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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stryd Oct 23. 2021

'모든 여정은 우리에게서 시작된다.'

영화 '듄(Dune)' 감상문

 9월부터 '샹치: 텐 링즈의 전설'이 개봉한 이후로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이 실타래에 옥구슬을 꿰는 것처럼 줄줄이 세상으로 나왔다. 덕분에 10월 첫째 주에 '007 노 타임 투 다이'가 상영되었을 때부터 매주 한 번씩 영화관에 가는 삶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동안 영화관에 가지 못한 한을 푸는 중이다.

 지난주에는 '베놈: 렛 데어 비 카니지'(이하 '베놈')를 봤다. 그렇게 대사가 많은 영화는 태어나서 처음이었지만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부족한 플롯을 마음에서 훌훌 털어버릴 수 있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접한 콘텐츠 중에서-대사가 제일 중요한 이야기 전략으로 작용하는 연극과 드라마를 제외하면-가장 많은 대사를 지니고 있을 법한 것을 꼽았을 때, 명예의 장본인은 베놈도 아니고 그 무엇도 아닌 바로 영화 '듄'(Dune)의 원작 소설이기 때문이다.


 프랭크 허버트의 소설 '듄'은 매트릭스와 스타워즈 등, 이름만 들어도 전 세계가 아는 SF 명작들의 시초라고 할 만하다. 아이작 아시모프와 아서 C. 클라크, 더글라스 애덤스도 20, 21세기 공상 과학 장르에 기여하였지만, '듄'은 그들과 노선이 약간 다르다. 아이작 아시모프는 냉철한 기계처럼 미래의 모습을 무덤덤하고 딱딱한 장면으로 그려내며 서서히 베일을 벗기는 서사를 선사하고, 아서 C. 클라크는 과학적 근본이 탄탄하여 미래 기술의 발전에 많은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이야기를 내보였다. 더글라스 애덤스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시리즈와 '더크 젠틀리의 전체론적 탐정 사무소' 시리즈를 통해 과거, 현재, 미래 모두를 휘어잡는 유머와 비평으로 즐거운 매력을 뿜어냈다.

 그렇다면 소설 '듄'은 어떠한가? '듄'은 신남과도 거리가 멀고, 현란함과도 거리를 둔다. 미래의 인류도 현재의 인류와 다를 것 없이 재산 싸움, 눈치싸움, 기득권 싸움에 한껏 몰입해 있다. 그들이 사용하는 장비도 미래의 기술치고는 그다지 특별한 것이 없는, 지금의 생활용품과 비슷한 개념일 뿐이다. 물론 21세기의 기술로 제작 불가능한 방어막, '스파이스(Spice)' 추출기, 정신 조종 등 여러 상상력이 있긴 하지만, 작가의 의도인지 문체의 부드러운 힘 덕분인지 전혀 낯설게 다가오지 않는다. 우리가 '스타워즈' 등을 통해 흔히 접한 장비들이라서 그럴 수 있겠지만 '듄'은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으며, SF나 액션, 모험 장르보다 하나의 사가이자 드라마의 경지로 올라섰다는 게 내 결론이다. 그래서 모든 여정의 시작으로 평가받는 것이 아닐지.


 영화 '듄' 또한 마찬가지다. 황제의 명을 받들어 나름의 전략을 세운 후 우주 유일의 '스파이스(Spice)' 채굴 행성 '아라키스'('듄'의 다른 이름)로 향하는 아트리데스 가문, 그 안에서의 배신과 울분, 사막에서의 모험과 각성, 그리고 새로운 여정. 이 얼마나 덜 허구적이고 덜 역동적인가? 이러한 특성 때문에 나는 '듄'을 스페이스 판타지 드라마로 부르고 싶다.

 이유가 무엇이냐, '왜냐하면 듄'은 판타지와 SF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주인공 폴이 처한 상황과 앞으로 펼쳐질 나날을 적절하게 그려내기 때문이다. 두 장르 모두 현실과 거리가 멀기에 일반인들이 제일 접근하기 힘들어하는 장르이기도 하지만, '듄'은 마치 이 이야기가 정말로 먼 미래에 펼쳐질 것만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자잘한 설명 없이 바로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팡팡 터지는 2시간 20분짜리의 흐름은 원작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들에게 다소 불친절할 수 있겠으나, 차라리 그 편이 낫다. 현실에서 있을 법한 이야기는 큰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고등학교에서 평범한 학생들이 다큐멘터리의 내레이션을 들을 때마다 하품을 쩍쩍 하는 이유는 가만히 관찰하면 되는 것을 일일이 설명해 주는 것에서 원인 모를 지루함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듄'도 마찬가지다.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듄'은 (지구를 기준으로 한) 머나먼 은하계도 아니고 컴퓨터 속 가상공간도 아닌 '듄'과 그 이웃 행성들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룬다. 인류가 왜 저기서 헤매고 있는가? 모른다. 저기는 어디에 박혀 있는 행성계인가? 그것도 모른다. 해설은 없다. 그저 미래의 인류가 저곳에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고, 이야기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고로 관객들이 비로소 영화 속 세계에 동화되어, '듄'이 속한 행성계 거주민이 그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보면 이런 기분인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할 수 있게 된다. 공상 과학 영화이지만 더 이상 허구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듄'은 그것을 해냈다.

