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5
어느 겨울날에 벌어진 일이다. 아침 일찍 집 앞에서 버스를 타고 이유 없이 강북 지역 이쪽 건너편에서 저쪽 건너편으로 가로지르기로 마음먹었다. 자그마치 편도 두 시간 반의 거리였다. 소요 시간이 길수록 시공간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기에 나는 '길바닥에 뿌리는 시간'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버스를 애용한다. 창밖의 풍경이 바뀌는 것을 뚜렷하게 분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상 구간을 거치지 않는 한, 덜컹거리는 어둠 속에서 카드섹션을 하듯이 문득문득 나타나는 지하철역 승강장은 여전히 거북했다. 살아 있음을 느끼기 위해 나는 아스팔트 위에, 되감을 수 없는 시간의 실타래를 죽 풀어 내려놓아야 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에 이끌리듯 쌀쌀한 아침 공기를 맞으며 버스에 올랐다. 3년 동안 이 버스를 애용한 사람으로서 발견한 횡단 여행의 방법은 이것이다. 한 번도 내리지 않고 회차 지점을 지나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때까지 노선의 방향에 몸을 맡기는 것. 그리하여 무형의 승차 금액은 작은 화면에 삑 하는 소리와 함께 나타났다 사라졌으며, 버스는 몸을 부르르 떨며 안개를 뚫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사십 분 언저리를 지나 깎아지른 언덕 위에 자리한 동네를 지나갔다. 몸이 어디로 쏠리는지 모두 외웠던 터라 좌석 손잡이를 미리 부여잡고 안심하며, 이어폰 속 음악에 집중했다. 그것이 바로 실수였다. 언제나 그렇듯이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 안주하는 행위란 불가능한 법이다.
한 번도 주의 깊게 본 적 없는 방향이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요주의 그 공간은 세 갈래로 갈라지는 언덕길 너머에 위치하고 있었다. 한 번도 가지 않고 지나쳤던 곳이 향로의 연기 속으로 급히 몸을 숨기는 듯했다. 항상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만 향했기에, 나머지 두 갈래는 미지에 휩싸인 곳이었다. 그러려니 하며 스쳐지나갔던 길이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저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러나 호기심은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아무것도 없다면? 화면 속 지도의 내용이 사실 속임수이며 세상의 모든 톱니바퀴가 나를 속이는 방향으로 철컥철컥 맞물려 움직이고 있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지도를 통해 믿게끔 만드는 것이라면? 덜컥 겁에 질린 나는 당장 버스에서 내려 실체를 알 수 없는 공간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지나간 정류장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말이 더 정확한 속담일 것이다. 버스는 언제나 그랬듯이 오른쪽으로 몸을 틀어 무의식적으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생각해야 할 문제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제일 중요한 것을 맹점에 두지 않았는지, 어느새 웅크리고 앉아 변화하지 않는 세상을 반기고 있지 않았는지 말이다. 통학 경로는 이변이 없지 않는 한 동일하며, 화면 속에서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하는 제스처도 습관이 된 지 오래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책장을 넘기는 방식에 익숙해진 나머지, 콘텐츠를 배열할 때 제일 중요한 정보를 좌측 상단에 표기한다고 한다. 바꾸고 싶은 것이 있어도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지성이 힘을 잃는 순간일 것이다. 맥없이 갈 길을 향하는 버스 안에서 이 생각은 나를 사로잡았으며 휩쓸리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결과는 이렇다. 다음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도망치듯이 내렸다. 검고 긴 롱패딩을 펄럭이며 헐레벌떡 언덕을 도로 올라가는 사람의 모습은 어느 방면에서 봐도 가관이었을 것이다. 세 갈래로 갈라지는 언덕길에 이르러 나는 뜀박질을 멈췄다. 재개발을 위해, 짚을 엮은 것 같은 천으로 싸인 건물들, 한적한 인도, 태연하게 노란 눈을 깜박이는 신호등이 나를 한꺼번에 쳐다봤다. 웃음이 절로 나왔다. 멋쩍은 웃음을 흘리다 다리가 풀려 그만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때 안도하지 말았어야 했는지 또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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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칼럼은 지금까지의 칼럼 중 최초로 컴퓨터로만 칼럼이다. 원인은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COVID-19) 때문이다. 칼럼을 쓴 공책 낱장을 소중히 어루만진 후 서가에 차곡차곡 꽂아놓던 나로서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 학기 전체가 온라인 강의로 대체된 현실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없었다. 틈이 날 때마다 바깥을 돌아다니며 삶의 의미를 찾았던 가련한 영혼은 몇 달째 집 밖을 나가지 못하며 의기소침해질 대로 의기소침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동서양권이 애용하는 마법의 단어를 사용해야 그 기이함을 표현할 수 있다-, 1학년 때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을 같이 들었던 타과 친구한테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그 친구가 보낸 카카오톡 메시지에는 깜짝 놀랄 만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자신의 전공 교수님께서 내 칼럼을 수업 자료로 선정해 학생들에게 읽어 오라는 과제를 내 주셨으며, 강의 시간에 칭찬과 더불어 한 줄 한 줄을 분석해 주셨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넓어 봤자 7평 남짓한 내 방을 반딧불이마냥 뱅뱅 맴돌며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친구에게서 교수님의 성함은 알아냈으나 이메일을 물어볼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다. 게다가 오프라인 등교는 시행되지 않아, 학교에 가면 교수님의 연구실을 찾아뵙겠다는 내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내 칼럼을 어떻게 분석하셨는지 정말 궁금했다. 마치 수능 국어 지문에 실린 자신의 시를 흥미롭게 관찰하는 시인이 된 기분이었다. 우울의 끝을 달리던 시절, 이 사건은 평생 글을 쓰며 살겠다는 내 다짐에 또 하나의 불씨가 되어 주었다.
조지 오웰의 회고를 읽다가, 그가 나와 똑같은 고민을 안고 살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 구절의 내용은 이렇다.
'그렇지만 이 기간 내내 나는 어떤 의미에서 문학 활동이라 부를 만한 일을 하고 있었다. 우선 생각나는 것은 무슨 일이 있을 때 주문에 맞춰 쓰는 행사용 글이었다. 이 종류의 글을 나는 빠르고 쉽게 쓸 수 있었으나 나 자신이 별로 큰 즐거움은 느끼지 못했다.'
-'나는 왜 쓰는가' 일부분 발췌, 조지 오웰 씀, 도정일 역, 민음사
문예창작과에 진학하기 전, 그리고 칼럼을 집필하기 전 내가 느꼈던 감정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문장에 나는 흠칫 놀랐다. 이 뒤로 이어진 내용은 더욱 그랬다. 조지 오웰 또한 그 자신은 글을 쓰며 살아야 하는 삶이란 것을 알고 있었으며, 나 또한 그랬다. 깨달은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깨달았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반은 온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작가란 '작은 것에서 큰 것을 이끌어낼 줄 아는 사람'이다. 바깥을 쏘다님으로써, 아무 행인이나 붙잡고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수업의 내용을 하나하나 기억했다가 글의 소재로 삼음으로써 작가가 되기 위한 초석을 갈고 닦고 있다.
새 학기가 도래할 때마다 끊임없이 다짐한다. 유행어에 휩쓸리지 말고 생각의 닻을 내리자고. 공동체의 역할이 다시금 중요해진 요즘, 다시 한 번 다짐할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