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오는 어떻게 총알을 멈추게 할 수 있었을까?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우리나라 불교를 비롯한 대승불교에서의 가장 대표적인 경전이라 할 수 있는 '반야심경'에서의 가장 유명한 구절이자 핵심적인 문구가 아닐까 싶다. 세상의 모든 형상(색, 色)은 일시적인 모습일 뿐 실체가 없음(공, 空)을 의미한다.
신기하게도 우주의 관련한 이론을 통째로 바꿔놓았던 아인슈타인의 질량 보존의 법칙과도 일맥상통하는 모습을 보인다. 가령 우리가 종이에 불을 붙여 태우면 몇 초 안에 모두 타버리며 우리 시각에서 사라진다. 우리는 이 종이가 사라졌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공기 중의 에너지로 변화하여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종이는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써 존재하지 않을 뿐 여전히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즉 텅 비어 있는 공기를 종이라고 볼 수도 있으며 형상으로써 존재했던 종이를 또한 공기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로써 종이와 공기를 따로따로 분리 지어서 볼 수가 없고 형상(색)이 실체가 없는 것(공)이자 실체가 없는 것(공)이 형상(색)인 셈이다.
사실 위의 단어를 떠올렸을 때 한때 우리나라의 B급 성인영화 '색즉시공'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개인적인 사견으로는 21세기의 창의성이란 무엇인지 제일 잘 대표해준다는 영화 '매트릭스'가 바로 떠오르곤 한다.
1999년 1편을 시작으로 현재 4편을 촬영 중인 영화 매트릭스 속엔 무수히 많은 철학적 지식과 배경이 존재한다. 가령 플라톤의 이원론, 샤르트르의 실존주의, 기독교의 메시아적 세계관 심지어 중국의 노자 사상까지 앞에 열거한 이외의 많은 철학들과 함께 심오한 세계관을 구축하고 있는 영화이지만 정작 화려한 컴퓨터 그래픽, 액션씬과 촬영기법 등에 의해 이러한 점들이 살짝 묻히는 감이 있는 것도 사실인 영화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매우 신기한 점은 어느 종교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건 영화를 보는 내내 이러한 종교적, 철학적 관점들을 단번에 알아차리지 못하게 녹여냈다는 점 또한 이 영화의 대단한 포인트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처음에 언급한 불교 반야심경 속의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영화 매트릭스 사이에 어떤 관계가 무엇일까? 사실 어찌 보면 불교와 할리우드 흥행작 사이의 관계가 너무나 터무니없어 보일 수도 있으나 매트릭스 영화 1,2,3편 모두에게서 불교적 색채를 띄우는 장면들이 여럿 있다.
이를 테면 1편의 네오가 모피어스로부터 구출되며 매트릭스 세계관에 대한 설명을 들을 때 내포하고 있는 연기설이라던지 2편 Reloaded 속의 빌런 중 한 명이라 할 수 있는 프랑스인 메로빙지언이 묘사하고 있는 인과응보 그리고 3편 Revolution 속 주인공 네오가 지하철 트랩 안에 갇혔을 때 만났던 인도인 가족들이 설명하는 윤회설까지 말이다.
1편 속 주인공 네오가 예언자 오라클을 처음으로 만나러 가던 장면에서 오라클을 만나기 직전 생각만으로 숟가락을 휘게 만들 수 있는 꼬마 아이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우리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숟가락을 휘게 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건 불가능해요"
"진실을 인식하려고 하세요 , 숟가락은 존재하지 않아요"
여기서 숟가락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실체가 없음을 의미한다.
불교에서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오감과 마음만을 통해 재구성한 형상들을 실체 즉 진실이라 믿기 때문에 제대로 된 사리판단을 못하며 여러 가지 번뇌가 생긴다고 한다. 위에서 언급했듯 종이가 타버렸으므로 종이가 사라진 것이라고 보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 속 장면에서 말하는 숟가락 또한 같다. 우리는 단순히 마음을 통해 모든 것을 의지하려 하기 때문에 이 사실을 매트릭스 세계관 안에 대입했을 때 숟가락이든 매트릭스에 접속하여 있는 네오이든 단지 세계관 속 프로그램에 불과하지 않는다. 단지 매트릭스 속에 접속된 네오의 마음만 있을 뿐 숟가락도 매트릭스 세계 자체도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 허상을 깨달아야 한다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매트릭스 영화 전체에는 불교 외의 여러 가지 철학과 종교적인 요소들이 섞여 있기에 물론 불교에서 말하는 것과 대척점에 놓여있는 요소들도 있다. 주인공 네오는 기계로부터 지배를 당하는 인류를 구하기 위해 나타난 the One(선택받은 그)인데 이는 기독교적 메시아의 성향을 많이 띈다. 특별한 선택받은 사람이 아니어도 누구나 깨달음을 얻고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는 불교의 사상과는 조금은 대비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압도적을 많은 지금, 자기 스스로와의 여행을 떠난다는 의미로 시원한 맥주와 함께 매트릭스 영화 한 편 다시 보는걸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는 저녁이다.
Radiohead - Everything in its right place (4집 Kid A) 들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