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운명

폐기도서_처음과끝

by 전소유

도서관 이용자로 공공도서관에 갈 때면 나는 가장 먼저 '신간 서가'부터 살펴본다.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직도 나무 냄새가 날 듯한 파릇파릇한 새 책들이 빳빳하게 고개를 쳐들고 도도한 분위기를 풍기며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곳. 나는 밤새 내린 눈을 처음으로 밟게 된 누군가처럼 한껏 들뜬 손놀림으로 이 책 저 책 꺼내보거나 책의 면면을 훑는다. 책을 대출하거나 굳이 자리 잡고 읽지 않아도, 그것만으로 어쩐지 기분이 좋아진다. 마치 존재 자체로 행복감을 선사하는 갓난쟁이들처럼.


신간 도서와 달리 도서관에는 폐기(예정) 도서가 있다. 오랜 연식, 가치 상실, 파손 등의 이유로 곧 이 도서관에서 사라질 운명에 처한 도서이다. 이 책들은 대부분 이용자의 눈에 띄지 않는 구석 혹은 별도의 공간에 있다. 그래서 이용자는 그 존재를 잘 모르지만, 서가에서 아주 낡고 오래되거나 파손된 책을 만났을 때 자신도 모르게 설핏 지었을 찡그린 표정으로 그의 미래를 예감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일하는 학교 도서관에 폐기 (예정) 도서는 서고에 있다. 서고 문을 열고 들어가면 좁은 공간을 빽빽이 채운 서가 대부분에 터줏대감처럼 자리 잡고 있다. 누렇게 바랜 종이, 구겨지거나 찢어진 표지, 책 등의 흐릿한 제목 글자,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풀풀 날리는 먼지. 출간된 지 오래된 책의 글자들은 너무 작거나 간격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노안이 온 내 두 눈이 돋보기부터 쓰라고 발악을 한다. 출간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어도 한때 인기가 많았던 책들은 너덜너덜 누더기가 된 표지를 과시하며 찬란했던 한때를 되새김질한다.


해리포터 시리즈처럼 가만있어도 찾는 학생이 넘쳐나는 책이거나 학교 국어 수업에 필수 작가인 염상섭, 채만식, 이광수, 김유정 등의 한국 근현대소설책들은 한시절 이용이 잦은 만큼 구비된 복본으로 대가족을 일군 덕에 적막한 서고에서도 왠지 외로워 보이지 않는다.


책의 화려했던 역사와 나의 역사가 맞물려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90년 초반 출판된 이은성 작가의 <소설 동의보감>은 당시 꽤 인기가 많았던 덕에 아버지가 구입하셨고 나도 덩달아 재미나게 읽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드라마 '허준'으로 방영되며 우리 가족 모두 책 보다 더 푹 빠져 보았다. <소설 동의보감>의 내용보다 존재 자체가 나의 지난 시절을 불러와 향수에 젖게 한다.


시대가 달라지면서 이제 책에 담긴 내용이 의미가 없어진 책도 있겠지만 여전히 지혜를 담고 있는 책도 많다. 눈의 띄는 제목의 책은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을 해본다. 신판이 나오지 않은 채 절판된 책들 중에는 폐기하기 아쉬운 책도 있다. 학교도서관이라는 특성과 공간의 제약은 있으나, 본디 도서관은 인류의 지식 보고인 책을 보존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하니 혹시 몰라 그런 책들은 다른 편에 모아둔다. 권한자의 재고를 바라는 마음으로.


눈에 익은 책들만큼 폐기(예정) 도서의 나머지는 내가 존재조차 몰랐던 책들이다. 내가 여기서 사서로 일하지 않았다면 평생 만나지 못했을 책들이 이 서고에서 조용히 사라져 갈 준비를 하고 있다. 아니 준비 중인 사람은 사실 사서인 나다. 북트럭에 애들을 태우고 환한 서고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삑, 삑, 삑, 한 권 한 권 책의 정보가 담긴 바코드를 찍음으로써 마지막을 향한 확인 사살을 한다. 다시 책들을 서고 안 제자리로 돌려보내며, 나는 그들을 어루만졌을 내 손길이 부디 다정하였기를 바란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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