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6
똑같은 하루였다. 바깥에서는 6개월이 넘도록 전염병이 창궐했고, 방 한쪽에서 감금 아닌 감금 생활을 보내는 것 또한 여전했다. 기온이 점점 높아짐과 동시에 손바닥은 지치지도 않고 땀을 흘려 책장을 적셨다.
종이의 결 하나하나를 들여다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결핍이 기회를 만든다는 말이 있듯이, 다한증이라는 결핍 아래에서 물결치는 종잇장 무늬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종이로서는 치부를 내보인 것이나 다름없을 수 있다. 어디를 어떻게 찢으면 잘 찢길지 스스로 밝힌 셈이니까. 하지만 큰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데서 종이는 마음이 넓다. 킨들과 같은 전자책 리더기에도 거칠거칠한 감성은 없다. 이와 같은 이유로 전자책은 아직 다수의 마음을 홀리지 못했다.
관계성이 결핍된 방구석에서 인간과 기기와의 관계를 논하고 있을 때, 점자처럼 꾹꾹 눌러 찍힌 검은 점들이 눈에 띄었다. 꼼짝 않은 채 응시하고 있자니 점들이 꿈틀거리며 하나의 형체를 띠는 것처럼 느껴졌다. 또한 가까이 있는 동료들끼리 한데 뭉쳐 의미를 형성했다. 3차원 세계보다 가볍게 여기기 쉬운 평면 세계, 그곳에서 소외와 멸시란 없었다. 그 점들이 모여 알파벳이 되었고, 알파벳들은 또한 자기들끼리 모여 단어를 만들었다. 종이 위에서의 단편 연극이나 마찬가지다.
모든 글에는 억양이 있다. 글자들은 그 억양에 맞춰 춤을 추었다. 그리하여 독자로써 하여금 읽는 재미를 붙이고 머릿속 시냅스들이 더욱더 견고해지기를 돕는 것이다. 이 얼마나 교육적인 연극인가! 어린이 극장에서 상영해도 될 만한 걸작이다. 명작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다.
온점이 한 막의 종료를 알린 순간 굽혔던 허리를 갑자기 폈다. 불현듯 의구심이 들었다. 저들은 죄다 검은색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책꽂이에 꽂혀 있는 아무 책이나 펼쳤다. 그곳에도 흑백의 향연이었다. 다른 책의 책장을 후루룩 넘겨 보았다. 검은 옷을 입은 무용수들이 하얀 무대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아 탁 소리 나게 표지를 덮었다.
언제부터 너무나도 당연하게 모든 글씨를 검은색으로 쓰고 있었을까? 일기를 쓸 때나, 수업 시간에 필기할 때나, 혹은 컴퓨터 화면에서 문서를 작성할 때도 모든 글씨 색의 기본은 검정이었다. 기호에 따라서 빨간색과 파란색, 드물게 초록색이 등장할 뿐, 글씨를 죄다 파란색으로 쓰는 경우는 없었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별난 사람이나 유치한 사람으로 통했다. 형형색색의 정원이나 알록달록한 교통수단에는 열광하지만, 삶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종이에서는 색깔을 허용하지 않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왜 이 연극이 점점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는지 깨달았다.
필자의 어린 시절을 장식했던 책이 있다. 무지개 펜으로 소설을 쓰고자 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책이었다. 시간이 흘러 책의 제목이 기억나지 않지만, 미래에 큰 영향을 끼치는 데는 충분했다. 영향 중 하나로, 길모퉁이 작은 가게에서 일곱 색깔 잉크가 한꺼번에 들어 있는 볼펜을 샀던 기억이 난다. 인생 첫 볼펜이었다. 하지만 이제 문구점 어디를 뒤져도 그와 같은 펜을 찾을 수 없었다. 초등학생이 고등학생처럼 공부하기를 강요받는 시대에 색이 설 자리는 없었다.
활자의 연극을 관람하다 무단으로 이탈하고 추억마저 잃어버렸던 그때, 방법을 찾았다. 먼저 서랍을 마구 뒤져 노란색 A4용지를 찾아냈다. 그리고 또 다른 서랍을 헤집어 네 가지 색깔 잉크 펜 세트를 손에 쥐었다. 그런 다음 떠오르는 문장들을 손 가는 대로 자유롭게 종이 위에 옮겼다. 때로는 단어별로, 때로는 문장마다. 무언의 행위예술을 통해 ‘내 어릴 적 무지개 펜’을 기리며, 그렇게 사회적 거리 두기의 날 하나가 저물어 갔다.
이번 글에서는 문단과 문단 사이를 의도적으로 띄었다. 디지털 환경에서의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약 23년 동안 지켰던 규칙이지만 블로그를 작성할 때만큼은 잠시 눈감아 주기로 마음먹었다.
이번 학기는 프로그래밍 과목만 일곱 개나 되었다. 마스크와 페이스 쉴드로 무장하는 일이 있더라도 오프라인 등교가 기다려졌던 이유는 예술 과목 때문이었다. 원래는 '현대회화4(복합매체)' 수업과 '영상', 그리고 '소설창작론'을 들으려 했다. 하지만 한 학기 비대면이 확정되다시피 한 개강 직전, 온라인 수업에서의 합평 진행과 작품 감상 나누기, 작품 제작 등의 활동을 제대로 향유하지 못할 것을 알기에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시간표 수정 작업에 들어갔다.
비참하나 비참하지 않은 결과였다. 그동안 프로그래밍 실습 과목을 들었다면 이번 학기에는 '운영체제', '스마트시스템 구조론(컴퓨터 구조)'을 통해 이론도 탄탄하게 배울 수 있어 진정한 전공생이 된 기분이었다. 방학 동안 진행한, 그리고 지금도 진행하고 있는 IBM C:LOUDERs(클라우더스) 활동도 이번 학기를 이수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제 어디 가서 당당하게 컴퓨터공학을 (반쯤) 전공했다고 밝힐 수 있다.
하지만 득이 있으면 실도 있는 법. 쏟아지는 실습 과제, 문제풀이 과제로 인해 소설을 집필할 시간이 없다. 팝콘 브레인이 여론을 이루는 환경 속에서 약 2시간 30분짜리 강의는 최대 9개까지 쪼개져서 업로드되었다. 한 번에 오랫동안 집중하는 나로서는 더욱 힘들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프로크리에이트로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릴 시간조차 턱없이 부족해 아이패드 프로는 '필기머신'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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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E 화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면 색이 참으로 많다는 것을 느낀다. 저것은 무엇으로 썼을까? 어쩌면 '내 어릴 적 무지개 펜'이 나를 개발자 지망생의 길로 들어서는 데 한몫한 것이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