 앉은 아들은 그 아이들이 쌓고 있던 모래성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나는 어느 시점에 끼어들어 아들을 데리고 나와야 할지 고민을 하며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한눈에 봐도 그 여자아이들은 아들을 달가워하지 않아 보였다. 해변 파티라고 하얀 원피스를 맞춰 입고 영국 국기를 들고 있던 아이들은 3세 아기가 자신들이 만든 공주님 성에 흠집을 내는 것도, 반가움에 표시로 모래를 뿌리는 것도 포용할 수 있는 정도의 나이도 아닐뿐더러 낯선 동양 남자아이의 갑작스러운 등장이 불편했을 것이다. 아이들의 입장이 충분히 이해되면서도 못난 애미인지라 괜한 서운함이 밀려와 아이를 데리러 가려던 찰나에 '등번호 7, Ronaldo'라 쓰인 옷을 입은 갈색 머리의 남자아이가 성큼성큼 아들에게 다가갔다. 그 짧은 순간 나는 등번호 7번 소년을 하얀 원피스를 맞춰 입은 여자아이들의 오빠쯤으로 생각되었고 우리 아들의 방해를 보다 못한 오빠가 아이를 끌어내려 간 것이 아닌가 싶어 당황했다. 하필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맥주를 또 갖으러 가 자리를 비운 남편을 원망하면서 말이다.


다정히 내민 그 손이 고마워서


아들에게 다가간 등번호 7번 소년은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처음 보는 형이지만, 소년이 내민 손을 잡고 아들은 그 자리를 나섰다. 예상치 못한 돌발상황에 급 긴장했던 마음이 풀린 나는 내가 리틀 블랙 원피스를 입었다는 것도 잊은 채 그 자리에서 털석 주저앉았다. 아들의 손을 잡은 등번호 7번 소년은 단번에 내가 엄마임을 알고 내 앞으로 아들을 데리고 와 다정히 앉아 같이 모래놀이를 해 주는 게 아닌가. 아들은 자신과 놀아주는 등번호 7번 소년을 바라보며 소년이 만드는 모래놀이를 따라 하고 깔깔 웃으며 즐거워했고, 소년은 나를 향해 중간중간 웃어주며 아들과 놀아주었다.  


등번호 7번 소년 패트릭(PATRIK PAŘÍZEK)

아들과 소년을 지켜보며 남편이 갖다 준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고는 하얀 원피스의 꼬마들에게 중년의 아줌마가 성숙하지 못하게 서운한 마음을 갖은 게 내심 부끄러웠고, 이 천사 같은 등번호 7번 소년은 누구이기에 나에게 이런 마음 뭉클한 감동을 느끼게 하는 것일까 궁금했다. 카운트다운까지는 두 시간 남짓 남았고, 소년은 아들과 모래놀이도 하고 중간중간 음악에 맞춰 춤도 추며 즐겁게 놀아주었다. 한참을 웃으며 말없이 지켜보다 나는 소년에게 이름과 국적을 물어보았다. 소년은 한국 나이로 초등학교 2학년쯤 예상이 되는데 영어도 잘하여 자신의 이름은 패트릭(PATRIK PAŘÍZEK), 체코 리퍼블릭(Czech Republic), 프라하(Praha)에서 왔다고 하였다.

