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행복한 그곳
쿠알라룸푸르에서 지내며 누릴 수 있는 즐거움 중 하나가 한국에선 직항이 없는 말레이시아의 휴양지나 인접 국가로의 여행 시, 저렴한 항공권과 이동의 편리함이다. 기존의 한 달 살기 엄마들의 여행 패턴이 쿠알라룸푸르 시내와 조호바루의 레고랜드, 바투 케이브 1일 투어 정도로 국한되었다면, 지금은 점차 많은 엄마와 아이들이 보다 액티브하게 쿠알라룸푸르를 거점으로 가까운 '말라카', '페낭'에 이어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발리, 베트남 달랏, 태국의 끄라비 등 다양한 여정으로 한 달 살기를 하고 있다. 지난달, 아이와 처음으로 국내선을 타고 '페낭'여행을 다녀온 이후, 다음 행선지로 '랑카위'를 선택했다. 사실 연 중, 랑카위 리조트에 가장 비싼 숙박료를 지불해야 하는 극성수기가 바로 우리 가족이 지낸 크리스마스부터 1월 초이다. 이 기간을 제외하면 보다 저렴한 가격에 랑카위를 즐길 수 있지만, 한 해를 마감하는 가족 여행지로 또 작년 한 해 가족을 위해 쉼 없이 달려왔을 남편이 원 없이 게을러질 수 있도록 우리는 '은퇴자들의 낙원'이라 불리는 랑카위로 떠났다
말레이 반도의 북서쪽, 말라카 해협에 있는 랑카위섬은 태국 국경과 맞닿아 있는 곳으로 한국에서 랑카위까지는 직항이 없어 6시간 반의 쿠알라룸푸르 비행 후, 다시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50분을 더 가야 하기에 직항 노선이 보다 풍부한 '코타키나발루'와 태국의 휴양지 섬들보다 한국에 덜 알려져 있고 경유를 위해 대기하고 다시 타는 시간을 포함하면 결코 짧은 이동이 아니기에 한국인이 많이 찾는 여행지는 아니지만, 아이와 쿠알라룸푸르에서 지내고 있는 우리에겐 랑카위가 50분이면 도착하는 가까운 거리라 어린아이와 함께 하는 비행에도 부담이 없었다.
석회질이 많아 옥색 혹은 에메랄드빛으로 보이는 바다와 아름다움 100여 개의 섬 군락으로 이루어진 랑카위는 유네스코 선정 생태공원(Geopark)으로 지정되었을 만큼 풍부한 생태계를 보유하고 있는 곳으로 산과 바다를 모두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이제 27개월이 된 3세 아이와 함께 하기에 좋은 리조트를 검색하던 중, 일몰이 아름다운 체낭 비치 (Cenang Beach)에 위치한 '메리터스 펠랑기 비치 리조트 & 스파(Meritus Pelangi Beach Resort & Spa)'의 공룡 슬라이드를 보유한 어린이 워터파크가 마음에 들어 이곳에서 연말과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
국내선 비행기에서 내려 랑카위 공항에 도착하니 공항 내 출입구 등의 언어 표기에 영어와 함께 아랍어와 중국어 표기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비슷한 시각에 도하 공항을 경유하여 입국한 유럽 여행객들로 작은 랑카위 공항이 일순간 혼잡했지만 이내 다시 작고 조용한 여느 소도시 공항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서둘러 짐을 찾아 그랩을 타고 20여 분 만에 도착한 '펠랑기 리조트'는 랑카위 최초로 설립된 리조트답게 전통 말레이시안 우든 가옥을 모티브로 지어진 편안한 분위기에 향긋한 향이 나는 시원한 타월과 달콤한 웰컴 드링크로 기분 좋게 맞아주었다.
리조트에 머물며 투숙객 모두가 함께 했던 새해맞이 카운트다운 해변 파티에서 사회자가 국가 별 여행객을 호명하는데 독일과 영국에서 온 이들이 가장 많았고, 일본인 세 가족 그리고 한국인은 우리 가족뿐이었다. 랑카위는 유럽인들의 겨울 휴가를 보내는 휴양지로 인기가 많고, 대부분 2주 이상 긴 시간을 머물다 간다고 한다. 단, ‘차이니즈 뉴 이어’(Chinese New Year)로 불리는 구정 연휴에는 중국인과 싱가포르 관강객이 많다고 체크 아웃을 담당했던 호텔리어가 알려주었다.
객실에 도착하니 발코니가 딸린 1층 룸으로 방에서 바로 해변으로 연결되어 객실 창 너머 그림 같은 바다가 보였다. 사전에 우리가 27개월 아기와 여행 중이며 다른 투숙객들에게 방해가 되고 싶지 않은 위치를 요청하였는데, 리조트 끝의 한적한 바닷가 앞으로 배치하여 아이가 원 없이 해변을 맨발로 달리고 도마뱀을 보고 소리를 질러도 소란스럽게 들리지 않는 최적의 장소였다.
