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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원 Nov 09. 2019

당신의 눈이 머무는 곳

잘 알려진 건축가들의 작품을 살펴보면 나름의 개성을 뚜렷하게 가지는 경우가 많다. 자하 하디드나 프랭크 게리의 작품은 압도적인 조형미를 지니고 있고,  노출 콘크리트는 안도 타다오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으며, 토마스 헤더윅은 건축과 제품 사이의 경계 그 어딘가를 넘나드는 작품을 보여준다. 그에 반해 그런 느낌이 덜 한 작가들도 있는데 렘 쿨하스(지구 최강)나 승효상(반도 최강) 같은 분들의 경우 언뜻 보아서는 알아채기 힘들 수 있다. 꼼꼼히 따져보면 그 어휘가 어찌 보이지 않겠으나, 상대적으로 정도가 낮다는 말이다. 이렇게 한 건물이 어필하는 요인이 시각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다면, 그것은 공간의 조직에 있을 수 있다. 거주자 행태의 틀을 구축하는 데에 의미를 두게 되면 스타일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적어지게 된다.  


이러한 경향의 바탕이 되는 믿음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건축은 우리 삶에 영향을 준다"이다. 수십억 짜리 성냥갑 속에서 무슨 한가한 소리냐, 혹은 너무 뻔한 소리 아니냐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으나 이는 사실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과격한 믿음이다. 집이 어떻게 설계되느냐에 따라 이웃과의 관계가, 오피스의 조직 방식에 따라 전문가들의 교류 방식이, 광장이 어떻게 놓이느냐에 따라 민주주의의 수준이 결정된다는 보다 근본적인 변화에 대한 신념이다. 이러한 면에서 건축은 공학이나 예술이 아닌 인문학에 가까워진다. 다시 말해 수익성/탄소배출량/역사성/브랜딩 등 보다는 '나는 도대체 어떤 삶을 지향하는가'로 디자인 문제가 귀결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여타 디자인 분야도 그러해 보이는데, 이는 교육 현장에서 학생들을 그토록 괴롭히는 교수의 '왜?' 라는 질문의 요지이기도 하다.


http://www.shigerubanarchitects.com/works/2011_paper-partition-system-4/index.html

프리츠커상 - 건축의 노벨상이라고들 흔히 부르는 - 의 수상자 경향을 살펴보면 재미있는 사실이 발견된다. 나무위키에서 그 상에 대한 내용을 찾아보면 "2014년부터...그 경향이 변했다" 라고 나온다. 그 해의 수상자는 일본의 '반 시게루'라는 건축가로서 종이튜브를 활용하여 아프리카 및 일본의 난민을 위한 시설로 유명하다. 솔직히 이전에도 프리츠커상 심사위원들이 시골에 처박혀 묵묵히 작업하던 사람을 상 준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반 시게루의 수상은 위키 작가에게도 정말 센세이션했나보다. 정말 그러했다. 처음으로 자신의 야심찬 미학을 완성시킨 천재가 아닌, 사회의 필요에 반응한 '건물이 아닌 그 무엇'의 가치를 손들어 준 것이었으니까. 이로 인해 디자인은 기예가 아닌 선택의 문제가 되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렇다면 이러한 형이상학적 목표가 형이하학적 요소로 조직되는 방법은 무엇일까? 랩 환경에서 실험이 불가능하다면, 가장 흔한 방법은 존재하는 사례들로부터 extrapolate 하는 것이다. 기존 작품을 차용, 변용하는 것인데 실제 (강추되는) 학습 방법 중 하나가 대가의 평면을 트레이싱 (말 그대로 베끼는) 하는 것이다. 이는 가장 빼어난, 그래서 '검증된' 치수의 조합을 무의식적으로 체득시키는 과정이다. 또 다른 방법으로 실증적 조사로 가이드라인을 도출하는 것으로 병원 시설의 가드레일 높이, 가장 오르기 편한 계단의 치수 등 인간공학적 측면이 이에 해당한다. 디자이너는 유사한 케이스가 나타났을 때 이 데이터베이스를 참조하게 된다. 다른 것으로 귀납적 연구가 있겠는데, 동의 배치와 범죄율, 천장 높이와 창의성, 파놉티콘과 인간심리, 병원 창의 크기와 회복율 등 변인들 간의 상관관계를 (제한적으로나마) 확인하는 것이 되겠다.


