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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리보안관 Aug 11. 2020

여섯살, 내 딸은 TV를 끊었다

만천이백개의 보석을 지키는 방법 

내 딸은 여섯살이다. 

온 세상의 삼라만상을 오감으로 체득하며 배우는 인생을 살고 있다. 

그리고 나는 직장에서 만난 다섯살 많은 언니와 친언니 이상으로 친하게 지내고, 이주에 한번씩은 사적으로 만나고 있다. 

코로나가 대유행이 되기 직전인 1월 말쯤, 언니와 나는 정기적인 수다를 위해 식당에서 만났다. 

하필 그때 딸이 겨울방학 중이라서, 진지한(?) 수다에 방해가 될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이 딸도 동행했다. 


언니는 아이를 사랑하고 예뻐하지만, 아직 노키즈 부부다. 

그래서인지 내 딸을 굉장히 예뻐하는데, 그 날도 사랑스러운 눈으로 내 딸에게 물었다. 

"소희야, 넌 어쩜 이렇게 예쁠까. 머릿속에는 또 뭐가 들어있길래 이렇게 사랑스러울까."

이 질문에 내 딸은 뭐라고 답했을까.

"뭐긴 뭐겠어, 보석이 들어있지."

헉.

아무리 내 딸이라고 해도, 머릿속에 보석이 들었다고 말한다니. 어이가 없어서 언니랑 나랑 정말 박장대소를 했다. 그리곤 여느때처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헤어졌다. 

나는 머리에 보석이 들었다는 딸의 말이 웃기기도 신기하기도 해서 오는 길에 또 물어봤다. 

"소희,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다고?"

"아까 이모한테 보석이 들어있다고 이야기 했잖아. 엄마 그새 까먹은거야?"

"우와, 어떻게 머리에 보석이 있을 수 있지? 엄마가 머리 한 번 봐도 되?"

나는 실제로 머리통을 들여다봤다. 흰 두피에 빼곡히 차있는 머리카락들. 그 안에 보석이라니. 6세 감성이란..ㅎ

그래도 감성을 파괴할 수는 없어 대화를 이어갔다. 

" 소희야, 대박이다. 머릿속에 보석이 진짜 많이 들어있는데??"

" 그치 ? 엄청많이 들어있지? 핑크색 보석이 진짜 많이 있다니깐. 만천이백개."

"어? 왜 만천이백개야?"

"그냥 만천이백개인데?"

내 아이가 어디서 주워들은 가장 큰 숫자가 만천이백개다. 아무튼 이 어이없는 대화는 그날 이정도로 마무리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치원만 끝나면 시청하는 TV와 유튜브로 골치를 앓고 있을 때 밑져야 본전인 방법이 떠올라서 하원한 딸에게 말을 건냈다. 

"소희야, 너 이제 선생님이 티비랑 유튜브 보면 안된대."

"뭐? 갑자기 왜. 엄마 거짓말한다."

"진짜야. 선생님한테 전화왔었어. 너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댔지?"

"핑크보석"

"몇개라고 그랬었지?"

"만천이백개."

"그 만천이백개 보석 있잖아. 그거 티비랑 유튜브 보면 하나씩 없어진다고 선생님이 알려주시더라구. 그런데 소희가 반짝반짝 예쁜 그림그리고, 동화책 읽고 피아노치면서. 좋은 생각 많이 하면 보석이 늘어난대. 엄마한테 꼭 소희한테 이야기 해주라고 그러셨어."

"헐. 그럼 여태까지 티비본 거 어떡해? 머리 보석 줄어들었어? 엄마가 한번 봐봐."

"응 볼게. 어머 두개 정도 줄은거 같은데? 큰일났다. 이제 티비랑 유튜브 보지말고, 엄마랑 책읽고 그림그리기 많이해야겠다 그치?"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충격을 받은 내 딸은 엉엉 울었다. 

내 말을 이렇게 진심으로 받아들일 줄 몰라서 나도 충격이었지만, 뭔가 정말 티비를 끊을 수 있을 것 같은 강한 느낌이 왔다. 

딸은 퇴근하고 온 아빠에게도 같은 이야기를 하며, 진짜냐고 물었고, 아빠는 나보다 한술 더 떴다. 

