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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니 Jun 28. 2024

하얼빈에서 외친다, 코레아 우라!

비슷하면서도 꽤 다른 동북아시아 여행기

2018년에 나는 안중근의사기념관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2018년 때는 하얼빈역이 공사 중이었고 임시로 기념관을 다른 곳에 만들어놓았고 안중근의사의 기념관을 방문했었을 당시, 이토히로부미를 사살했던 현장을 볼 수 없어서 아쉬웠다.


그래도 안중근의사기념관을 방문한 것에 의의를 두었고 그렇게 나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언젠가는 꼭 다시 하얼빈역에서 볼 거라는 다짐과 함께!

그리고 드디어 6년 만에 하얼빈에 방문하였고 당시 공사 중이라 가려져있던 하얼빈역이 크게 보이기 시작하였다. 택시를 타고 가는데 택시기사가 안중근의사기념관으로 내가 주소를 치니까 안중근 의사가 누구냐고 물었다. 나는 간결하게 '일본의 정치가이자 권력자인 이토히로부미를 사살한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라고 표현했다.


한국인이냐고 물어봤고 한국인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안중근'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것 같다면서 일본인을 총으로 사살했다는 얘기를 옛날에 얼핏 들었던 것 같다고 얘기했다.


아마 하얼빈역 옆에 있을 거라고 하고 우리를 하얼빈역 식당 근처에 내려다 줬다. 왜냐하면 하얼빈역에서 전에 내려줬다가 벌금을 물었다고 한다.


그렇게 하얼빈역에 도착하니 가다 보니 '안중근의사기념관'이라는 간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이 보였는데 이 문이 들어가는 문인가 싶었다. 그게 바로 입구였다. 들어갔더니 2명의 직원이 있었고 한 명이 여권을 보여달라고 한다.

우리는 도착했을 때 딱 9시가 약간 넘은 시간이었고 여권을 보여준 후 바로 입장을 하였다. 들어오면 바로 보이는 건 안중근의사의 동상이다. 그리고 입구로 들어가면 안중근 의사의 출생과 성장과정을 볼 수 있었다.

안중근 의사님은 성격이 호방하고 서예를 즐겨했다고 한다. 천주교에 입교해서 세례를 받았는데 '도마'라는 교명을 얻었다고 한다.


나는 오기 전에 김훈작가의 '하얼빈'이라는 책을 반절정도 읽고 왔는데 책 안에서도 '도마'라는 교명이 나온다.

가장 감명 깊게 봤었던 건 독립운동가분들께서 안중근의사에 대해 칭송하는 말을 적었는데 김구선생님의 말이 제일 감명 깊게 받았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에

한걸음조차도 어지럽히지 말지어다.

오늘 나의 이 발걸음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로다.


39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이런 멋있는 글을 쓰다니! 너무 존경스러웠다.


안중근 의사님은 뛰어난 서예가였다. 감옥에서 200 여폭의 글씨를 썼다고 한다. 들어올 때부터 서예그림이 있었는데 안중근 의사님이 직접 쓰신 것처럼 보였는데 정말 맞았다.

의병투쟁 다음으로 이토히로부미의 얘기가 나온다. 이토히로부미는 내각총리대신, 즉 일본의 정치가이다. 중일 갑오전쟁과 일러 전쟁을 발동한 주요 인물이었다.

김훈 작가님의 '하얼빈'소설에도 우덕순의사가 나오는데 안중근의사기념관에도 우덕순 의사 이외에도 의거방안을 상의했던 다른 독립운동가분들의 성함과 사진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2018년 때는 보지 못했던 안중근 의사님이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했던 장소를 실제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지하철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서 기념관 안에서 정확히 거리를 표시해 두었다. 내가 걸었을 때는 대략 여덟 걸음에서 열 걸음 정도의 거리였다. 정말 가까운 거리에서 쏘았다고 보면 된다. 이 자리에 있으니 꼭 1909년 10월 26일 그 현장에 내가 있었던 것만 같았다.

10월 30일 하얼빈주재일본총영사관 지하실에 있는 심문실에서 심문을 진행했는데 당시 심문했던 미조부치가 제기한 질문에 이토의 15가지 죄목을 열거하며 안중근 의사님은 완벽하게 대답을 하셨다.


그러나 그 이후의 삶이 너무 잔혹했다. 안중근의사님은 1909년 11월 1일에 다른 동지들과 함께 여순감옥으로 출발해서 당시 공개심판을 진행했다. 다른 나라 변호사들이 무료변호를 신청했는데 모두 거절당했다고 한다. 방청객도 거의 일본인이었다.

그리고 재판도중 안중근의사는 정당한 이유와 목적을 진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법관은 안중근 의사님의 발언을 중지시키고 휴정을 선포하며 방청을 취소시키면서 갖은 수단으로 정의로운 진술을 가로막았었다.


결국에는 1910년 2월 14일 공판에서 안중근 의사님은 사형을 집행받았다. 근데 여기서 안중근 의사님이 말하시길 미소를 지으면서 "일본에 사형보다 더 중한 형벌은 없냐"라고 물었다고 한다. 누구보다도 더더욱 간절하게 독립을 바라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리고 안중근 어머님 역시 독립운동에 헌신한 위대한 여성이었다. 그래서 안중근 의사님께 "네가 나라를 위해 이른즉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말고 죽으라"라고 말을 전했다고 한다. 정말 대단하고 멋있는 여성이라고 느껴졌다.

마지막에 방명록을 쓰는 공책이 있다. 사실, 정말 맘 같아서는 모금함이 있다면 돈을 많이 넣어서 운영비에 더 보태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모금함은 따로 없었다. 그리고 방명록에다가 남겼다. 절대 잊지 않겠다고!


가장 슬펐던 건 안중근 의사님의 유해를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당시 일본정부가 시신을 암매장해버리는 바람에 그 후 유해발굴에 대한 노력을 수차례 해왔지만 아직도 못 찾고 있다는 게 그저 마음이 아플 뿐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유언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으로 반장 해달라고 했지만 아직도 못 찾고 있으니 그저 답답한 마음이다. 얼른 안중근 의사님이 고국으로 돌아오기를 바랄 뿐이다.


동생은 방명록에 아주 간단명료하게 적었다. 동생이 쓴 게 매우 와닿았다.


감사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는 안중근 의사님이 이토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외친 구호, 즉 대한독립만세이다!)

안중근 의사님 동상 앞에 왼손 약지 마디를 새끼손가락과 맞춰서 접고 가슴에 대고 사진을 찍었다.

적나라하게 묘사된 안중근 의사를 잡으려는 러시아 헌병들의 그림

그렇게 나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나왔고 간판 앞에서 다시 사진을 찍으며 독립운동가 분들의 심정이 어땠을지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근엄한 표정을 지었는데 엄마가 나보고 독립운동가 같다고 하였다.

내가 찍고 나니까 어떤 중국인 아주머니 2명이 여기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알고 찍은 건지 아님 단지 내가 찍어서 따라서 찍은 건지는 알 수 없었으나 우리가 나왔을 때도 몇 팀의 현지인들이 기념관을 방문했었다.

하얼빈역은 2018년 때는 모습을 감추었다가 리모델링된 모습으로 드러났는데 정말 중국의 큰 스케일에 다시 놀라곤 했다. 하얼빈 여행을 한다면 한국인이라면 무조건 들리는 '안중근의사기념관'.


잊지 말자,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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