그래도 뭐니뭐니해도 디자인의 꽃은 이러한 자료를 기반으로 물리적 실체를 조직하는 일이다. 건축가들에게는 재료, 기호, 색채 외에 무엇보다 공간을 구축하는 요소들 - 천장, 바닥, 벽, 기둥, 공간, 계단, 빛 - 이 무기이다. 이 요소들의 조합은 관람자들에게 특정 심리적, 물리적 반응을 유발하며 하나의 언어로 구축된다.


mamamayerle @ pixabay

하나의 기둥, 특히 공간 중앙의 그것은 한마디로 세상의 중심이 '나' 이고 그 외는 '들러리'라는 것이다. 유럽 광장의 중심에는 의례 위와 같은 것이 있기 마련인데, 모두 '아랫 것'들을 내려다보는 군주의 모습이다. 둘째라면 서러워할 루이 14세 되시겠다.

 

Photo by xiquinhosilva. License is CC 2.0  

두 개의 기둥이 있다면 '문'의 역할을 하는데 그건 휴먼 스케일일 때 그렇다. 위의 경우는 대웅전 앞 공간을 정확히 반절하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상 포인트이다. 그러나 각각의 탑 자체가 워낙 아름다울 뿐더러 주변 조형물과 엄청난 인파에 휩쓸리다보면 이를 인지하기는 참 어렵다.  


Photo by eimoberg. License is CC 2.0  

종묘는 조선 역대 국왕들의 신주를 모신 곳으로 간격이 일정한 기둥으로 종과 횡 두 축을 만들었다. 속세와 내세의 경계를 만드는 벽이기도 하다.


https://pxhere.com/ko/photo/667454

필자가 방문했었던 일본 교토의 후시미이나리타이샤 도리이이다. ㄷ자형 기둥, 곡선로, 바닥 패턴로 인한 강한 소실점 효과와 공간의 폐쇄성, 빛의 효과는 우리를 앞으로 강하게 끌어 당긴다. 이렇듯 기둥의 개수나 모양, 크기에 따라 전달하는 느낌과 메세지가 다르다.


디자인 오브제의 시각적, 물리적 효과에 관한 다른 법칙이 떠오르지는 않는지? 혹시 시각디자인의 게슈탈트 법칙이나 UX 디자인에서 말하는 affordance를 들어 보았는지 모르겠다. 구두가 아닌 시각언어의 해석이라는 면에서 일맥상통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경험적 법칙들의 가장 큰 문제는 모델링 및 시뮬레이션하기 매우 어렵다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해, 구체적 상황에이 법칙의 효과성을 측정, 예측하는 일반화된 규칙/공식을 만들기가 쉽지 않다. 시각 언어를 수용하는 인간 존재를 설정하기가 너무 어렵기도 하려니와 무엇보다 그 적용 컨택스트가 너무도 복잡다단하다.


필자는 컴퓨터 그래픽스를 전공했는데, 박사과정 구두 시험을 볼 때 있었던 일이다. 지도교수를 포함하여 3명의 교수가 나의 영혼을 털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그 중 한 질문은 "우리가 모든 (무려) 광자의 움직임을 알 수 있다고 치자. 그러면 네가 보는 지금 이 현실을 재현할 수 있겠는가?"였다. 한참만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intractable 한 문제"라고 답했는데 신나하던 교수들이 갑자기 잠잠해졌다. 이론 수업을 들은지 얼마 안 된지라 그 단어가 머리에 박힌 모양인데, 끝나고 지도교수는 "바로 그 순간 네가 합격한거야!"라고 흥분되서 펄펄 뛰었다 (자기들도 답을 모르는 문제를 내다니). 여기서 한 암시는 CG 영화의 사실적인 렌더링은 빛의 움직임을 극도로 단순화된 계산식(모델)에 기반한, 효과적이고도 왜곡된 재현(시뮬레이션)이라는 것이다. 혜성에 우주선도 안착시키는 시대에 왜 인간 감성하나 예측 못하나 타박할지도 모르겠다. 사람 시지각을 모방하는 딥러닝 기술이 나오는 데에 참으로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면 변명이 되려나.

  


미안하다 소스를 못 찾겠다. 일본 수납의 여왕에 관한 잡지 이미지였던듯

필자가 학교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어버버하던 당시, 공동 프로젝트를 하자며 손을 끌어준 고마운 (지금은 은퇴하신) 교수님이 계셨다. 수납공간에 관련된 것이었는데 위 이미지를 같이 보던 중이었다. "아, 저 문 패턴이 정말 아름답지 않아요 이 교수님?" "네? 아 네.." 필자가 당황한 이유는 바로 왼쪽 뒤 저 소실점 근처를 보고 저게 뭘까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그 교수님의 전문 분야는 가구디자인이었다. 문득 머리를 스치고 가는 아이디어가 있었으니, 바로 위의 경험적 법칙들에 관한 것이었다. 정말로 그것은 우리의 시각을 유도하는가? 그렇다면 수치/객관화가 가능한가? 그리고 한 사람의 지식은 보는 곳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가? 그것은 최근까지도 이어졌던 연구 주제와의 운명같은 만남이었다.