"너 그때 호기심딱지에서 뇌느님 봤었지? 뇌느님이 핑크색이잖아. 뇌느님은 티비랑 유튜브 안보시거든. 그래서 보석이 엄청 반짝반짝 거려서 그렇게 핑크색인거야. 소희도 티비랑 유튜브 안보면 뇌느님처럼 될 수 있어."

와. 한술이 아니라 열술은 더 뜨는 남편 너란인간. 감동이다. 


주접 코드가 잘 맞는 우리 세식구는 이른바 뇌-핑크보석설에 흠뻑 빠져들었고, 이 날 이후로 티비를 본적이 없다. 만천이백개의 보석을 지키기 위해 그녀가 몸소 보인 행동은 실로 놀라웠다. 

하원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좀먹었던 TV와 유튜브는 아이클레이와 그림그리기가 대신해줬고, 큰 맘먹고 중고로 들인 전집 '안녕마음아'가 딸아이 곁을 항상 지켜줬다. 물론 세이펜과 함께.

딸아이의 변화된 모습을 보며 장난삼아 사놓고 쳐박아뒀던 유아용 바이올린을 꺼내줬고, 피아노를 연주하겠다며 십분이 넘게 건반을 두들겨 보기도 한다. 

와 여섯살의 실행력이란.


그리고 종종 아이가 나에게 묻는다. 

"엄마, 내 머리 한번 봐봐 보석 그대로인지."

"어. 한번 보자. 오 ~ 요즘 엄마한테 그림 많이 그려주더니 보석 열개나 늘어났는데? 만천이백열개야."

"진짜? 이따 아빠한테 말해줘야지!! 또 그림그려야겠다."


좋지 않은 습관을 없애기 위해서는 좋은 습관을 '실행'해야한다. 

동기가 어찌됐든 나는 아이의 뇌 안에 있는 '만 이천개의 핑크보석'을 지키기 위한 손쉬운 '실행력'에 적잖이 놀랐다. 


' 행동하는 게 어려운 게 아니구나.'


아이를 보며 나도 나쁜 습관 하나를 고쳤다. 

나는 기질적으로 예민한 사람이라 원래 잠귀가 밝은데, 퇴사 직전 팀장과의 불화로 얻은 불면증으로 약이 없으면 아직도 잠에 잘 못든다. 

그런데 내게 아주 안좋은 습관이 있었다. 

자려고 세식구가 누워 불을끄면, 난 꼭 휴대폰을 켠다. 중요한 것도 없는데. 인스타를 보고, 네이버 기사를 괜히 한번씩 본다. 이 짓이 이삼십분 이어지다보니 항상 제일 늦게 잠들고, 잠들어도 금방 깼었다. 

이런 패턴을 반복하던 어느 평범한 날, 딸아이가 나에게 진지한 눈망울로 말했다.

"엄마. 잠들기 전에 핸드폰 보면, 잠의 요정이 안와. 그러니까 정말 중요한 거 아니면 핸드폰 보면 안돼."

"어. 맞아. 소희 똑똑하네. 엄마 이제 핸드폰 안볼께. 오늘 잠 잘왔으면 좋겠다."

"엄마 잠 잘들게 내가 토닥토닥 해줄테니까 엄마도 나 토닥토닥해줘."

이 짧은 대화는 아직까지도 나한테 엄청난 무게감을 준다. 

뭐랄까. 아이가 보석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에 보답을 해야하는 의무정도라고 해야햐나. 


나도 이날 이후로 '자기전에 핸드폰 안보기'를 실행했다.

행동으로 옮기는 건 생각보다 아주 간단했다. 불을 끄고, 누운다음 한손으로 아이 팔베개를, 한손으로 토닥토닥을 해주는 것이다. 

손이 두 개인지라, 핸드폰을 볼수가 없지 않는가. ㅎ


이 간단한 행동으로 나는 전보다 훨씬 더 쾌적하게 잠에 든다. 

나는 오늘도 수많은 좋은 습관들을 떠올리며, 어떻게 하면 나도 저런 습관을 가질까 생각하면서 산다. 

그런데, 그건 단지 행동으로 옮기면 되는 거였다. 


참고로 요즘은 내 딸의 핑크보석이 만천삼백개로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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