 영화 속 인물들 또한 지금의 우리처럼 물을 중요시하고 사막에서의 열사병을 경계한다. 저곳에도 세계 무역을 주도하는 희토류가 존재하고 자질구레한 의식들(예를 들어, 환영식이라거나 오프라인 회의, 명령 조달과 같은, 현대인의 시점에서 불필요해 보이는 절차들)도 꿋꿋하게 행해진다. 마블 영화나 '매트릭스' 등이 지구를 주 무대로 삼아 지구인의 공감을 자아냈다면, '듄'은 지구인을 '듄'과 '아크로네스' 등이 속한 '그쪽 동네'인으로 한 단계 상승시킨다. 그리하여 긴 러닝타임 동안 지루할 틈이 없다. 어느새 나 또한 '그쪽 동네'의 평범한 시민이 되어 '그래, 아라키스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겠구나!'를 마음속으로 연발하며 손에 땀을 쥐기 때문이다.


 '듄'이 영화화된다는 소식을 접한 후 내 머릿속에 처음 떠오른 생각은 '듄'을 다른 SF 영화들처럼 풀어간다면 다소 유치할 수 있겠다는 걱정이었다. 언급했다시피, 원작은 '듄'의 가슴 절절한 이야기와 긴박한 상황들을 주로 대사로 풀어가기 때문이다. (SF 작품은 아니지만) 존 르 카레의 첩보 소설들이 자세한 시공간 묘사로 명작의 경지에 올라섰다면, '듄'은 정확히 그 반대의 길을 걷는다고 생각하면 편하다. 그래서 '듄'의 렉사일 지수는 SF 소설 치고는 상당히 낮은 수준이어서 쉽게 읽어나갈 수 있다. 또한 놀랍게도, 소설을 한 자 한 자 읽어나가면 거대한 한 편의 영화가 머릿속에서 그려진다. 이것 또한 넘쳐나는 대사의 결과물인 것 같은데, 이대로 영화를 만든다면 '베놈'처럼 정신없는 장면 전환과 귓가에 따발총처럼 날아와 박히는 단어들의 남발 때문에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재미없다는 편견에 붙잡힐까 봐 걱정이 앞섰던 것이다.


 하지만 드니 빌뇌브 감독은 원작 소설의 분위기에 정말 적합한 감독이었고 훌륭한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 '스타워즈'가 사막을 발원지 또는 창살 없는 감옥으로 그려냈다면 '듄'은 사막 또한 이야기의 중심이 될 수 있고 깨달음과 모험의 장소로 승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감독은 창 틈, 그림자, 빛과 어둠의 대조, 달리(dolly) 숏 등을 통해 사막의 물결치는 모래와 극심한 일교차처럼 장면의 입체감 있게 뽑아냈다. 만족스러운 전개였으며 탁월한 선택이었다.

 물론 '이렇게 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자아내는 부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소설의 시작부부터 마른침을 꿀꺽 삼키게 하는 ' 자바(Gom jabbar)' 역할과 베네 게서릿('Bene Gesseritt(발음은 '베네 제서릿'인데 영화에서는 자막을 저렇게 만들었다)) 영향력, 하코네스 가문과 아트리데스 가문, 제국 간의 관계 묘사 등이 있다. 그러나 완벽한 콘텐츠는 없다. 그저 '' 사가의 초반을 무사히 그려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원작 소설을 영화로 옮기는 까다로운 작업에 성공했다는 뜻이기에, 2020~2030년대 영화계를 즐겁게   초석을 세웠다는 업적에 집중하려 한다.


 많은 매체에서 '듄'을 제2의 '스타워즈'니, 모든 여정은 사막에서 시작된다느니 등 휘황찬란한 미사여구를 동원하며 홍보하는 것을 보았다. 글쎄, 나는 '듄'을 모든 여정은 '우리'에게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영화로 일컫고 싶다. 저기 있는 생명체들은 약 8000년 후의 인류고, 우여곡절을 넘기며 저곳에 정착했을 터이다. 배경이 지구인 영화들처럼 사건을 만드는 것도 우리고, 해결하는 것도 외계인이 아닌 우리다. 저들은 왜 '저렇게' 살아가며 그동안 무슨 일을 겪었을까? 지금의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듄' 속 세계는 현재의 행동에 대한 결과이며, 그 안에서 새로운 현재가 쓰이고 있다. 따라서 아라키스의 사막 또한 하나의 무대일 뿐이다. 사막을 특별히 여길 필요 없이 뉴욕 시나 런던 뒷골목처럼 인물들이 활동하는 장소로 생각해야 영화의 의도와 원작 소설의 의도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미래를 우리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도록, 박수를 치며 기대할 시간대가 아닌 우리가 겪어야 하는 시간대로 여길 수 있도록 바른 생각을 심어주는 것이 '듄'의 사막이고, 바로 영화 '듄' 그 자체다. 상영관을 나오며 가슴이 벅차올랐던 이유가 이것이다.


 어쩌면 영화 속 희토류, 공기 중에 떠다니는 그 소중한 희토류 '스파이스'는 현대의 상상과 상념들을 포함한 희로애락들의 집합체가 아닐지. 우주 항해의 지표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스파이스'는, 지금의 우리가 밤하늘을 보며 상상했던 방향성이 한데 녹아들어 미래의 우리에게 길을 안내하는 요소가 아닐지. 우연의 일치든 절대자의 의도든, 어찌 됐든 인류는 이 세상에 존재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미래에게 넘겨줄 것은 권력도 아니고 갈등 관계도 아닌, 바로 상상과 이야기일 것이다. '듄'이 시사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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