아들과 놀아주는 패트릭

아이를 키워본 부모들은 알 것이다. 3세 아이와 두 시간 가까이 놀아주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말이다. 패트릭은 어떤 이유에선지는 모르겠지만, 새해맞이 카운트다운 5분 전에 가족에게 돌아가 같이 새해 인사를 해야 된다는 말을 남기고 떠날 때까지 아들과 긴 시간을 즐겁게 놀아주었다. 국적도, 언어도, 나이도 어느 것 하나 통할 것 없는 소년과 아들은 그렇게 즐겁게 해변 파티를 즐겼고, 패트릭 덕분에 우리 부부도 아들의 칭얼거림 없이 시원한 맥주를 마셨다. 아이에게 이름을 스마트폰에 적어 달라고 하자 패밀리 네임을 적을 때 계속해서 내 스마트폰에 뭐가 없다고 하며 난감해했다. 한참을 만지작 대더니 아이는 이름을 마저 적었는데 패트릭을 만나고 고마움을 전하고자 체코어로 '감사합니다'를 찾으며 알게 된 사실은 체코어는 하첵(Háček), 챠르카(čárka), 꼬루 우젝(kroužek)이라는 발음 부호들이 있는데 이 발음 부호가 없어 이름을 적을 때 계속 나에게 자판을 찾아 달라고 한 것이었다. 카운트다운 후, 밤하늘에선 화려한 불꽃놀이가 한창이고 나는 평생 써본 적 없는 체코어 인사말을 찾느라 분주했다.


부랴부랴 인사말과 감사합니다를 찾아 아들의 손을 붙잡고 패트릭의 테이블을 찾았다. 혹여, 두 시간 가까이 우리 아들과 놀아주는 동안 정작 패트릭의 부모님이 아들을 찾거나 걱정한 것은 아닐지, 그래서 내가 우리 아들 때문에 그랬노라 설명을 해줘야 하는 건 아닐까 그리고 진심으로 패트릭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다. 패트릭은 아들과 모래놀이를 하던 스탠딩 테이블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할머니, 엄마와 함께 있었다. 나와 아들의 얼굴을 보고 반갑게 웃으며 엄마에게 설명하는 패트릭과 가족에게 다가가 나는 급히 찾아본 체코어로 말했다.


데꾸이 (Děkují) 감사합니다.


내 어색한 체코어 인사에 패트릭의 엄마와 할머니는 환하게 웃으며 악수를 권했다. 내 부족한 영어실력이지만 진심을 다해 당신의 아들 패트릭이 아들과 잘 놀아주어 너무 고맙고 아이가 정말 친절하고 좋은 성품이라고 말하며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했다. 패트릭의 엄마는 기념으로 아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고 우리는 새해 인사와 가벼운 포옹을 나누고 돌아왔다. 랑카위에서 만난 등번호 7번 소년 덕분에 더없이 즐겁고 가슴 따듯했던 랑카위의 해변에서 우리 가족의 2020년이 시작되었다.


해변 파티 다음날 쿠알라룸푸르로 돌아가야 했던 나는 아쉬움에 체크아웃을 담당했던 호텔 직원에게 패트릭의 이야기를 나누며 같은 성(surname)으로 예약된 투숙객을 확인할 수 있는지 그래서 아이스크림과 샴페인을 선물할 수 있는지 문의했고, 펠랑기 리조트에 체코 국적의 투숙객은 패트릭네 가족뿐이라 직원의 도움으로 작은 메모와 룸서비스를 선물하고 리조트를 떠났다.


지금도 그때 왜 패트릭이 우리 아이에게 다가왔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깍쟁이 같던 하얀 원피스의 아이들이 두 손을 들고 갸우뚱거리는 제스처를 우연히 보고 아들의 곤란해질 상황을 느낀 것일까? 패트릭은 영어로 의사소통도 가능하고 비슷한 또래의 유럽 아이들도 해변에 꽤 있었기에 그들과 더 재미있게 놀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패트릭 덕분에 그날 아들도 나와 남편도 너무나 행복했고, 아들은 얼마나 신나게 놀았는지 해변 파티에서 숙소로 오는 길에 기절하듯 곯아떨어졌다.


나에겐 그저 필스너 맥주의 고장으로만 알고 있던 지구 반대편 체코에서 온 소년의 따듯함에, 그에게 메모를 남기며 주책맞게 눈물이 났었다. 영어와 한국어로 두 번 적은 메모의 내용은 언제가 한국에 온다면 언제든지 연락하고 덕분에 랑카위 가족여행과 새해맞이는 최고였다 적으며 마지막엔 데꾸이 (Děkují)를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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