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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소유 Feb 29. 2024

우리라는 연결의 시작

<불편한 편의점>을 읽고

  어느 날 외출하느라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한 이웃이 혼잣말하듯 나에게 말을 건넸다. “아파트는 참 삭막하죠. 몇 년을 살아도 누가 이웃인지 잘 모르겠네요.” 그분이 어느 층에 사는지는 잘 몰라도 엘리베이터를 오가며 여러 번 본 얼굴이라 “그러네요. 그래도 자주 엘리베이터에서 뵌 거 같은데요?” 했더니 그분은 나를 이웃의 얼굴로 기억하지 못했던지 겸연쩍은 듯이 인사를 나누며 우리는 헤어졌다.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사는 삶에 익숙해졌다. 그래서 그런 삶이 오히려 우리에겐 편한 상태일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내가 어릴 적 살던 동네 풍경과 참 달라졌다. 나는 6층짜리 작은 아파트에 살았는데 몇 층에 누가 사는지, 옆 동에 누가 새로 이사 왔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아파트 앞마당은 늘 아이들 소리로 가득했고 저녁 시간이면 밥 짓는 냄새가 진동했다. 엄마는 피를 나누지 않았으면서 ‘형님’이라 부르는 아줌마들이 많았고 나도 길에서 만나는 이웃들을 친척이라도 만난 듯 반갑게 인사했다. 사람의 온기는 가득했지만 관계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생기는 다툼과 갈등도 적지 않았다. 그때는 그런 삶이 자연스러웠겠으나 어떤 면에서는 꽤 불편한 삶이 아니었을까. 특히 나 같은 사람에게는 더.


  현대 개인주의적 생활을 대표하는 편리함의 집성체, 편의점에 불편한 인물 ‘독고’가 등장했다. 내가 사는 동네에 독고 같은 직원이 일하는 편의점이 있다면 어땠을까 상상해 본다. 분명 나에게 그곳은 불편한 편의점이었을 것이다. 나는 어떤 가게에 들어가든 도와주겠다고 점원이 다가오면 뒷걸음질부터 친다. 진짜 내 두 발이 뒷걸음질 친다는 뜻이 아니라 마음의 두 발이 뒷걸음질 쳐서 거리를 둔다는 뜻이다. 아무리 소중한 할인 정보를 알려 주려는 고마운 점원이라 해도 불편한 것은 마찬가지다. 혼자 조용히 컵라면 하나 사 먹고 오기 편해서 편의점에 가는데 독고처럼 옆에 와서 말을 건다거나 오지랖을 보이는 점원이 있다면, 나는 아마 그 편의점에 다시는 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독고와 나 사이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채 책 속 이야기가 흘러갔다. 이야기는 어느 날 아침 편의점에서 오선숙 씨와 독고 사이에 발생했다. 오선숙 씨는 아들과 싸우고 비참한 마음으로 출근했다가 자신도 모르게 속에만 쌓아놓았던 답답한 심정을 독고에게 쏟아내고 있었다. 그 말을 가만히 들어주던 독고가 이렇게 말했다. “들어주면 풀려요.” 갑자기 독고의 그 한마디가 내 마음 위를 너울거렸다. 독고와 나 사이 거리가 한 뼘쯤 가까워졌다.


  나는 내 속내를 남에게 이야기하는 법이 잘 없다. 친한 사람들과 수다 떨기는 좋아해도 깊은 고민거리까지 꺼내놓는 일은 거의 없다. 가까운 가족이라도 마찬가지다. 혼자 품고 혼자 삭이며 되도록 내 선에서 해결하려 하는 편이다. 그래서일까 주위 사람과 관계는 늘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사귀게 되곤 했다. 그것은 참 외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속 편한 일이었다.


  올해 초 심적으로 속 시끄러운 일이 생겼다. 내 뜻과 상관없이 맡은 일에 대한 중압감과 동시에 뒤틀리는 주변 관계들까지 모두가 스트레스로 돌아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쌓여가던 감정들이 한계치에 도달했다. 명치끝이 부글거리기만 할 뿐 화산 폭발하듯 터트리지도 못한 채 뜨거운 열기만이 내 속을 할퀴고 다니다, 끝내 그 열기는 명치끝에서 단단하게 뭉쳐졌고 숨조차 내쉬기 힘들어졌다. 그 고통이 너무나 극심해서 나는 평소 쓰지 않는 방법으로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누구에게든 말해야겠다, 터트려야겠다. 고민거리가 있어도 늘 혼자 동굴을 파고 들어가는 것이 다였던 걸 생각하면 나로서는 그 정도로 절박한 상황이었다.


  지인은 기꺼이 나에게 시간을 할애해 주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만큼 지혜로운 분이었다. 따뜻한 차를 앞에 두고 이야기를 꺼내려하자마자 울음부터 터졌다. “내 마음을 잘 모르겠다. 답답하기만 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다. 두렵다. 중압감이 크다. 마음이 잡히지 않는다.” 두서없는 말들이 쏟아져 나왔고, 내 앞의 지인은 그저 들어주고 있었다. 그뿐이었다. 아무것도 해결된 것은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나는 훨씬 짐을 덜어낸 기분이었다. 오선숙 씨가 문득 독고에게 안도감을 느꼈듯 나도 지인과의 만남으로 안도감을 느꼈다. 혼자 끌어안지 않아도 되는구나. 고민을 누군가와 조금 나눈다고 큰일 나는 게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  


  독고는 독불장군처럼, 세상 혼자 잘난 것처럼 살아왔던 과거로 인해 모든 것을 잃고 추락했다. 그때 기억은 모두 잃었지만 온몸으로 느꼈기에 알았을 것이다. 노숙자일 때 만난 ‘독고’였던 노인의 친절과 또 우연히 만난 편의점 사장님 ‘염영옥’ 씨가 베푼 따뜻한 선의가 누군가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독고는 역시 온몸으로 체득했을 것이다.  


  흔히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고들 말한다. 나는 항상 이 말이 잘 와닿지 않았다. 뜬구름 잡는 말 같기도 했다. 그런데 내 주변의 흔히 보는 누군가의 이야기 같기도 한 청파동 사람들과 독고가 맺어가는 관계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잘 와닿지 않던 사람 사이 연결의 의미가 조금 선명해지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나 역시 지인에게서 그 연결고리를 발견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이런 것일까. 결국 혼자인 세상에서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을 느끼는 것. 사람의 온기를 깨닫는 것. 때로는 그저 차가운 바람을 막아주며 옆에 앉아있는 것, 그리고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라는 연결’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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