다행히도 사람의 눈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려주는 장비가 있었는데 아이트래커라 불리는 것이다. 안경같은 장비를 쓰면 마술같이 눈동자가 가 있는 곳을 알려주는 으로 오래 전 러시아 연구자가 제일 먼저 시작한 이래로 현재는 심지어 안경을 쓰지 않아도 눈이 머무는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마케팅, 의학, 심리학, UX 등 이것을 사용하지 않는 학문을 찾기가 더 힘들다. 이러한 연구들의 대전제는 (완전히 생체학적 측면을 제외하면) "너의 눈동자 관심이 있는 곳에 머문다" 이다. 하긴, 둘이 따로 논다면 연구 자체가 무슨 소용이겠나 싶다.  

 

Using an eye tracker to study three-dimensional environmental aesthetics JAPR 2015

필자가 사람들에게 트래커를 씌운 결과는 다음과 같다. 자세히보면 밑그림이 살짝 조작되었는데 그에 따라 눈의 움직임이 달라진다. 즉 윗줄을 보면 중간의 기둥 두 개를 삭제하면서 눈의 좌우 움직임이 훨씬 커졌고 이에 따라 상대적으로 시선이 아래로 쏠린다. 여기서 기둥은 자신을 따라 시선을 위로 유도하는 것이 아닌, 시선을 그 사이에 붙들어 놓는 프레임 역할을 한다. 아랫줄의 경우 계단이 있을 때 그 계단을 따라 올라가 주변을 살펴보는 시선이 훨씬 많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눈으로 걸어가고' 있다. 계단 같이 사선적 요소는 그 자체로 시선을 많이 끄는데 인간의 시신경수용체가 격자형으로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그럴수도 있다. 장비빨을 너무 믿으면 안된다. 실제로 디자인과 미학에서 눈의 움직임에 관한 연구가 용두사미로 끝난 것이 많다. 사람 간의 편차도 있고 또 대상물 자체가 작은 경우가 많아 눈 움직임 패턴의 차이를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가설을 세울 때 조금은 타겟을 다양하게 할 필요가 있다.  


Effects on individuality, education, and image on visual attention JEMR 2019

보다 놀라운 것은 그냥 아무생각없이 패턴을 쳐다보다가 발견한 것이다. 위 사진의 왼쪽열과 오른쪽열은 각기 한 사람의 것이다. 각 선의 색깔은 60Hz로 눈의 움직임을 기록했을 때 그 움직인 거리를 범위에 따라 나눈 것이다. 연두색의 경우는 거의 점에 가까운 움직임이고 붉은색이 가장 긴 범위이다. 신기하게도, 그 이미지가 무엇이건 간에 사람마다 눈의 low-level 움직임이 고유하다! 마치 스케치를 하는데 그 연필 고유의 캐릭터가 드러난 것과도 같다. 이를 정량화하기 위해 machine learning을 활용해서 확률적으로 분석해 보았다. 패턴을 보고 우연히 그 사람을 맞출 확률이 2%가 안된다고 할 때, 위 두 사람의 경우는 90% 이상의 확률로 맞출 수 있었다. 물론 모두가 다 이렇게 이미지가 달라도 고유함을 일관되게 유지한 것은 아니었는데, 적어도 위 사람들의 경우 눈동자를 붙잡는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이 거의 지문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트래커가 등장한지 매우 시간이 오래되었음에도 그 기기의 진화와 그것을 활용한 연구에 대한 관심은 끊이질 않는다. 사람들의 내면의 잠재의식을 어떤 여과없이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의 매력이기도 하고, 또 아직도 풀어야 될 궁금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미학과 관련하여 어떤 것이 얼마나 주의를 끄냐는 것과 관련해서는 안타깝게도 정량적 이론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top-down과 bottom-up을 나누는 정도인데, top-down은 지식이 눈의 움직임을 drive한다는 것이고 bottom-up은 high frequency, 즉 복잡한 영역에 더 시선이 머무른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장비가 디자인 연구에 시사하는 의의는 작지 않다. 누군가 멋진 예측 모델을 가지고 올 수 있다면 그것을 대입해 볼 현실이 있다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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