첫날은 짐을 푼 후, 곧바로 수영장으로 뛰어들어간 아이가 너무 신나는지 도무지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아이와 이곳까지 오는데 방전된 체력에 도저히 시내로 나설 기운이 없어 저녁은 리조트 내 바닷가 레스토랑 'CBA'에서 해결하였다. 객실에서 가장 가깝다는 이유로 수영복을 입은 채 기대 없이 간 곳이었는데, 저녁 7시부터 붉은빛으로 서서히 물드는 일몰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설사 음식 맛이 없었더라도 좋았을 곳이었다. 후에 랑카위를 여행하며 깨달은 점은 'CBA'의 저녁 해산물 뷔페는 꽤 괜찮았다는 것이다. 랑카위에 오기 전, 쿠알라룸푸르에서 사귄 말레이시안 친구 제이미에게 전해 들은 바로는 중국계가 다수를 이루는 '페낭'지역의 음식 문화가 보다 다양하고 한국인에겐 더 맛있을 것이며, 강성 무슬림 지역인 랑카위는 상대적으로 내 입맛엔 그리 맛있는 지역은 아닐 것이라 하였는데 정말 그랬다. 그래서 이곳은 리조트 내의 뷔페에서도 돼지고기는 당연히 없고, 스테이크 역시 양고기가 메인이며 랑카위 지역에서 많이 잡히는 오징어와 새우 요리가 준비되었고, 소고기의 경우 소시지와 쌀국수의 고명 정도 볼 수 있었다.
매일 아침 해 뜨는 시각에 맞춰 자동으로 눈이 떠지는 랑카위에서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음'에 대한 즐거움을 만끽하였다. 펠랑기 리조트의 조식은 오전 11시까지로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식당으로 가는 길에 멈춰 서 새들과 고양이에게 말을 걸고 해변에서 조개를 줍는 아이에게 재촉을 하지 않아도 되었고,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해변과 수영장에서 망중한을 즐기며 대부분의 시간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느긋하게 보냈다. 맨발로 해변과 리조트를 오가던 아이는 연일 까맣게 그을려 현지인과 구별이 안 갈 정도가 되었지만, 한국에 돌아가면 아직 추운 겨울일 것이기에 햇살을 마음껏 만끽하도록 두었다. 따로 가르치지 않아도 어느새 배웠는지 조개, 꽃게, 거북이 같은 단어를 열거하며 몽키아라 유치원에서 배운 반은 얼버무리는 알파벳 노래에 맞춰 재잘되었고, 함께 놀아주지 않아도 해변에 지천인 고운 모래와 리조트 가든의 돌을 줍고 다니며 잘 놀았다. 아이도 안다. 훗날 이곳이 어디인지 기억하진 못해도 엄마 아빠와 여행을 와서 지금 아주 행복하다는 걸 말이다.
랑카위에서의 하루는 심플했다. 낮에 한차례 신나게 물놀이를 하고 낮잠을 잔 후, 해 질 무렵 체낭 시내를 느릿느릿 걸어 다니다 주류를 구입하기 위해 체낭 몰로 향한다. 랑카위 전 지역은 주류와 초콜릿의 면세 구역이다. 저렴한 맥주 가격은 말할 것도 없고, 2만 원 정도면 꽤 괜찮은 와인을 구입할 수 있어 매일 밤 남편과 룸서비스로 주문한 인도네시아식 꼬치구이 사테이와 한국 컵라면에 와인과 맥주를 원 없이 마셨다. 술을 즐기는 '주당'으로 불리는 이들에겐 이곳은 진정 낙원일 것이다.
물론 이곳도 여느 해변 여행지처럼 제트 스키, 패러세일링 등 해양 스포츠를 즐길 거리가 충분히 있고, 산과 바다의 절경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케이블 카도 있으며, 호핑, 독수리 사냥 등의 체험 형 관광도 있다. 우리는 어린아이를 동반한 여행이라 해양 스포츠나 배를 타고 나가는 체험 형 관광은 다소 무리가 있어, 리조트 내 시설과 해변을 충분히 즐기는 것에 중점을 두었고 '오리엔탈 빌리지'의 케이블카와 페낭 조지타운 거리 여행 중 보았던 벽화 속 고양이 '스티키'가 살았던 동물 보호소 'BONTON 리조트 방문으로 리조트 밖의 일정을 최소화하였다.
랑카위에서 지내며 특별했던 체코 아이와의 만남과 마음 뭉클했던 'BONTON 리조트'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 나눠 쓰기로 하고 마지막으로 어떤 이들에게 '랑카위 여행'을 권하고 싶냐고 묻는다면, 먼저 나와 같이 '쿠알라룸푸르 한 달 살기'를 하며 지내고 있는 엄마와 아이들이다. 이유는 앞서 언급한 대로 쿠알라룸푸르에서 가까운 거리에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편안한 휴식을 주고 싶고 단 며칠이라도 게으름을 만끽하고픈 이들에게 권하겠다.
한때는 내 스스로가 안쓰럽게 여겨질 만큼 늘 무엇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여행지에서도 그러했다. 무엇을 사야 하고, 어디를 가서 꼭 먹어야 하고 말이다. 그런 것들에서 자유로워진 것이 마흔이라는 나이를 넘어서고부터이다. 한 번쯤은 아무 일 없이 쉬어만 가도 괜찮다는 걸 알게 된 것이 말이다. 살다 보면 기를 쓰고 해내야 할 것들이 많다. 심야에 주문해도 새벽에 받는 초특급 '빨리빨리' 문화가 일상이 되어버린 피곤한 한국에선 더더욱 말이다. 그래서 붉은빛으로 물드는 일몰조차 왠지 느리게 진행되는 것만 같은 이곳 '랑카위'에서의 휴식은 더 특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